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검색결과 총 1,179건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 개경 승도의 난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이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從軍)하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 저항의 이면에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 불교계를 이끌었던 교종(敎宗) 교단이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그들을 후원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하고, 선종(禪宗) 교단으로의 교체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그러나 그해 12월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의 계책^8]에 의해 승려 종참(宗旵) 등이 선의문(宣義門)에서 이의방을 죽였는데, 이는 무신정권 초기의 사원 세력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개경 승도의 난 (開京 僧徒의 亂)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 개경 승도의 난은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개경에서 일으킨 저항이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 승려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從軍)하던 승려들이 저항을 일으켰다. 이들 저항의 이면에는 무신정변 이전까지 고려 불교계를 이끌었던 교종(敎宗) 교단이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그들을 후원했던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권력이 약화하고, 선종(禪宗) 교단으로의 교체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그러나 그해 12월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의 계책^8]에 의해 승려 종참(宗旵) 등이 선의문(宣義門)에서 이의방을 죽였는데, 이는 무신정권 초기의 사원 세력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 ·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 ·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1258년(고종 45) 3월 강도(江都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도)에서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최씨정권(崔氏政權)을 무너뜨린 사건. 무오정변은 1258년(고종 45) 3월 강화도에서 김준 등이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최충헌·최우·최항으로 이어진 최씨정권은 최우 말년부터 내부분열이 이어졌고 최항 때는 오랜 몽고와의 전쟁으로 세력기반이 약해졌다. 최항에 이어 집권한 최의가 김준 등을 배격하자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붕괴시켰다. 김준 등의 무신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무신정권을 이어갔다. 하지만 소수의 공신을 기반으로 한 김준의 정권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오정변은 무신정권의 붕괴가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최씨정권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무오정변 (戊午政變)
1258년(고종 45) 3월 강도(江都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도)에서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최씨정권(崔氏政權)을 무너뜨린 사건. 무오정변은 1258년(고종 45) 3월 강화도에서 김준 등이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최충헌·최우·최항으로 이어진 최씨정권은 최우 말년부터 내부분열이 이어졌고 최항 때는 오랜 몽고와의 전쟁으로 세력기반이 약해졌다. 최항에 이어 집권한 최의가 김준 등을 배격하자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최씨정권을 붕괴시켰다. 김준 등의 무신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무신정권을 이어갔다. 하지만 소수의 공신을 기반으로 한 김준의 정권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이처럼 무오정변은 무신정권의 붕괴가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최씨정권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 일당을...
고려시대 경상도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서 천민이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 # 내용 1170년(의종 24)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질서의 해이와 하극상의 풍조로 사회적 동요가 심했으며, 아울러 지방관의 탐학과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노예 등 하층민에 의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광명·계발의 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 난이 일어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여 1200년(신종 3)진주에서 주리(州吏) 정방의(鄭方義)와 정창대(鄭昌大)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평소에 원수진 사람들을 많이 죽이며 횡포를 부리자, 진주사람 20여 명이 정방의를 치고자 광명·계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광명·계발은 이에 응하여 진주에 이르렀다가 오히려 정방의에게 크게...
광명·계발의 난 (光明·計勃의 亂)
고려시대 경상도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서 천민이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 # 내용 1170년(의종 24)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신분질서의 해이와 하극상의 풍조로 사회적 동요가 심했으며, 아울러 지방관의 탐학과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노예 등 하층민에 의한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광명·계발의 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 난이 일어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여 1200년(신종 3)진주에서 주리(州吏) 정방의(鄭方義)와 정창대(鄭昌大)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평소에 원수진 사람들을 많이 죽이며 횡포를 부리자, 진주사람 20여 명이 정방의를 치고자 광명·계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광명·계발은 이에 응하여 진주에 이르렀다가 오히려 정방의에게 크게...
1882년(고종 19) 6월 무위영(武衛營) 소속 구식 군병들이 일으킨 군란. 이에 남아 있는 군졸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도봉소사건은 거대한 군란으로 확대되어갔다. 즉, 같은 달 9일 무위영 군졸들은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민겸호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기서 군졸들과 도봉소에서 구타당했던 민겸호의 하인과의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하인이 집 안으로 피신하자, 군졸들과 여기에 합세한 민중이 뒤쫓아 들어가 민겸호의 집과 기물을 파괴하면서부터 임오군란으로 전개되어 갔다. 도봉소사건은 정부의 개화정책 일환으로 군제개편이 단행되면서 구조적으로 소외된 구 오군영 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집약되어 일어난 것으로, 임오군란의 발단을 이루게 되었다. - 『한국사』최근세편(이선근, 진단학회, 1961)...
