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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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자신의 회혼(回婚)을 기념하여 그린 석란도(石蘭圖) 12폭 병풍. 동양 미술사상 묵란화를 병풍이라는 큰 화면에 제작한 것도 이하응이 처음이고, 각 폭 마다 다른 사구인을 찍는 방식 또한 이하응이 처음 시도한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 의의와 평가 생존 당시부터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이하응의 묵란화는 구도와 필묵법에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여 한국식 묵란화풍의 한 전형을 수립했다. 특히 시서화일치의 이념과 난과 괴석의 묘사가 조화를 이루는 이 「묵란도」12폭 병풍은 조선 말기 묵란화의 발달과 유행에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 동양 묵란화사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김정숙, 일지사, 2004)
흥선대원군 이하응 필 묵란도 (興宣大院君 李昰應 筆 墨蘭圖)
1891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자신의 회혼(回婚)을 기념하여 그린 석란도(石蘭圖) 12폭 병풍. 동양 미술사상 묵란화를 병풍이라는 큰 화면에 제작한 것도 이하응이 처음이고, 각 폭 마다 다른 사구인을 찍는 방식 또한 이하응이 처음 시도한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 의의와 평가 생존 당시부터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이하응의 묵란화는 구도와 필묵법에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여 한국식 묵란화풍의 한 전형을 수립했다. 특히 시서화일치의 이념과 난과 괴석의 묘사가 조화를 이루는 이 「묵란도」12폭 병풍은 조선 말기 묵란화의 발달과 유행에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 동양 묵란화사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김정숙, 일지사, 2004)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상복(常服) 단령(團領)에 달았던 기린(麒麟)이 수놓인 흉배. 흥선대원군은 기린흉배가 대군의 것이기 때문에 대원군[^1]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1895년(고종 32)부터는 거북흉배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기린흉배는 흥선대원군이 적어도 1895년 이전 시기에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기린흉배가 1987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흥선대원군 자적단령에 부착되어 있는데, 이 흉배에 비하여 기린의 표현방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크기도 작아 좀 더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기린은 일종의 상상의 동물로서 중국의 『고금도화집성(古今圖畵集成)』에서는 기린에 대해 ‘산 풀을 밟지 않는 어진 짐승으로 그 모습은 사슴의 몸...
흥선대원군 기린흉배 (興宣大院君 麒麟胸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상복(常服) 단령(團領)에 달았던 기린(麒麟)이 수놓인 흉배. 흥선대원군은 기린흉배가 대군의 것이기 때문에 대원군[^1]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1895년(고종 32)부터는 거북흉배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기린흉배는 흥선대원군이 적어도 1895년 이전 시기에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기린흉배가 1987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흥선대원군 자적단령에 부착되어 있는데, 이 흉배에 비하여 기린의 표현방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크기도 작아 좀 더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기린은 일종의 상상의 동물로서 중국의 『고금도화집성(古今圖畵集成)』에서는 기린에 대해 ‘산 풀을 밟지 않는 어진 짐승으로 그 모습은 사슴의 몸...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입었던 자적색(紫赤色) 겹단령. 흥선대원군 자적 단령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입었던 자적색의 겹단령이다. 단령은 시무시에 착용하는 상복으로 흥선대원군이 섭정기간에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겉감은 자색 본사(本紗), 둥근 단령 깃이고 안감은 홍색 본사, 곧은 직령 깃이다. 가슴과 등에는 대군용 기린흉배(麒麟胸背)가 부착되어 있다. 1895년 복제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기린흉배가 포함된 완전한 형태의 왕실유물이므로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1987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입었던 자적색 겹단령...
