"키워드 :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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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대훈장은 대한제국기인 1902년(광무 6) 9월에 대훈위 훈장으로, 금척대훈장 다음에 수여하도록 제정한 훈장이다. 금척대훈장과 이화대훈장 사이에 추가하여 황친이나 문무관 중에서 이미 이화대훈장을 받은 자가 특별한 공이 있을 때 수여하도록 제정하였다. 대훈위로 등급이 따로 없으며, 훈장의 형태는 홍색 바탕에 3개의 은색 별이 있고, 백색 광선과 이화문으로 주위를 둘렀다.
서성대훈장 (瑞星大勳章)
서성대훈장은 대한제국기인 1902년(광무 6) 9월에 대훈위 훈장으로, 금척대훈장 다음에 수여하도록 제정한 훈장이다. 금척대훈장과 이화대훈장 사이에 추가하여 황친이나 문무관 중에서 이미 이화대훈장을 받은 자가 특별한 공이 있을 때 수여하도록 제정하였다. 대훈위로 등급이 따로 없으며, 훈장의 형태는 홍색 바탕에 3개의 은색 별이 있고, 백색 광선과 이화문으로 주위를 둘렀다.
훈장조례는 1900년 4월 17일 공포·실시된 훈장 수여에 관한 법령으로 대한제국시대의 훈장제도이다. 1899년 7월 4일에 표훈원이 창설되면서 훈위와 훈등을 제정하고 그 계급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였다. 훈등은 대훈위·훈·공 등 3종으로 구분되었으며, 훈과 공은 1등에서 8등까지로 나누어졌다. 훈장의 종류는 처음에는 금척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자응장이었는데 금척대훈장 다음으로 서성대훈장을 추가하고 태극장 다음으로 팔괘장을 추가하였다. 훈장에는 연금이나 일시 하사금이 지급되었다. 훈장은 본인 외에는 패용하지 못하고, 자손에게도 물려주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훈장조례 (勳章條例)
훈장조례는 1900년 4월 17일 공포·실시된 훈장 수여에 관한 법령으로 대한제국시대의 훈장제도이다. 1899년 7월 4일에 표훈원이 창설되면서 훈위와 훈등을 제정하고 그 계급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였다. 훈등은 대훈위·훈·공 등 3종으로 구분되었으며, 훈과 공은 1등에서 8등까지로 나누어졌다. 훈장의 종류는 처음에는 금척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자응장이었는데 금척대훈장 다음으로 서성대훈장을 추가하고 태극장 다음으로 팔괘장을 추가하였다. 훈장에는 연금이나 일시 하사금이 지급되었다. 훈장은 본인 외에는 패용하지 못하고, 자손에게도 물려주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비류국은 삼국시대, 고구려 건국기에 비류수 상류에 위치하였던 국가이다. 비류국은 주몽이 졸본에 오기 전 오랫동안 이 일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였으나,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끝에 투항하였다. 이후 비류국은 비류부(沸流部) 혹은 비류나부(沸流那部)로 지칭되는데, 이들은 중국측 사료에 소노부(消奴部) 내지 연노부(涓奴部)로 등장하는 세력과 동일한 집단이다.
비류국 (沸流國)
비류국은 삼국시대, 고구려 건국기에 비류수 상류에 위치하였던 국가이다. 비류국은 주몽이 졸본에 오기 전 오랫동안 이 일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였으나, 주몽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끝에 투항하였다. 이후 비류국은 비류부(沸流部) 혹은 비류나부(沸流那部)로 지칭되는데, 이들은 중국측 사료에 소노부(消奴部) 내지 연노부(涓奴部)로 등장하는 세력과 동일한 집단이다.
「사학규제」는 1659년 2월 성균관 좨주 송준길이 효종의 명에 의하여 작성한 교육정상화 종합 방안이다. 주요 내용은 사부학당의 운영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지만, 이외에도 한성의 동몽교관 증원, 지방의 동몽교육 장려, 생원진사시의 조흘강 규정 강화 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된다. 이후 「사학규제」는 사부학당은 물론 한성과 지방의 동몽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사학규제 (四學規制)
「사학규제」는 1659년 2월 성균관 좨주 송준길이 효종의 명에 의하여 작성한 교육정상화 종합 방안이다. 주요 내용은 사부학당의 운영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지만, 이외에도 한성의 동몽교관 증원, 지방의 동몽교육 장려, 생원진사시의 조흘강 규정 강화 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된다. 이후 「사학규제」는 사부학당은 물론 한성과 지방의 동몽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서봉장은 1907년(광무 11) 3월에 제정되어 내외명부에게 수여한 대한제국기의 훈장이다. 형태는 조선시대 때 예식에 쓰는 모자의 형태를 본떠서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1등에서 6등까지 차등을 두었으며, 여성에게도 나라에 세운 공훈을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서봉장 (瑞鳳章)
서봉장은 1907년(광무 11) 3월에 제정되어 내외명부에게 수여한 대한제국기의 훈장이다. 형태는 조선시대 때 예식에 쓰는 모자의 형태를 본떠서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1등에서 6등까지 차등을 두었으며, 여성에게도 나라에 세운 공훈을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이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뜰 아래 한편에 지어 기거하게 한 공부방. 서방.
책방 (冊房)
아이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뜰 아래 한편에 지어 기거하게 한 공부방. 서방.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해병」, 「대전장」, 「어머니」 등에 출연한 배우. 영화배우, 악극배우.
