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헌주"
검색결과 총 31건
강석호는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에 국왕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던 내시이다. 1875년 벼슬길에 오른 이후 갑오개혁 이후에 민영환과 함께 친미파로 활동하는 등 복잡다단하였던 이 시기 정치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고 내시부가 해체되면서 그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강석호 (姜錫鎬)
강석호는 조선 후기~대한제국기에 국왕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던 내시이다. 1875년 벼슬길에 오른 이후 갑오개혁 이후에 민영환과 함께 친미파로 활동하는 등 복잡다단하였던 이 시기 정치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고 내시부가 해체되면서 그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고영석은 김옥균의 상노로 갑신정변 당시 통신 및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던 개화당원이다. 1884년에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당시에 유혁로와 함께 통신 연락과 정찰 임무를 맡았고, 경우궁을 포위하는 등의 활동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영석 (高永錫)
고영석은 김옥균의 상노로 갑신정변 당시 통신 및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던 개화당원이다. 1884년에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당시에 유혁로와 함께 통신 연락과 정찰 임무를 맡았고, 경우궁을 포위하는 등의 활동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초는 조선 후기 중앙 관서에서 동등 이하의 각 관서[주로 지방 관서]로 보내던 문서인 관문을 모은 책이다. 관문은 오늘날의 공문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관초에는 의정부(議政府) 편, 내무아문(內務衙門) 편, 탁지부 사세국 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편 및 지역 단위와 각 개항장 등에서 생산된 관초 등이 있다.
관초 (關抄)
관초는 조선 후기 중앙 관서에서 동등 이하의 각 관서[주로 지방 관서]로 보내던 문서인 관문을 모은 책이다. 관문은 오늘날의 공문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관초에는 의정부(議政府) 편, 내무아문(內務衙門) 편, 탁지부 사세국 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편 및 지역 단위와 각 개항장 등에서 생산된 관초 등이 있다.
김개남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金開南)
김개남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낙철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 활동에 참여한 천도교인이다. 1858년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890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3년 복합상소운동에 참여하였고 1차 동학운동 때 전봉준의 농민군과는 별개로 활동하였다. 제2차 동학운동 과정에서는 전봉준과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1894년 1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최시형을 도와 동학교단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고 천도교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김낙철 (金洛喆)
김낙철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 활동에 참여한 천도교인이다. 1858년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890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3년 복합상소운동에 참여하였고 1차 동학운동 때 전봉준의 농민군과는 별개로 활동하였다. 제2차 동학운동 과정에서는 전봉준과 연합하여 활동하다가 1894년 1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최시형을 도와 동학교단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고 천도교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김덕명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대접주이다. 1886년 동학에 입도하여 비슷한 시기에 입도한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과 함께 원평집회와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본군에 대항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김덕명 (金德明)
김덕명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대접주이다. 1886년 동학에 입도하여 비슷한 시기에 입도한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과 함께 원평집회와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본군에 대항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김덕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한 의병장이다.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을 위시로 한 홍주의진에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1906년 5월에 일본군의 공격에 의진이 흩어지고 다시 재궐기하는 과정에 참여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투옥하여 복역하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김덕진 (金德鎭)
김덕진은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한 의병장이다.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을 위시로 한 홍주의진에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1906년 5월에 일본군의 공격에 의진이 흩어지고 다시 재궐기하는 과정에 참여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투옥하여 복역하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김도규는 보성 출신으로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보성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8년 안규홍 의진에 합류하여 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보성의 박곡 전투, 병치 전투, 진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안규홍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다.
김도규 (金道珪)
김도규는 보성 출신으로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보성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8년 안규홍 의진에 합류하여 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보성의 박곡 전투, 병치 전투, 진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안규홍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다.
김도숙은 대한제국기 심남일 의진에서 도통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심남일 지휘 아래 1908년 3월의 강진 오치동 전투, 1908년 10월의 능주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8월 석정 전투 패배 후 능주로 피신하였다.
김도숙 (金道淑)
김도숙은 대한제국기 심남일 의진에서 도통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심남일 지휘 아래 1908년 3월의 강진 오치동 전투, 1908년 10월의 능주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8월 석정 전투 패배 후 능주로 피신하였다.