흥선대원군 자적 단령 (興선大院君 紫赤 團領)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입었던 자적색(紫赤色) 겹단령. 흥선대원군 자적 단령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입었던 자적색의 겹단령이다. 단령은 시무시에 착용하는 상복으로 흥선대원군이 섭정기간에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겉감은 자색 본사(本紗), 둥근 단령 깃이고 안감은 홍색 본사, 곧은 직령 깃이다. 가슴과 등에는 대군용 기린흉배(麒麟胸背)가 부착되어 있다. 1895년 복제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기린흉배가 포함된 완전한 형태의 왕실유물이므로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1987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개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입었던 자적색 겹단령...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각 지역에 보낸 효유문.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각 지역에 보낸 효유문이다. 대원군과 농민군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대원군의 정치적 입장과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물 사료이다.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보낸 밀사와 밀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겉으로는 효유문을 내려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실제로는 전봉준과 김개남 등 농민군과 유생들에게 봉기하여 일본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즉,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들에게 밀지를 내린 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농민군들이 해산할 것을 권하는 효유문을 내렸던 것이다....
흥선대원군 효유문 (興宣大院君 曉諭文)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각 지역에 보낸 효유문.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각 지역에 보낸 효유문이다. 대원군과 농민군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대원군의 정치적 입장과 행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물 사료이다.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보낸 밀사와 밀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겉으로는 효유문을 내려 농민군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실제로는 전봉준과 김개남 등 농민군과 유생들에게 봉기하여 일본을 몰아내자고 하였다. 즉,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들에게 밀지를 내린 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농민군들이 해산할 것을 권하는 효유문을 내렸던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대한제국기 왕족·정치인 이하응의 무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9년(1843) 흥선군에 봉해졌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섭정을 맡아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고집해 개항의 시기를 놓쳤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은퇴했으며, 이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출동한 청 군대에 납치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서 4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885년 귀국한 후에도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와 협력해 장남 완흥군 이재면(李載冕)을...
흥선대원군 묘 (興宣大院君 墓)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대한제국기 왕족·정치인 이하응의 무덤. 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9년(1843) 흥선군에 봉해졌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섭정을 맡아 조선왕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당색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고집해 개항의 시기를 놓쳤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은퇴했으며, 이 후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출동한 청 군대에 납치되어 청나라 톈진[天津]에서 4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885년 귀국한 후에도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와 협력해 장남 완흥군 이재면(李載冕)을...
삼국시대 때, 일길찬, 이찬 관등에 임명된 신라의 관리. # 내용 155년(아달라이사금 2) 일길찬(一吉飡)에 임명되었다. 167년 7월 백제가 나라 서쪽의 두 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1,000명을 포로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같은 해 8월에 흥선은 국왕의 명을 받아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아달라이사금이 친히 8,000기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수(漢水)에 진군하니 백제 초고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포로로 잡아갔던 신라인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흥선은 이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168년 4월에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흥선 (興宣)
삼국시대 때, 일길찬, 이찬 관등에 임명된 신라의 관리. # 내용 155년(아달라이사금 2) 일길찬(一吉飡)에 임명되었다. 167년 7월 백제가 나라 서쪽의 두 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1,000명을 포로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같은 해 8월에 흥선은 국왕의 명을 받아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아달라이사금이 친히 8,000기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수(漢水)에 진군하니 백제 초고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포로로 잡아갔던 신라인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다. 흥선은 이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168년 4월에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경상남도 남해지역의 옛 지명. # 내용 지금의 창선도(昌善島)에 해당하며 당시에는 흥선도라 하였다. 본래 삼국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으나 고려 때 창선현(彰善縣)으로 바꾸었다. 충선왕이 즉위한 뒤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같은 의미를 가진 흥선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 창선도리(昌善島里)로 직제를 고쳐 진주목관(晋州牧官)에 예속시켰고 임진왜란 후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시)에 속한 적이 있으나 곧 독립하였으며 1906년남해군에 이속되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이 섬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고려 원종 때 왜구가 침입한다 하여 이곳에 소장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적이 끊겨 주민들이 배로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 때 이곳에...