도봉소 사건 (都捧所 事件)
1882년(고종 19) 6월 무위영(武衛營) 소속 구식 군병들이 일으킨 군란. 이에 남아 있는 군졸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도봉소사건은 거대한 군란으로 확대되어갔다. 즉, 같은 달 9일 무위영 군졸들은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민겸호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기서 군졸들과 도봉소에서 구타당했던 민겸호의 하인과의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하인이 집 안으로 피신하자, 군졸들과 여기에 합세한 민중이 뒤쫓아 들어가 민겸호의 집과 기물을 파괴하면서부터 임오군란으로 전개되어 갔다. 도봉소사건은 정부의 개화정책 일환으로 군제개편이 단행되면서 구조적으로 소외된 구 오군영 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집약되어 일어난 것으로, 임오군란의 발단을 이루게 되었다. - 『한국사』최근세편(이선근, 진단학회, 1961)...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가덕도근해에서 싸운 해전. # 내용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원익(李元翼)과 권율(權慄)이 원균에게 “후방을 경계하는 동시에 수군을 출전시켜 바다로 침범하는 일본 수군의 길을 막으라.”고 하였는데, 원균은 먼저 육상병력으로 안골포(安骨浦)를 공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직접 한산도로 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을 재촉하자, 원균은 남이공과 함께 6월 18일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다음날 안골포로 쳐들어갔다. 이 때 일본 수군들은 해변에 숨어서 대포를 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치고 가덕도방면으로 나아갔는데, 마침 안골포의...
가덕도해전 (加德島海戰)
1597년(선조 30) 6월 19일 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가덕도근해에서 싸운 해전. # 내용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원익(李元翼)과 권율(權慄)이 원균에게 “후방을 경계하는 동시에 수군을 출전시켜 바다로 침범하는 일본 수군의 길을 막으라.”고 하였는데, 원균은 먼저 육상병력으로 안골포(安骨浦)를 공격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전투에 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직접 한산도로 가서 전투에 참여할 것을 재촉하자, 원균은 남이공과 함께 6월 18일 1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다음날 안골포로 쳐들어갔다. 이 때 일본 수군들은 해변에 숨어서 대포를 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치고 가덕도방면으로 나아갔는데, 마침 안골포의...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寬奠堡) 등의 한인들이 후금의 점령에...
가도사건 (椵島事件)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여파를 미쳤다. 남사위와 진강아문, 관전보(寬奠堡) 등의 한인들이 후금의 점령에...
후삼국시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서 경순왕(敬順王) 4년(930년)에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고창전투는 후삼국시대 고창군에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창군은 현재 안동 지역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였다. 이미 공산전투에서 고려에 대승을 거둔 후백제 견훤은 고창군까지 도달하여 고려 왕건과 싸웠으나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왕건의 승리는 고창군 재지호족의 적극적 협조로 가능하였다.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근 고을과 동해안 일대 성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개설 고려는 고창전투...
고창전투 (古昌戰鬪)
후삼국시대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서 경순왕(敬順王) 4년(930년)에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고창전투는 후삼국시대 고창군에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창군은 현재 안동 지역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였다. 이미 공산전투에서 고려에 대승을 거둔 후백제 견훤은 고창군까지 도달하여 고려 왕건과 싸웠으나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왕건의 승리는 고창군 재지호족의 적극적 협조로 가능하였다.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근 고을과 동해안 일대 성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개설 고려는 고창전투...
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사변하의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음모’, ‘특별희사금도 모집’, ‘불온문 특별기도문 일반신도에게 배부’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번질 경우 해외에서 천도교의 기도운동을 지원하거나 국내에서 거국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음을 감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건의 확대가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일반 교역자는 모두 석방하고 최준모, 김재계(金在桂), 한순회(韓順會), 김경함(金庚咸), 홍순의 등 5인만...
무인독립운동 (戊寅獨立運動)
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사변하의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음모’, ‘특별희사금도 모집’, ‘불온문 특별기도문 일반신도에게 배부’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번질 경우 해외에서 천도교의 기도운동을 지원하거나 국내에서 거국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음을 감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건의 확대가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일반 교역자는 모두 석방하고 최준모, 김재계(金在桂), 한순회(韓順會), 김경함(金庚咸), 홍순의 등 5인만...
1862년(철종 13) 4월 경상도 개령 에서 현감 김후근(金厚根)의 탐욕과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 봉기. # 내용 김후근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3년 동안 전세(田稅)를 정액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현민들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반민(班民)인 김규진(金奎鎭)이 읍폐(邑弊)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통문을 몰래 돌렸다. 그 내용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습격, 파괴하고, 마을도 파괴할 것이며, 또한 이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호로부터 징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통문을 몰래 돌리다 발각되어 구금되자, 4월 7일 외촌에 사는 수천 명이 관내의 이천장(梨川場)에 모여 소요를 일으킨 뒤 읍내로 향하였다. 이들은 먼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비롯한 여러 죄수들을 풀어주는 한편, 관아로...