김도현은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직후에 안동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다른 의병 부대가 해산된 뒤인 1896년 10월까지 항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상소 투쟁을 하였고, 1907년 2월에 의병 활동을 조직하다가 수감되었다. 1914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김도현 (金道鉉)
김도현은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직후에 안동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다른 의병 부대가 해산된 뒤인 1896년 10월까지 항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저항하여 상소 투쟁을 하였고, 1907년 2월에 의병 활동을 조직하다가 수감되었다. 1914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김동신은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6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전국적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순창, 남원, 용담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동신 (金東臣)
김동신은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6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전국적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기우만, 고광순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순창, 남원, 용담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옥균 (金玉均)
김옥균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이다. 1870년대 개화사상을 수용하였고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894년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갑오개혁 시기에 사면 복권되었고, 1910년에 충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한은행은 1898년 국립중앙은행을 목표로 한성에 설립되었던 은행이다. 1898년 심상훈 등 20명의 발기인들이 황실과 합자하여 설립을 주도하고, 국립은행으로 설립하려 하였으나 설립 뒤 오래 지나지 않아 폐점되고 말았다.
대한은행 (大韓銀行)
대한은행은 1898년 국립중앙은행을 목표로 한성에 설립되었던 은행이다. 1898년 심상훈 등 20명의 발기인들이 황실과 합자하여 설립을 주도하고, 국립은행으로 설립하려 하였으나 설립 뒤 오래 지나지 않아 폐점되고 말았다.
대한철도회사는 1899년 한성에 설립되었던 철도회사이다. 1899년 3월 철도 부설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박기종(朴琪淙)이 학부(學部) 편집국장 이규환(李圭桓),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병숙(徐丙肅) 등 10여 명과 함께 설립하였다. 1902년 박기종이 영남지선철도회사(嶺南支線鐵道會社)를 설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三馬鐵道) 부설권을 확보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자금 및 기술력의 부족으로 일본의 경부철도회사(京釜鐵道會社)에 부설권을 매도하면서 철도 부설 계획은 좌절되었다.
대한철도회사 (大韓鐵道會社)
대한철도회사는 1899년 한성에 설립되었던 철도회사이다. 1899년 3월 철도 부설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박기종(朴琪淙)이 학부(學部) 편집국장 이규환(李圭桓),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병숙(徐丙肅) 등 10여 명과 함께 설립하였다. 1902년 박기종이 영남지선철도회사(嶺南支線鐵道會社)를 설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三馬鐵道) 부설권을 확보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자금 및 기술력의 부족으로 일본의 경부철도회사(京釜鐵道會社)에 부설권을 매도하면서 철도 부설 계획은 좌절되었다.
민용호는 1890년대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 활동을 한 의병장이다. 원래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릉으로 들어가서 관동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규합하고 고성, 양양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강릉을 떠나 회양과 금성 방문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후 북쪽으로 행군하여 만주로 들어가면서 의병 활동을 종료하였다.
민용호 (閔龍鎬)
민용호는 1890년대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 활동을 한 의병장이다. 원래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릉으로 들어가서 관동 지방의 의병 세력을 규합하고 고성, 양양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강릉을 떠나 회양과 금성 방문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후 북쪽으로 행군하여 만주로 들어가면서 의병 활동을 종료하였다.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 충청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이 임박하자 단식하여 23일 만에 사망하였다.
박세화 (朴世和)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 충청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이 임박하자 단식하여 23일 만에 사망하였다.
백청단은 1930년대 초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학생 독립운동 단체이다. 1개월에 한 번씩 모여 인문 · 사회 과학에 관한 서적을 선정하고, 각자가 다 읽고 나서 그 결과를 토론하는 형식의 모임을 지속하였다. 1933년 1월에 9명의 학생이 검거되면서 활동이 중단된다.
백청단 (白靑團)
백청단은 1930년대 초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학생 독립운동 단체이다. 1개월에 한 번씩 모여 인문 · 사회 과학에 관한 서적을 선정하고, 각자가 다 읽고 나서 그 결과를 토론하는 형식의 모임을 지속하였다. 1933년 1월에 9명의 학생이 검거되면서 활동이 중단된다.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변영만 (卞榮晩)
변영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15광복 이후 광주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학자이다.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국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東明)』지에 많은 기고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양대 일간지에 시론, 시조와 시들을 발표하였다. 1954년 65세로 사망하였다.
서상렬은 을미사변 이후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이후 이필희 의진의 참고가 되었고, 이후 안승우 의진과 회합하여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관찰사 이남규·이중하가 이끄는 정부군과 전투하다가 낭천(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서 1896년 9월에 사망하였다.
서상렬 (徐相烈)
서상렬은 을미사변 이후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이후 이필희 의진의 참고가 되었고, 이후 안승우 의진과 회합하여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관찰사 이남규·이중하가 이끄는 정부군과 전투하다가 낭천(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서 1896년 9월에 사망하였다.
순종은 대한제국기 제2대(재위: 1907∼1910) 황제이다.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가 1926년에 사망하였다.
순종 (純宗)
순종은 대한제국기 제2대(재위: 1907∼1910) 황제이다.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가 1926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