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검색결과 총 1,154건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반란 사건이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묘청의 난 (妙淸의 亂)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반란 사건이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교육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 이러한 일장기 교게(敎揭)의 반대운동은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도 일어났으며, 신의주에서는 교원과 학생이 합세하여 일장기를 찢은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창호는 1910년 4월에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으며, 대성학교는 1912년 봄에 폐교당하였다. 1924년에 안창호는 중국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대성학교에서 못다한 민족성 개조와 교육구국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한말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군대가 되어 일본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는 「주의 군대여, 앞으로 나가자」·「다 깨라, 주의 군대여」·「그리스도 군병가」 등의 찬송가를 공공연하게 가르쳤고, 잔 다르크와 워싱턴 등의...
교육구국운동 (敎育救國運動)
교육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 이러한 일장기 교게(敎揭)의 반대운동은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도 일어났으며, 신의주에서는 교원과 학생이 합세하여 일장기를 찢은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창호는 1910년 4월에 “간다 간다 나는 간다.”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으며, 대성학교는 1912년 봄에 폐교당하였다. 1924년에 안창호는 중국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여 대성학교에서 못다한 민족성 개조와 교육구국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한말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군대가 되어 일본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는 「주의 군대여, 앞으로 나가자」·「다 깨라, 주의 군대여」·「그리스도 군병가」 등의 찬송가를 공공연하게 가르쳤고, 잔 다르크와 워싱턴 등의...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가덕도근해에서 싸운 해전. # 내용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원익(李元翼)과 권율(權慄)이 원균에게 “후방을 경계하는 동시에 수군을 출전시켜 바다로 침범하는 일본 수군의 길을 막으라.”고 하였는데, 원균은 먼저 육상병력으로 안골포(安骨浦)를 공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직접 한산도로 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을 재촉하자, 원균은 남이공과 함께 6월 18일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다음날 안골포로 쳐들어갔다. 이 때 일본 수군들은 해변에 숨어서 대포를 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치고 가덕도방면으로 나아갔는데, 마침 안골포의...
가덕도해전 (加德島海戰)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가덕도근해에서 싸운 해전. # 내용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원익(李元翼)과 권율(權慄)이 원균에게 “후방을 경계하는 동시에 수군을 출전시켜 바다로 침범하는 일본 수군의 길을 막으라.”고 하였는데, 원균은 먼저 육상병력으로 안골포(安骨浦)를 공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직접 한산도로 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을 재촉하자, 원균은 남이공과 함께 6월 18일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다음날 안골포로 쳐들어갔다. 이 때 일본 수군들은 해변에 숨어서 대포를 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치고 가덕도방면으로 나아갔는데, 마침 안골포의...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거문도사건은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조선점령에 대한 예방조처라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요새화했다. 국제적인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 사태를 처리하기 위한 열강간의 외교 교섭이 긴박하게 이루어졌고 영국의 철수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점령에서 철수에 이르는 과정에서 영토의 소유자인 조선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오로지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교섭이 진행되었다.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그러나 조선 정부는 사건의 해결 교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거문도사건 (巨文島事件)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거문도사건은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조선점령에 대한 예방조처라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요새화했다. 국제적인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 사태를 처리하기 위한 열강간의 외교 교섭이 긴박하게 이루어졌고 영국의 철수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점령에서 철수에 이르는 과정에서 영토의 소유자인 조선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오로지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교섭이 진행되었다.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그러나 조선 정부는 사건의 해결 교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寬奠堡) 등의 한인들이 후금의 점령에...
가도사건 (椵島事件)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寬奠堡) 등의 한인들이 후금의 점령에...
1889년(고종 26)부터 1892년 봄까지 강원도 낭천현(현재 강원도 화천군)에서 발생한 민란. # 내용 이 난은 호단위로 부과하는 요역인 호역(戶役)이 고르지 못함과 이서들의 환곡 부정 운영에 기인하였다. 민란의 첫 발생은 1889년이었는데, 이 때의 난은 감사(監司)가 소홀히 하여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상태로 계속되다가 1892년 봄에 인명의 살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피해자의 가족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현감의 길을 막고 소요함으로써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강원감사 윤영신(尹榮信)으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전 현감 신용(申榕)과 전 현감 이석쇄(李奭鎖)를 의금부에서 그 죄를 다스리게 하고, 민원의 대상이던 정태영(程泰英)과 다년간 창색(倉色)으로 환곡을 부정한 장팔달(張八達)을...