개령민란 (開寧民亂)
1862년(철종 13) 4월 경상도 개령 에서 현감 김후근(金厚根)의 탐욕과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 봉기. # 내용 김후근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3년 동안 전세(田稅)를 정액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현민들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반민(班民)인 김규진(金奎鎭)이 읍폐(邑弊)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통문을 몰래 돌렸다. 그 내용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습격, 파괴하고, 마을도 파괴할 것이며, 또한 이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호로부터 징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통문을 몰래 돌리다 발각되어 구금되자, 4월 7일 외촌에 사는 수천 명이 관내의 이천장(梨川場)에 모여 소요를 일으킨 뒤 읍내로 향하였다. 이들은 먼저 옥문을 부수고 김규진을 비롯한 여러 죄수들을 풀어주는 한편, 관아로...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 내용 1592년(선조 25) 4월 19일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끈 제3군의 주력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상으로 죽도(竹島)에 상륙하였다. 죽도는 낙동강 하류에서 김해강 지류가 합치는 곳으로 능히 전선이 정박할 수 있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이곳에 초선(哨船)을 이미 띄워놓고 적정을 탐색중이었다. 적은 먼저 이 배를 탈취하고 감시병을 쫓아 김해성에 도달하고는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부사는 비상태세를 갖추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다. 적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계속하면서 공격을 가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성안에는 군사가 적고 외부로부터 지원이 없어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이 때 적은 성벽이 높고 못[濠池]이 깊어서...
김해성전투 (金海城戰鬪)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 내용 1592년(선조 25) 4월 19일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끈 제3군의 주력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상으로 죽도(竹島)에 상륙하였다. 죽도는 낙동강 하류에서 김해강 지류가 합치는 곳으로 능히 전선이 정박할 수 있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이곳에 초선(哨船)을 이미 띄워놓고 적정을 탐색중이었다. 적은 먼저 이 배를 탈취하고 감시병을 쫓아 김해성에 도달하고는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부사는 비상태세를 갖추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다. 적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계속하면서 공격을 가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성안에는 군사가 적고 외부로부터 지원이 없어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이 때 적은 성벽이 높고 못[濠池]이 깊어서...
1715년(숙종 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 # 역사적 배경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80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고 책의 간행을 위해 관찰사에게 물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왕의 허락를 받았다. 그리하여 1715년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가례원류시말 (家禮源流始末)
1715년(숙종 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되자 그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 사이의 정쟁. # 역사적 배경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80년이 지나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고 책의 간행을 위해 관찰사에게 물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왕의 허락를 받았다. 그리하여 1715년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집단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항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자와의 분화 과정에서...
무정부주의운동 (無政府主義運動)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집단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항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자와의 분화 과정에서...
1931년 10월부터 1932년 2월까지 경상남도 김해에 있던 일본인 지주 하자마(迫間房太郎)의 농장에서 한국인 소작농민들이 전개한 소작농민항쟁. # 내용 하자마농장은 일제의 앞잡이로 러일전쟁 당시 군용지 매입을 중개, 자본을 축적한 대판(大阪) 상인 하자마가 1928년 김해에 설립한 소작제 농장이었다. 총면적 2,800정보로서, 2천 호의 소작농가가 소속되어 있었다. 하자마농장 농업경영의 특징은, 소작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 중간관리인인 간사(幹事)들에게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인 소작료 1석당 13∼15전(錢)의 보수를 지급한 것이다. 때문에 간사들은 보다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소작료를 늘려 소작인들의 원성을 샀다. 마침내 1931년의 흉작을 계기로 소작인들은 10월 16일 농장측에 소작료감액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김해 하자마농장 소작쟁의 (金海 迫間農場 小作爭議)
1931년 10월부터 1932년 2월까지 경상남도 김해에 있던 일본인 지주 하자마(迫間房太郎)의 농장에서 한국인 소작농민들이 전개한 소작농민항쟁. # 내용 하자마농장은 일제의 앞잡이로 러일전쟁 당시 군용지 매입을 중개, 자본을 축적한 대판(大阪) 상인 하자마가 1928년 김해에 설립한 소작제 농장이었다. 총면적 2,800정보로서, 2천 호의 소작농가가 소속되어 있었다. 하자마농장 농업경영의 특징은, 소작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 중간관리인인 간사(幹事)들에게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인 소작료 1석당 13∼15전(錢)의 보수를 지급한 것이다. 때문에 간사들은 보다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소작료를 늘려 소작인들의 원성을 샀다. 마침내 1931년의 흉작을 계기로 소작인들은 10월 16일 농장측에 소작료감액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1942년 12월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해외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는 이유로 방송기술자 및 방송인들이 체포, 구속된 사건.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한국인 기술자들은 조기방송이나 불시의 방송에 대비하여 일본인과 조를 이루어 혼성 숙직을 하였는데, 이때 밤중에 몰래 일어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듣곤 하였다. 이 방송에서는 이승만의 ‘2천만 동포에 고한다’라는 우리말 방송이 30분간 방송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에는 조정실에 근무하는 기술자들만이 알고 있었으나, 차츰 직원들간에 알려지게 되어 거의 모든 한국인 방송관계자들이 이 방송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정동방송국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 13명...
