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윤덕영"
검색결과 총 18건
사상휘보는 일제강점기 『고검사상월보』와 『사상월보』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조선 민족운동과 사상 문제에 대한 정보 공유를 위해 발간했던 비공개 잡지이다. 『사상월보』가 매월 간행된데 비해, 『사상휘보』는 1940년 12월, 제25호까지는 매 분기별로 1권씩, 매년 총 4호씩 간행되었다. 1941년부터 간행이 중단되었다가, 2년 10개월 만인 1943년 10월, 속간호가 발간되었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사상휘보는 일제강점기 『고검사상월보』와 『사상월보』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조선 민족운동과 사상 문제에 대한 정보 공유를 위해 발간했던 비공개 잡지이다. 『사상월보』가 매월 간행된데 비해, 『사상휘보』는 1940년 12월, 제25호까지는 매 분기별로 1권씩, 매년 총 4호씩 간행되었다. 1941년부터 간행이 중단되었다가, 2년 10개월 만인 1943년 10월, 속간호가 발간되었다.
『대중』은 1933년 김약수 주도로 대중과학연구사에서 발행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종합잡지이다. 김약수가 발행인 및 편집인을 맡았다. 창간호는 3월 발행되었지만, 일제의 압수로 인해 창간임시호가 4월 1일자로 발행되었다. 월간으로 발행되었으나, 1933년 6월까지 통권 3권까지만 발행되었다.
대중 (大衆)
『대중』은 1933년 김약수 주도로 대중과학연구사에서 발행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종합잡지이다. 김약수가 발행인 및 편집인을 맡았다. 창간호는 3월 발행되었지만, 일제의 압수로 인해 창간임시호가 4월 1일자로 발행되었다. 월간으로 발행되었으나, 1933년 6월까지 통권 3권까지만 발행되었다.
『공제』는 1920년 9월 10일 창간된 초기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이다. 제1호와 2호는 간행되었으나, 제3호[1920년 11월]부터 제6호[1921년 3월]는 조선총독부의 간행 불허로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그 목차를 제7호[1921년 4월]에 게재하려 하였으나 그마저 삭제 당해 그 목차마저 알 수 없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조성돈, 인쇄인은 최성우, 발행소는 조선노동공제회였다. 1921년 6월 10일[통권 8호]로 종간하였다.
공제 (共濟)
『공제』는 1920년 9월 10일 창간된 초기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이다. 제1호와 2호는 간행되었으나, 제3호[1920년 11월]부터 제6호[1921년 3월]는 조선총독부의 간행 불허로 발행이 금지되었으며 그 목차를 제7호[1921년 4월]에 게재하려 하였으나 그마저 삭제 당해 그 목차마저 알 수 없다. 창간호의 편집 겸 발행인은 조성돈, 인쇄인은 최성우, 발행소는 조선노동공제회였다. 1921년 6월 10일[통권 8호]로 종간하였다.
『대중공론』은 1930년 2월, 시천교에서 활동하던 신림의 주도로 『조선강단』의 이름을 바꾸어 창간한 월간 잡지이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신림이고, 인쇄인은 이기종이다. 1930년 5월에 간행 예정이었던 통권6호[제2권 4호]는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어 간행되지 못하였다. 1930년 9월 통권 제8호[제2권 7호]까지 간행하고 중단되었다. 1931년 3월 속간 3호가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 속간호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속간호는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대중공론 (大衆公論)
『대중공론』은 1930년 2월, 시천교에서 활동하던 신림의 주도로 『조선강단』의 이름을 바꾸어 창간한 월간 잡지이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신림이고, 인쇄인은 이기종이다. 1930년 5월에 간행 예정이었던 통권6호[제2권 4호]는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어 간행되지 못하였다. 1930년 9월 통권 제8호[제2권 7호]까지 간행하고 중단되었다. 1931년 3월 속간 3호가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 속간호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속간호는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동방평론』은 1932년 4월 백관수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간행한 민족주의 계열의 종합잡지이다. 인쇄인은 한경집이고, 월간으로 3개월 동안 간행되다가 7월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국제 정세와 조선의 정세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글들이 실렸다.
동방평론 (東方評論)
『동방평론』은 1932년 4월 백관수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간행한 민족주의 계열의 종합잡지이다. 인쇄인은 한경집이고, 월간으로 3개월 동안 간행되다가 7월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국제 정세와 조선의 정세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글들이 실렸다.