낭천민란 (狼川民亂)
1889년(고종 26)부터 1892년 봄까지 강원도 낭천현(현재 강원도 화천군)에서 발생한 민란. # 내용 이 난은 호단위로 부과하는 요역인 호역(戶役)이 고르지 못함과 이서들의 환곡 부정 운영에 기인하였다. 민란의 첫 발생은 1889년이었는데, 이 때의 난은 감사(監司)가 소홀히 하여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상태로 계속되다가 1892년 봄에 인명의 살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피해자의 가족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현감의 길을 막고 소요함으로써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강원감사 윤영신(尹榮信)으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전 현감 신용(申榕)과 전 현감 이석쇄(李奭鎖)를 의금부에서 그 죄를 다스리게 하고, 민원의 대상이던 정태영(程泰英)과 다년간 창색(倉色)으로 환곡을 부정한 장팔달(張八達)을...
1701년(숙종 27) 희빈(禧嬪) 장씨(張氏)로 인하여 일어난 옥사. 그런데 인현왕후가 죽은 뒤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무고의 옥이 일어났다. 이때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희빈을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왕은 희빈을 자진하도록 하고 희재와 장씨 일파를 국문하여 죽였으며, 남구만·유상운(柳尙運)·최석정(崔錫鼎) 등 소론 대신들을 귀양 또는 파면시켰다. 이 사건으로 소론세력은 약화되는 반면, 노론이 조정에 크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숙종실록(肅宗實錄)』 - 『약파만록(藥坡漫錄)』
무고의 옥 (巫蠱의 獄)
1701년(숙종 27) 희빈(禧嬪) 장씨(張氏)로 인하여 일어난 옥사. 그런데 인현왕후가 죽은 뒤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무고의 옥이 일어났다. 이때도 소론은 세자를 위하여 희빈을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왕은 희빈을 자진하도록 하고 희재와 장씨 일파를 국문하여 죽였으며, 남구만·유상운(柳尙運)·최석정(崔錫鼎) 등 소론 대신들을 귀양 또는 파면시켰다. 이 사건으로 소론세력은 약화되는 반면, 노론이 조정에 크게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숙종실록(肅宗實錄)』 - 『약파만록(藥坡漫錄)』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심어 민족정신을 앙양하고자 한 사건. 1933년 일제는 남궁 억의 이와 같은 사업이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치란을 교란시킨다 하여 모곡학교 교직원과 교회목사,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 체포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워버렸다. 이 무궁화사건 취조 중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십자당(十字黨)이 발각됨으로써 사건이 확대되고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십자당은 기독교의 진리·박애정신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남궁 억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체포된 남궁 억은 1935년 병보석으로 출소할 때까지 옥고를 겪었다. - 『종교교육투쟁』(이만열, 민족문화협회, 1981) - 『독립운동사』 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무궁화사건 (無窮花事件)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심어 민족정신을 앙양하고자 한 사건. 1933년 일제는 남궁 억의 이와 같은 사업이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치란을 교란시킨다 하여 모곡학교 교직원과 교회목사,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 체포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워버렸다. 이 무궁화사건 취조 중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십자당(十字黨)이 발각됨으로써 사건이 확대되고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십자당은 기독교의 진리·박애정신에 입각하여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남궁 억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체포된 남궁 억은 1935년 병보석으로 출소할 때까지 옥고를 겪었다. - 『종교교육투쟁』(이만열, 민족문화협회, 1981) - 『독립운동사』 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1715년(숙종 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 # 역사적 배경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80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고 책의 간행을 위해 관찰사에게 물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왕의 허락를 받았다. 그리하여 1715년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가례원류시말 (家禮源流始末)
1715년(숙종 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 # 역사적 배경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80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고 책의 간행을 위해 관찰사에게 물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왕의 허락를 받았다. 그리하여 1715년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1862년(철종 13) 충청도 공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 내용 그 해 삼남지방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농민들이 민자성(閔子成) 등의 선동으로 5월 16일 읍내에 모여 삼정(三政)의 폐해를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부호가에 방화할 뿐만 아니라 참판 심순택(沈舜澤)의 5대조 사우에도 방화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난의 수습을 위하여 충청도관찰사 유장환(柳章煥)을 급히 파견하였다. 난이 수습되자 주동자로 지목된 민자성·유태로(柳台魯)·유상보(柳相輔)·서정호(徐正浩)·진유완(陳有完)·이형하(李亨夏) 등은 효수되었고, 판관 조병문(趙秉文)과 영장(營將) 이종식(李鍾植)은 난을 사전에 제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주가 서울에서 가까운...