흥선 (興善)
경상남도 남해지역의 옛 지명. # 내용 지금의 창선도(昌善島)에 해당하며 당시에는 흥선도라 하였다. 본래 삼국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으나 고려 때 창선현(彰善縣)으로 바꾸었다. 충선왕이 즉위한 뒤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같은 의미를 가진 흥선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 창선도리(昌善島里)로 직제를 고쳐 진주목관(晋州牧官)에 예속시켰고 임진왜란 후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시)에 속한 적이 있으나 곧 독립하였으며 1906년남해군에 이속되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이 섬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고려 원종 때 왜구가 침입한다 하여 이곳에 소장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적이 끊겨 주민들이 배로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 때 이곳에...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 이하응은 대한제국기 제1대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이자 정치인이다. 1820년(순조 20)에 태어나 1898년에 사망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고 아들을 왕위에 즉위시켜 임금의 부친으로서 국정의 전권을 쥐었다. 쇠락한 왕권을 확립하고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해 개항에 반대하고 천주교를 박해했다. 하지만 열강의 침탈이 고조되던 정세 하에 명성황후 민씨 척족세력 및 개화세력과 대립하면서 근대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흥선군은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임금의 아버지로서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2)...
이하응 (李昰應)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 이하응은 대한제국기 제1대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이자 정치인이다. 1820년(순조 20)에 태어나 1898년에 사망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고 아들을 왕위에 즉위시켜 임금의 부친으로서 국정의 전권을 쥐었다. 쇠락한 왕권을 확립하고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해 개항에 반대하고 천주교를 박해했다. 하지만 열강의 침탈이 고조되던 정세 하에 명성황후 민씨 척족세력 및 개화세력과 대립하면서 근대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흥선군은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임금의 아버지로서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2)...
조선 말기,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 대장(大將)은 조선 말기,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이다. 원래 조선시대에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의 직책이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시기와 임오군란 직전까지 각 군영의 최고 지휘관으로 훈련대장, 여영대장, 금위대장, 장어대장 등을 말한다. 이후 갑오개혁 직전까지는 각급 군영의 영사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무신들의 지위와 그들에 대한 우대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비해 약화되었다. 그러던 중 1882년 2월, 종래의 5군영 체제를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 체제로 개편하고 초대 무위대장에는 이경하, 장어대장에는 신정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일시 재집권하면서 다시 5군영 체제로 복귀하였지만 군란 실패 이후 친군영 체제로 재편되었다....
대장 (大將)
조선 말기,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 대장(大將)은 조선 말기,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이다. 원래 조선시대에 각 군영의 최고위 지휘관의 직책이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시기와 임오군란 직전까지 각 군영의 최고 지휘관으로 훈련대장, 여영대장, 금위대장, 장어대장 등을 말한다. 이후 갑오개혁 직전까지는 각급 군영의 영사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무신들의 지위와 그들에 대한 우대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비해 약화되었다. 그러던 중 1882년 2월, 종래의 5군영 체제를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 체제로 개편하고 초대 무위대장에는 이경하, 장어대장에는 신정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일시 재집권하면서 다시 5군영 체제로 복귀하였지만 군란 실패 이후 친군영 체제로 재편되었다....
임오군란을 다룬 작자·연대 미상의 실기소설. 「임오군란기」는 임오군란을 다룬 작자·연대 미상의 실기소설이다. 1930년 덕흥서관에서 구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표기상 띄어쓰기, 괄호 안 한자 병기 등이 쓰였다. 내용은 서언과 여섯 개의 장회로 구성되었다. 여섯 개의 장회는 ①군사의 불평, ②창리의 작간 군사의 분기, ③군란의 폭발, ④군란의 제2일, ⑤민 왕후(명성황후)와 청국 구병, ⑥군란의 결과이다. 작가는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론을 통해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 표명했다. 서언과 결말에서 민 왕후와 그 일파에 반감을 드러냈다.대원군의 진무(鎭撫)로 이미 평정되었거늘 민파(閔派)들은 무슨 까닭으로 청병(淸兵)을 불러왔는고?”라고 서술한다. 작가는 이러한 서술로써 ‘흥선대원군...