『사상운동』은 1925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된 사회주의 사상운동 단체 일월회의 기관지이다. 1925년 3월 3일에 재 도쿄 사상단체 일월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는데, 과학적 이론의 소개를 목표로 하였다. 이여성이 편집 및 발행인이다. 출간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일본 본토에서도 발행금지 4회, 벌금 2회, 휴간 2회를 당했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창간호부터 모든 호가 압수되었다.
사상운동 (思想運動)
『사상운동』은 1925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된 사회주의 사상운동 단체 일월회의 기관지이다. 1925년 3월 3일에 재 도쿄 사상단체 일월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는데, 과학적 이론의 소개를 목표로 하였다. 이여성이 편집 및 발행인이다. 출간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일본 본토에서도 발행금지 4회, 벌금 2회, 휴간 2회를 당했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창간호부터 모든 호가 압수되었다.
『우라키』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가 1925년부터 1936년까지 연간으로 발간한 기관지이다. 1925년, 1926년, 1928년, 1930년, 1931년, 1933년, 1936년에 이르기까지 통권 7호를 발간했다. 편집부장[혹은 총편집, 주필]은 제4호까지 오천석이었고, 5호는 전영택, 6호는 정일형, 7호는 김태선으로 이어졌다.
우라키
『우라키』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가 1925년부터 1936년까지 연간으로 발간한 기관지이다. 1925년, 1926년, 1928년, 1930년, 1931년, 1933년, 1936년에 이르기까지 통권 7호를 발간했다. 편집부장[혹은 총편집, 주필]은 제4호까지 오천석이었고, 5호는 전영택, 6호는 정일형, 7호는 김태선으로 이어졌다.
『철필』은 1930년 7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현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된 신문 관련 잡지이다. 1930년 9월, 3호까지는 매월 간행되었지만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고, 1931년 1월 제4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임인식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철필 (鐵筆)
『철필』은 1930년 7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현직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된 신문 관련 잡지이다. 1930년 9월, 3호까지는 매월 간행되었지만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고, 1931년 1월 제4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임인식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김영순일기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농민 김영순이 1914년~1988년까지 74년간 작성한 생활 일기이다. 여러 종류의 일기장을 이용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예수교서회 간행 일기장, 박문관 간행 일기장, 적선관 간행 일기장 등을 이용했으며 직접 일기장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일기장이나 공책을 활용하여 작성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첩에 일기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순일기 (金永淳日記)
김영순일기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농민 김영순이 1914년~1988년까지 74년간 작성한 생활 일기이다. 여러 종류의 일기장을 이용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예수교서회 간행 일기장, 박문관 간행 일기장, 적선관 간행 일기장 등을 이용했으며 직접 일기장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일기장이나 공책을 활용하여 작성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첩에 일기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검찰요보』는 194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경제사건과 사상사건, 보통형사사건 등 조선의 치안 상황을 조사 보고한 내용을 담아 간행한 내부 잡지이다. 1945년 5월 제15호까지 매월 간행되었다. 『조선검찰요보』의 구성은 「자료」, 「조사」, 「특수사건」, 「통계」, 「통첩류」, 「재판례」, 「회동점묘」, 「잡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검찰요보 (朝鮮檢察要報)
『조선검찰요보』는 194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경제사건과 사상사건, 보통형사사건 등 조선의 치안 상황을 조사 보고한 내용을 담아 간행한 내부 잡지이다. 1945년 5월 제15호까지 매월 간행되었다. 『조선검찰요보』의 구성은 「자료」, 「조사」, 「특수사건」, 「통계」, 「통첩류」, 「재판례」, 「회동점묘」, 「잡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차사백은 일제강점기 중앙보육학교 교원을 역임한 친일 여성 교육가이다. 오사카 램버드여학원 보육전수부에서 유학한 후 중앙유치원 교사를 거쳐 중앙보육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유치원 교사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교육법에 있어서는 특히 율동유희를 강조하였다.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근우회 간부도 지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을 전후로 애국금차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등에서 활동하며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차사백 (車士伯)
차사백은 일제강점기 중앙보육학교 교원을 역임한 친일 여성 교육가이다. 오사카 램버드여학원 보육전수부에서 유학한 후 중앙유치원 교사를 거쳐 중앙보육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유치원 교사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교육법에 있어서는 특히 율동유희를 강조하였다.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근우회 간부도 지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을 전후로 애국금차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등에서 활동하며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우영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를 변론하다가 관료로 변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6년 동래부에서 태어났으며, 나혜석과 결혼하였다. 1919년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개업 후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으나, 1921년 일본 외무성 관리로 변신하여 안둥현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를 역임하였다. 1937년 이후 일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수차례 훈장을 받았다.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김우영 (金雨英)
김우영은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를 변론하다가 관료로 변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86년 동래부에서 태어났으며, 나혜석과 결혼하였다. 1919년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개업 후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으나, 1921년 일본 외무성 관리로 변신하여 안둥현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를 역임하였다. 1937년 이후 일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여 수차례 훈장을 받았다.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최영숙은 일제강점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한국 여성 최초로 스웨덴에서 유학한 신여성이다. 1905년 12월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갔다. 1924년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입단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시그투나 인민학교를 거쳐 1928년부터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32년 4월 사망하였다.