장동휘 (張東輝)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해병」, 「대전장」, 「어머니」 등에 출연한 배우. 영화배우, 악극배우.
이유주는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3일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용정 서전평야에서 한국인 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이 모여 ‘3 · 1운동 축하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이유주는 군중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유주 (李裕周)
이유주는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3일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용정 서전평야에서 한국인 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이 모여 ‘3 · 1운동 축하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이유주는 군중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준배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전개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장리 시장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날 검거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서 헌병을 피살하였다. 다음날 관련자 검거 때 체포되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준배 (李俊培)
이준배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전개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장리 시장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날 검거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서 헌병을 피살하였다. 다음날 관련자 검거 때 체포되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현설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수면 신리 구장으로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창수주재소를 점거 파괴한 후, 귀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현설 (李鉉卨)
이현설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영덕군 창수면 창수동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수면 신리 구장으로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창수주재소를 점거 파괴한 후, 귀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혜준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일 만세시위로 검거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3월 4일 사천시장에 모여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일제 헌병과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렬한 시위 끝에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혜준 (李兮俊)
이혜준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마을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일 만세시위로 검거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3월 4일 사천시장에 모여 사천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일제 헌병과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렬한 시위 끝에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흥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의 3 · 1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4일 마을 주민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였다. 3월 25일에는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안을 시위 행진하였다. 이틀 동안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1920년 2월 10일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흥돌 (李興乭)
이흥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의 3 · 1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4일 마을 주민과 함께 동리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였다. 3월 25일에는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 주민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안을 시위 행진하였다. 이틀 동안의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1920년 2월 10일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최석길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 성남리 시장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일 황주군 황주면 성남리 시장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천도교 간부인 김성준, 황기타와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3월 2일 성남리 시장에서 공약 3장에 대한 연설을 한 후, 천도교인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석길 (崔錫吉)
최석길은 일제강점기,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 성남리 시장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일 황주군 황주면 성남리 시장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천도교 간부인 김성준, 황기타와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3월 2일 성남리 시장에서 공약 3장에 대한 연설을 한 후, 천도교인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석일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군 정주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천도교 정주교구장으로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연합하여 진행한 대규모 만세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태극기를 흔들고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양팔을 잃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석일 (崔晳一)
최석일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군 정주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천도교 정주교구장으로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연합하여 진행한 대규모 만세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태극기를 흔들고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양팔을 잃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승탁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 내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 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도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고종황제 추도식을 거행한 후, 최승탁은 시위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한 후,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시위대에 위협을 느낀 일제 헌병들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9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최승탁 (崔承鐸)
최승탁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 내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읍 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도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고종황제 추도식을 거행한 후, 최승탁은 시위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한 후,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시위대에 위협을 느낀 일제 헌병들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9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최윤식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이 연합하여 전개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양평군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양부인 최대현이 주도하였던 고종 승하 애도 기부금 모집 과정에 참가하여 취지문을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연이어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3일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 4개 면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최윤식 (崔允植)
최윤식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이 연합하여 전개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양평군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양부인 최대현이 주도하였던 고종 승하 애도 기부금 모집 과정에 참가하여 취지문을 인쇄하고 배포하였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연이어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3일 강상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 4개 면 연합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최익선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3일 연길현 용정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용정촌 서전평야에 모인 조선인들이 독립선언 축하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하였는데, 대규모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중국 보병단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익선 (崔益善)
최익선은 일제강점기,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3일 연길현 용정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용정촌 서전평야에 모인 조선인들이 독립선언 축하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하였는데, 대규모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중국 보병단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혜수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경성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창립에 동참하여 활동하였고, 1920년 독립운동 비밀결사 암살단의 활동을 도왔다. 1923년 의열투사 김상옥의 은신을 돕고 거사 준비금을 전해 주는 등 여러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병든 몸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혜수 (李惠受)
이혜수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경성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창립에 동참하여 활동하였고, 1920년 독립운동 비밀결사 암살단의 활동을 도왔다. 1923년 의열투사 김상옥의 은신을 돕고 거사 준비금을 전해 주는 등 여러 활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해 병든 몸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윤국은 일제강점기, 서울 부민관 투탄의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에서 항일노동운동을 벌이고 귀국하여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일제의 앞잡이 박춘금의 주도로 개최되는 선전극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 개최 장소인 경성부민관에 침투하여 미리 폭탄을 장치해놓고 대회 현장에서 터뜨리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대회는 혼란에 빠지고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의열투쟁의 대미를 이루었다.
강윤국 (康潤國)
강윤국은 일제강점기, 서울 부민관 투탄의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에서 항일노동운동을 벌이고 귀국하여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일제의 앞잡이 박춘금의 주도로 개최되는 선전극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 개최 장소인 경성부민관에 침투하여 미리 폭탄을 장치해놓고 대회 현장에서 터뜨리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대회는 혼란에 빠지고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의열투쟁의 대미를 이루었다.
김기득은 일제강점기, 국내와 중국, 일본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때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국내 일제 기관 총공격 거사의 행동요원으로 대기하던 중 체포되어 장기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신간회 활동을 거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었다. 다시 2년의 옥고를 겪고 출옥한 뒤,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김기득 (金奇得)
김기득은 일제강점기, 국내와 중국, 일본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 때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국내 일제 기관 총공격 거사의 행동요원으로 대기하던 중 체포되어 장기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신간회 활동을 거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었다. 다시 2년의 옥고를 겪고 출옥한 뒤,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