공주민란 (公州民亂)
1862년(철종 13) 충청도 공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 내용 그 해 삼남지방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농민들이 민자성(閔子成) 등의 선동으로 5월 16일 읍내에 모여 삼정(三政)의 폐해를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부호가에 방화할 뿐만 아니라 참판 심순택(沈舜澤)의 5대조 사우에도 방화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난의 수습을 위하여 충청도관찰사 유장환(柳章煥)을 급히 파견하였다. 난이 수습되자 주동자로 지목된 민자성·유태로(柳台魯)·유상보(柳相輔)·서정호(徐正浩)·진유완(陳有完)·이형하(李亨夏) 등은 효수되었고, 판관 조병문(趙秉文)과 영장(營將) 이종식(李鍾植)은 난을 사전에 제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주가 서울에서 가까운...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이동을 엄호하기 위해 무극리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 # 개설 무극리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13일까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사단과 육군본부 직할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제1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극리, 동락리, 가정동 등 음성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의 일환이었다. # 경과 북한군 제15사단은 광주∼진천 방면으로 남하하는 제2사단과 원주∼충주 및 제천 방면으로 진출하는 제12사단 사이에 발생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홍천에서 투입된 부대였다. 이 사단의 임무는 장호원을 점령한 후 음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여주∼장호원 간 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무극리전투 (無極里戰鬪)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이동을 엄호하기 위해 무극리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 # 개설 무극리전투는 1950년 7월 4일부터 13일까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사단과 육군본부 직할 제6사단 제7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제1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무극리, 동락리, 가정동 등 음성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전투의 일환이었다. # 경과 북한군 제15사단은 광주∼진천 방면으로 남하하는 제2사단과 원주∼충주 및 제천 방면으로 진출하는 제12사단 사이에 발생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홍천에서 투입된 부대였다. 이 사단의 임무는 장호원을 점령한 후 음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여주∼장호원 간 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공산군 포로들이 1952년 초부터 일으킨 일련의 수용소폭동 사건. 수용소에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국군 경계병과 포로들과의 알력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포로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정하여 폭동을 유발시킨데 있었다. # 경과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수용소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이들을 상호 격리 수용하는 한편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하여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소위 제62동 수용소는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유엔군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952년 2월 18일 오전 조사팀이 조사준비를 하여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 (巨濟島 捕虜 騷擾事件)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공산군 포로들이 1952년 초부터 일으킨 일련의 수용소폭동 사건. 수용소에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국군 경계병과 포로들과의 알력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포로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정하여 폭동을 유발시킨데 있었다. # 경과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수용소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이들을 상호 격리 수용하는 한편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하여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소위 제62동 수용소는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유엔군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952년 2월 18일 오전 조사팀이 조사준비를 하여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허사겸(許士兼)·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최여집(崔汝集)·채운집(蔡云集) 등이 주동하였다. 