임오군란기 (壬午軍亂記)
임오군란을 다룬 작자·연대 미상의 실기소설. 「임오군란기」는 임오군란을 다룬 작자·연대 미상의 실기소설이다. 1930년 덕흥서관에서 구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표기상 띄어쓰기, 괄호 안 한자 병기 등이 쓰였다. 내용은 서언과 여섯 개의 장회로 구성되었다. 여섯 개의 장회는 ①군사의 불평, ②창리의 작간 군사의 분기, ③군란의 폭발, ④군란의 제2일, ⑤민 왕후(명성황후)와 청국 구병, ⑥군란의 결과이다. 작가는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론을 통해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 표명했다. 서언과 결말에서 민 왕후와 그 일파에 반감을 드러냈다.대원군의 진무(鎭撫)로 이미 평정되었거늘 민파(閔派)들은 무슨 까닭으로 청병(淸兵)을 불러왔는고?”라고 서술한다. 작가는 이러한 서술로써 ‘흥선대원군...
19세기에,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를 계승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서원산(書院山)에 있는 사찰. 보덕사는 19세기에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를 계승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서원산(書院山)에 있는 사찰이다.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지관의 말을 듣고 부친이 묘를 옮기기 위해 1860년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이 있던 자리에 묘를 옮겼다. 그 후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지금의 자리에 보덕사를 창건하였다.사찰의 창건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의 아버지 ‘남연군 묘’의 이장과 관련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1836년(헌종 2)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남연군(南廷君) 이구(李球)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1845년(헌종 11)에 덕산의 가야산 자락으로 옮겼다가, 1860년(철종 11) 가야산 대덕사...
왕방산 보덕사 (王訪山 普德寺)
19세기에,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를 계승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서원산(書院山)에 있는 사찰. 보덕사는 19세기에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를 계승하여 창건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서원산(書院山)에 있는 사찰이다.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지관의 말을 듣고 부친이 묘를 옮기기 위해 1860년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이 있던 자리에 묘를 옮겼다. 그 후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지금의 자리에 보덕사를 창건하였다.사찰의 창건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의 아버지 ‘남연군 묘’의 이장과 관련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1836년(헌종 2)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남연군(南廷君) 이구(李球)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1845년(헌종 11)에 덕산의 가야산 자락으로 옮겼다가, 1860년(철종 11) 가야산 대덕사...
조선의 제26대(재위: 1863년~1907년) 왕. 고종은 조선후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863년~1907년이며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의 묵계 아래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외척연합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열강들 사이의 외교적 노력과 대한제국 수립 선포 등으로 자주권을 지키려 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이어 일본의 강요로 퇴위했고 1919년 승하했다.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즉위 당시 고종은...
고종 (高宗)
조선의 제26대(재위: 1863년~1907년) 왕. 고종은 조선후기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다. 재위 기간은 1863년~1907년이며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의 묵계 아래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야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외척연합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하는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열강들 사이의 외교적 노력과 대한제국 수립 선포 등으로 자주권을 지키려 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이어 일본의 강요로 퇴위했고 1919년 승하했다.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즉위 당시 고종은...
1872년, 전국 군현 지도집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전라감영에서 제작한 지도집. 『전라도지도』는 1872년 전국 군현 지도집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전라감영에서 제작한 지도집이다. 첩 형태의 채색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총 84장의 군현 지도와 섬, 진지, 포구 지도로 구성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 『1872년지방지도』 중 전라도 부분에 해당한다. 흥선대원군 정권 아래에서 시행된 정책 변화를 반영하였으며, 전라도 지역의 지리적, 행정적 정보와 생활공간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임진왜란과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고종 9) 전국적인 지도 제작 사업을 시작하였다....