최영숙 (崔英淑)
최영숙은 일제강점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한국 여성 최초로 스웨덴에서 유학한 신여성이다. 1905년 12월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갔다. 1924년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입단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시그투나 인민학교를 거쳐 1928년부터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32년 4월 사망하였다.
한소제는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여성 의사이다. 1899년 11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1923년 12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와 전주 등에서 개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걸스카우트 결성을 앞장서 추진하여, 1946년 5월 조선소녀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196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997년 3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한소제 (韓少濟)
한소제는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여성 의사이다. 1899년 11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1923년 12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의주와 전주 등에서 개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걸스카우트 결성을 앞장서 추진하여, 1946년 5월 조선소녀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간사장을 맡았다. 196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997년 3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박호진은 일제강점기 천도교여성동맹 중앙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다. 1906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주의자이자 천도교인인 이황과 결혼하였다. 중국 광동국립대학 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천도교여성동맹, 근우회, 조선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1932년 3월 25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박호진 (朴昊辰)
박호진은 일제강점기 천도교여성동맹 중앙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다. 1906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주의자이자 천도교인인 이황과 결혼하였다. 중국 광동국립대학 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천도교여성동맹, 근우회, 조선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1932년 3월 25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진화 계림회는 1944년 중국 저장성 진화에서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된 조선인 친일단체이다. 이 단체의 문서로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된 명부가 발견되었다. 2015년 10월, 진화 계림회 회칙 및 명부가 중국에서 공개되었는데, 명부에는 12개소의 진화 지역 위안소 또는 접객점의 업자와 그들과 현지 주소가 같은 20대 전후의 여성 129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진화 계림회 (金華 鷄林會)
진화 계림회는 1944년 중국 저장성 진화에서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된 조선인 친일단체이다. 이 단체의 문서로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된 명부가 발견되었다. 2015년 10월, 진화 계림회 회칙 및 명부가 중국에서 공개되었는데, 명부에는 12개소의 진화 지역 위안소 또는 접객점의 업자와 그들과 현지 주소가 같은 20대 전후의 여성 129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어윤석은 개항기 유인석 의병부대에 참여한 위정척사 계열의 화서학파 유학자이다.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의암 유인석과 동문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아들 어경선과 함께 이듬해에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가 관군에 패하여 서간도로 망명할 때 동행하고자 하였으나, 다리에 병이 생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8년 사망하였으며,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어윤석 (魚允奭)
어윤석은 개항기 유인석 의병부대에 참여한 위정척사 계열의 화서학파 유학자이다.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의암 유인석과 동문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아들 어경선과 함께 이듬해에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가 관군에 패하여 서간도로 망명할 때 동행하고자 하였으나, 다리에 병이 생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8년 사망하였으며,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안수산은 일제강점기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여성 장교가 되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여성 군인이다.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이다.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입학해서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으로 편입하여 1940년 졸업하였다. 1942년 해군 웨이브 부대의 여성 장교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였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였다. 이후 장교가 아닌 부사관으로 재차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장교 후보학교 추천을 받았고, 과정 수료 후 미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 해군 제대 후에는 비밀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하였다.
안수산 (安繡山)
안수산은 일제강점기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여성 장교가 되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여성 군인이다.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이다.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입학해서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으로 편입하여 1940년 졸업하였다. 1942년 해군 웨이브 부대의 여성 장교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였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였다. 이후 장교가 아닌 부사관으로 재차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장교 후보학교 추천을 받았고, 과정 수료 후 미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 해군 제대 후에는 비밀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