개성송신소 단파수신사건 (開城送信所 短波受信事件)
1942년 12월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던 해외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는 이유로 방송기술자 및 방송인들이 체포, 구속된 사건.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한국인 기술자들은 조기방송이나 불시의 방송에 대비하여 일본인과 조를 이루어 혼성 숙직을 하였는데, 이때 밤중에 몰래 일어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자유의 소리’ 방송을 듣곤 하였다. 이 방송에서는 이승만의 ‘2천만 동포에 고한다’라는 우리말 방송이 30분간 방송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처음에는 조정실에 근무하는 기술자들만이 알고 있었으나, 차츰 직원들간에 알려지게 되어 거의 모든 한국인 방송관계자들이 이 방송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개성송신소단파수신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정동방송국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 13명...
1951년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 # 내용 전투기간은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이다. 이 전투지구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역이며, 특히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한국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북한 공산군은 이러한...
도솔산지구 전투 (兜率山地區 戰鬪)
1951년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 # 내용 전투기간은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이다. 이 전투지구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역이며, 특히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한국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북한 공산군은 이러한...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허사겸(許士兼)·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최여집(崔汝集)·채운집(蔡云集) 등이 주동하였다. 19세기초 순조즉위 후 소수의 세도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삼정(三政)의 문란이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국가기강 문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농민들의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 민란의 형태를 띠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가리포에서도 관아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부호들의 재산도 마음대로 빼앗아가자 백성들은 정장소원(呈狀訴寃)할 것을 목적으로 석장(石場)에 모여 성토한 뒤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을 파견하여 소요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가리포민란 (加里浦民亂)
1884년(고종 21) 초 전라도 가리포에서 일어난 민란. # 내용 허사겸(許士兼)·문사순(文士巡)·최도일(崔道一)·최여집(崔汝集)·채운집(蔡云集) 등이 주동하였다. 19세기초 순조즉위 후 소수의 세도가문에 국가권력이 집중되고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삼정(三政)의 문란이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국가기강 문란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농민들의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이 민란의 형태를 띠면서 전국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때 가리포에서도 관아의 관리들이 백성들을 멋대로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다. 부호들의 재산도 마음대로 빼앗아가자 백성들은 정장소원(呈狀訴寃)할 것을 목적으로 석장(石場)에 모여 성토한 뒤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을 파견하여 소요의 원인과 경과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의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에게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진압되었다. 배경에는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으로 선덕왕 사후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후 무열왕계 귀족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시도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김헌창이 백제의 중심지라 할 웅천주의...
김헌창의 난 (金憲昌의 亂)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의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에게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오래지 않아 진압되었다. 배경에는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으로 선덕왕 사후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후 무열왕계 귀족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시도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김헌창이 백제의 중심지라 할 웅천주의...
1926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농민조합 형태의 농민운동. # 개설 1920년대 초 소작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소작인조합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체 농민을 포괄하는 농민조합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는 농민운동의 성격이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이라는 경제투쟁으로부터 전체 농민의 권익 실현을 위한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즉, 자작빈농이나 자작중농도 결국 소작농으로 영락(零落)하는 현실 속에서, 소작농과 자작농이 전체 농민을 억압, 착취하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연대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 연원 및 변천 소작인조합의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은 1926년 1월전라남도의 무안농민연합회가 무안농민조합으로 개편되고, 이어 암태소작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
농민조합운동 (農民組合運動)
1926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농민조합 형태의 농민운동. # 개설 1920년대 초 소작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소작인조합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체 농민을 포괄하는 농민조합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는 농민운동의 성격이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이라는 경제투쟁으로부터 전체 농민의 권익 실현을 위한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즉, 자작빈농이나 자작중농도 결국 소작농으로 영락(零落)하는 현실 속에서, 소작농과 자작농이 전체 농민을 억압, 착취하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연대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 연원 및 변천 소작인조합의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은 1926년 1월전라남도의 무안농민연합회가 무안농민조합으로 개편되고, 이어 암태소작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