전라도지도 (全羅道地圖)
1872년, 전국 군현 지도집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전라감영에서 제작한 지도집. 『전라도지도』는 1872년 전국 군현 지도집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전라감영에서 제작한 지도집이다. 첩 형태의 채색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총 84장의 군현 지도와 섬, 진지, 포구 지도로 구성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 『1872년지방지도』 중 전라도 부분에 해당한다. 흥선대원군 정권 아래에서 시행된 정책 변화를 반영하였으며, 전라도 지역의 지리적, 행정적 정보와 생활공간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임진왜란과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고종 9) 전국적인 지도 제작 사업을 시작하였다....
자연 풍경을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시. 산수시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시이다. 조선 시대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는 사대부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는 성리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 즉, 산수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도의(道義), 도체(道體)’를 찾는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산수관이었다. 전통적인 산수, 전원의 개념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아와 하나가 된 자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산수시는 오늘날까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시로 지어져서 우리의 미감을 촉발시켜 왔다. 산수시와 비슷한 전원시는 그 의미를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고산구곡가〉)의 ‘흥’은 도학적 기반 위에서 ‘서정으로서의 흥’이며, 고산 윤선도의 ‘나믄 흥’(〈어부사시사〉)의 흥은 도학과 관련짓지...
산수시 (山水詩)
자연 풍경을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시. 산수시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여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시이다. 조선 시대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지내는 사대부들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미는 성리학과 긴밀한 관련을 가졌다. 즉, 산수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도의(道義), 도체(道體)’를 찾는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산수관이었다. 전통적인 산수, 전원의 개념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아와 하나가 된 자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산수시는 오늘날까지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시로 지어져서 우리의 미감을 촉발시켜 왔다. 산수시와 비슷한 전원시는 그 의미를 구별해서 사용하기도 한다.(〈고산구곡가〉)의 ‘흥’은 도학적 기반 위에서 ‘서정으로서의 흥’이며, 고산 윤선도의 ‘나믄 흥’(〈어부사시사〉)의 흥은 도학과 관련짓지...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로 편찬한 대군·왕자군·적왕손·왕손의 교육 관련 의례서. 『교학정례』는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로 편찬한 대군·왕자군·적왕손·왕손의 교육 관련 의례서이다. 서문은 대원군이 작성하였고, 본문은 설청, 초기식, 절목식, 사부상견의, 상시교학의, 상시접견의, 고례 순으로 되어 있다. 고종 대 왕실 교육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교학정례』를 편찬한 것은 손자 완화군(完和君)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 완화군은 고종과 귀인(貴人) 이씨(李氏)의 소생으로서 왕실에서는 대군이 아니라 왕자군에 해당하고, 당시 나이가 4세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교학정례』는 왕자군인 완화군을 위해 공식적인 교육기구를 설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교학정례 (敎學定例)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로 편찬한 대군·왕자군·적왕손·왕손의 교육 관련 의례서. 『교학정례』는 1870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도로 편찬한 대군·왕자군·적왕손·왕손의 교육 관련 의례서이다. 서문은 대원군이 작성하였고, 본문은 설청, 초기식, 절목식, 사부상견의, 상시교학의, 상시접견의, 고례 순으로 되어 있다. 고종 대 왕실 교육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편찬 및 간행 경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교학정례』를 편찬한 것은 손자 완화군(完和君)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 완화군은 고종과 귀인(貴人) 이씨(李氏)의 소생으로서 왕실에서는 대군이 아니라 왕자군에 해당하고, 당시 나이가 4세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교학정례』는 왕자군인 완화군을 위해 공식적인 교육기구를 설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1620년(광해군 12) 이후에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전개된 분쟁. 병호시비는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후에 호계서원)에 배향된 이황의 제자 김성일과 류성룡 위패의 위치를 두고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대립한 분쟁이다. '병'은 류성룡 계열의 병산서원이고 '호'는 김성일 계열의 호계서원을 뜻한다. 위패의 위치는 제자로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병파는 직위를, 호파는 나이를 내세우며 동쪽을 주장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사안으로 분쟁이 이어지다가 2013년 호계서원 복원사업을 계기로 동쪽에 류성룡, 서쪽에 김성일의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결과 양측의 시비를 보합하려는 노력이 고종 초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병호시비 (屛虎是非)