19세기초 순조즉위 후 소수의 세도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삼정(三政)의 문란이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국가기강 문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농민들의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 민란의 형태를 띠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가리포에서도 관아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부호들의 재산도 마음대로 빼앗아가자 백성들은 정장소원(呈狀訴寃)할 것을 목적으로 석장(石場)에 모여 성토한 뒤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을 파견하여 소요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가리포민란 (加里浦民亂)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허사겸(許士兼)·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최여집(崔汝集)·채운집(蔡云集) 등이 주동하였다. 19세기초 순조즉위 후 소수의 세도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삼정(三政)의 문란이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국가기강 문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농민들의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 민란의 형태를 띠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가리포에서도 관아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부호들의 재산도 마음대로 빼앗아가자 백성들은 정장소원(呈狀訴寃)할 것을 목적으로 석장(石場)에 모여 성토한 뒤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을 파견하여 소요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1933년 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중국 공산당 계열의 혼춘(琿春)·왕청(汪淸) 유격대 등과 연합, 동만주 동녕현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략한 전투. - 『연변당사사건과 인물』 (金東和 외, 연변인민출판사, 1988) - 『백강회고록』(조경한, 한국종교협의회, 1979) - 『청천장군의 혁명투쟁사』(지헌모, 삼성출판사, 1949) - 『광복』 제2권 제1기(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1942.1.) - 「한국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연구」(장세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 『東北大事記』(李鴻文 外, 吉林文史出版社, 1987) - 『東北抗日烈士傳』 2(東北烈士紀念館 編, 黑龍江人民出版社, 1981) - 「東滿抗日軍事遊擊根據地發展槪述」(申鉉武 外, 『延邊大學學報』 1982年 3期)
동녕현전투 (東寧縣戰鬪)
1933년 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중국 공산당 계열의 혼춘(琿春)·왕청(汪淸) 유격대 등과 연합, 동만주 동녕현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략한 전투. - 『연변당사사건과 인물』 (金東和 외, 연변인민출판사, 1988) - 『백강회고록』(조경한, 한국종교협의회, 1979) - 『청천장군의 혁명투쟁사』(지헌모, 삼성출판사, 1949) - 『광복』 제2권 제1기(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1942.1.) - 「한국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연구」(장세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 『東北大事記』(李鴻文 外, 吉林文史出版社, 1987) - 『東北抗日烈士傳』 2(東北烈士紀念館 編, 黑龍江人民出版社, 1981) - 「東滿抗日軍事遊擊根據地發展槪述」(申鉉武 外, 『延邊大學學報』 1982年 3期)
1629년(인조 7) 김예정이 임경사(任慶思) 등의 역모를 고발한 사건. # 내용 전 훈도(訓導) 임경사는 훈련도감의 초군(哨軍) 손대순(孫大順)·이선신(李善信)·하의생(河義生)·김용림(金龍林)·박춘남(朴春男)·한의립(韓義立) 등과 삽맹(歃盟 : 피를 마셔 맹세함.)하고 서울은 기(氣)가 쇠하였다 하여 도읍을 연산(連山)으로 옮기고 광해군을 추대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임경사는 먼저 내포(內浦)로 가서 군현을 장악, 해운을 차단하고 잇달아 이선신 등은 서울에서 난을 일으켜 훈련대장을 죽이고 종묘와 도성문(都城門)을 불태우기로 하였으나, 함께 모의에 참여한 훈국포수(訓局砲手) 김예정의 밀고로 일당이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김예정은 그 공으로 당상관에 오르고 몰수한 역적들의 가산을 지급받았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김예정의 고변 (金禮正의 告變)
1629년(인조 7) 김예정이 임경사(任慶思) 등의 역모를 고발한 사건. # 내용 전 훈도(訓導) 임경사는 훈련도감의 초군(哨軍) 손대순(孫大順)·이선신(李善信)·하의생(河義生)·김용림(金龍林)·박춘남(朴春男)·한의립(韓義立) 등과 삽맹(歃盟 : 피를 마셔 맹세함.)하고 서울은 기(氣)가 쇠하였다 하여 도읍을 연산(連山)으로 옮기고 광해군을 추대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임경사는 먼저 내포(內浦)로 가서 군현을 장악, 해운을 차단하고 잇달아 이선신 등은 서울에서 난을 일으켜 훈련대장을 죽이고 종묘와 도성문(都城門)을 불태우기로 하였으나, 함께 모의에 참여한 훈국포수(訓局砲手) 김예정의 밀고로 일당이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김예정은 그 공으로 당상관에 오르고 몰수한 역적들의 가산을 지급받았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倭寇)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사건. 대마도 정벌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는데, 대마도는 그들의 근거지였다. 이에 고려, 조선 정부는 1389년(창왕 1),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특히 세 번째 정벌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다. 정벌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일본 측 세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왜구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한 사건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측은 병선 7척을...