1620년(광해군 12) 이후에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전개된 분쟁. 병호시비는 1620년(광해군 12) 여강서원(후에 호계서원)에 배향된 이황의 제자 김성일과 류성룡 위패의 위치를 두고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림들이 병파와 호파로 나뉘어 대립한 분쟁이다. '병'은 류성룡 계열의 병산서원이고 '호'는 김성일 계열의 호계서원을 뜻한다. 위패의 위치는 제자로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병파는 직위를, 호파는 나이를 내세우며 동쪽을 주장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사안으로 분쟁이 이어지다가 2013년 호계서원 복원사업을 계기로 동쪽에 류성룡, 서쪽에 김성일의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결과 양측의 시비를 보합하려는 노력이 고종 초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되었다.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명성황후 (明成皇后)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1851년(철종 2)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했다.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후로 추숭되었다.1863년(철종 14) 철종이 타계하자, 조대비의 명에 의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3년 뒤인 1866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1899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 『부령군읍지』는 1899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읍지상송령에 따라 편찬하였다. 1책 13장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를 첨부하였다. 1890년대 이후 개혁에 의한 변화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고적 항목에서 흥선대원군의 부세 제도 개혁을 기념한 비각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890년대 이후 부령 지역의 변화상을 상세히 기록한 읍지이다.행정 인원의 변화, 역참 등의 폐지,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 등 1890년대 이후 개혁에 의한 변화상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적 항목에서 흥선대원군의 부세 제도 개혁을 기념한 비각에 대해 소개한 점이...
부령군읍지 (富寧郡邑誌)
1899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 『부령군읍지』는 1899년 함경북도 부령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읍지상송령에 따라 편찬하였다. 1책 13장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를 첨부하였다. 1890년대 이후 개혁에 의한 변화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고적 항목에서 흥선대원군의 부세 제도 개혁을 기념한 비각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890년대 이후 부령 지역의 변화상을 상세히 기록한 읍지이다.행정 인원의 변화, 역참 등의 폐지,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 등 1890년대 이후 개혁에 의한 변화상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적 항목에서 흥선대원군의 부세 제도 개혁을 기념한 비각에 대해 소개한 점이...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이다.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주로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의 대외정책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또는 통상 거부 정책으로 고쳐서 표현하고 있다.이런 배경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왕국(朝鮮王國)』(菊池謙讓, 1896), 『조선개화사(朝鮮開化史)』(恒屋盛服, 1901) 등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대외정책을 쇄국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유입된 개념이 한국의 역사서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쇄국정책 (鎖國政策)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 쇄국정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이다.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주로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의 대외정책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또는 통상 거부 정책으로 고쳐서 표현하고 있다.이런 배경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왕국(朝鮮王國)』(菊池謙讓, 1896), 『조선개화사(朝鮮開化史)』(恒屋盛服, 1901) 등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대외정책을 쇄국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유입된 개념이 한국의 역사서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온 상여. 남은들 상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온 상여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소를 이곳 덕산면으로 옮길 때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마을 유래에 의하면 이곳이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하고 이듬해 낳은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이야기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과 이장 시기는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이전일 것이다. 상여의 부속품의 조각수법, 단청의 질이나 수법이 매우 뛰어난 점 등으로 보아 왕가에 버금가는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1974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남은들 상여 (남은들 喪輿)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온 상여. 남은들 상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 내려온 상여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소를 이곳 덕산면으로 옮길 때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 마을 유래에 의하면 이곳이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하고 이듬해 낳은 둘째 아들이 고종으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이야기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과 이장 시기는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이전일 것이다. 상여의 부속품의 조각수법, 단청의 질이나 수법이 매우 뛰어난 점 등으로 보아 왕가에 버금가는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라 짐작된다. 1974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이 상여는 조선 고종의 할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