대마도 정벌 (對馬島 征伐)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倭寇)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사건. 대마도 정벌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는데, 대마도는 그들의 근거지였다. 이에 고려, 조선 정부는 1389년(창왕 1),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등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특히 세 번째 정벌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졌다. 정벌 이후 대마도는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일본 측 세력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왜구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한 사건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 측은 병선 7척을...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 내용 벽동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벽동에 밀파하였다. 또한, 천도교 측에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있었다. 벽동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 벽동교구에서 3월 10일의 제1세교조 순도(殉道) 기념일을 기하여 수백명이 기념식을 거행한 뒤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거리로 나오자, 주민들과 기독교인이 이에 가세하여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전개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또 30일 200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벽동 3·1운동 (碧潼 三一運動)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 내용 벽동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벽동에 밀파하였다. 또한, 천도교 측에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있었다. 벽동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 벽동교구에서 3월 10일의 제1세교조 순도(殉道) 기념일을 기하여 수백명이 기념식을 거행한 뒤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거리로 나오자, 주민들과 기독교인이 이에 가세하여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전개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또 30일 200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1862년(철종 13) 5월 7일 경상도 거창 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진주민란의 영향을 받아 당시 거창현에서도 전정·군정·환곡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부사 황종석(黃鍾奭)이 진주민란을 안핵(按覈)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시규(李時奎)·최남기(崔南紀)·이승문(李升文) 등이 환곡을 비싼 값에 매각하고 다른 고을의 싼 곡식으로 채워 이득을 보는 이무(移貿)와 관아에서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에게 진 빚인 저채(邸債) 및 환호(還戶) 등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고 농민들을 모아서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포교의 집을 포함하여 민가 40호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부사 황종석은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말미를 얻어 상경했고, 암행어사 이인명...
거창민란 (居昌民亂)
1862년(철종 13) 5월 7일 경상도 거창 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진주민란의 영향을 받아 당시 거창현에서도 전정·군정·환곡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부사 황종석(黃鍾奭)이 진주민란을 안핵(按覈)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시규(李時奎)·최남기(崔南紀)·이승문(李升文) 등이 환곡을 비싼 값에 매각하고 다른 고을의 싼 곡식으로 채워 이득을 보는 이무(移貿)와 관아에서 경저리(京邸吏)나 영저리(營邸吏)에게 진 빚인 저채(邸債) 및 환호(還戶) 등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고 농민들을 모아서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포교의 집을 포함하여 민가 40호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부사 황종석은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말미를 얻어 상경했고, 암행어사 이인명...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사건이 터지자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하였고, 조선 정부는 홍종우를 우대하는 한편 김옥균의 시체를 서울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해 전국에 효시 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일본의 일부 민간인과 언론 기관들은 갑작스레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라는 단체를 조직해 동경의 혼간사(本願寺)에서 김옥균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청나라가 김옥균암살사건을 방조한 사실과 조선 정부가 그의 시체에 가한 잔인한 형벌을 비난하면서, 한·청 양국을 응징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근대한일교섭사연구...
김옥균 암살사건 (金玉均 暗殺事件)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사건이 터지자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하였고, 조선 정부는 홍종우를 우대하는 한편 김옥균의 시체를 서울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해 전국에 효시 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일본의 일부 민간인과 언론 기관들은 갑작스레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라는 단체를 조직해 동경의 혼간사(本願寺)에서 김옥균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청나라가 김옥균암살사건을 방조한 사실과 조선 정부가 그의 시체에 가한 잔인한 형벌을 비난하면서, 한·청 양국을 응징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근대한일교섭사연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7월 5일 음성 동락리 일대의 북한군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준 전투. # 내용 1950년 7월 초 음성 전방에서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엄호부대로서 적 제15사단과 접촉 중이었다. 연대장은 제2대대로부터 동락리 부근의 조우상황을 보고받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7월 5일 양측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게 되었고, 제1대대는 다음날 무극리를 점령하였으나 곧 강력한 화력지원을 동반한 적 연대규모의 반격을 받고 무극리 남동 백야리로 물러났다. 국군 제7연대장은 예비대인 제2대대를 동락리 남쪽 부용산 일대에 투입하여 중앙지역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제1대대에는 사단으로부터 추가로 배속 받은 제19연대 제2대대를 지원하여 백야리에서 양 대대가 연계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한편 북한군...
동락리전투 (同樂里戰鬪)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1950년 7월 5일 음성 동락리 일대의 북한군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준 전투. # 내용 1950년 7월 초 음성 전방에서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엄호부대로서 적 제15사단과 접촉 중이었다. 연대장은 제2대대로부터 동락리 부근의 조우상황을 보고받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7월 5일 양측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게 되었고, 제1대대는 다음날 무극리를 점령하였으나 곧 강력한 화력지원을 동반한 적 연대규모의 반격을 받고 무극리 남동 백야리로 물러났다. 국군 제7연대장은 예비대인 제2대대를 동락리 남쪽 부용산 일대에 투입하여 중앙지역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제1대대에는 사단으로부터 추가로 배속 받은 제19연대 제2대대를 지원하여 백야리에서 양 대대가 연계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한편 북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