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장경희"
검색결과 총 57건
영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선적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15대 숙종의 능이다. 1105년(숙종 10) 10월 기축일에 승하하여 송림현에 장례를 지냈다. 근래 발견된 바에 의하면 능구역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13m,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1단에는 봉분과 2기의 석수 및 곡장을 둘렀고, 2단과 3단에는 문인석 1쌍씩 동서 6m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마주 서 있다. 1단의 무덤칸은 화강암 통돌로 남북 길이 3m, 동서 너비 1.2m,높이 1.6m이며 금박을 입힌 목관 조각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영릉 (英陵)
영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선적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15대 숙종의 능이다. 1105년(숙종 10) 10월 기축일에 승하하여 송림현에 장례를 지냈다. 근래 발견된 바에 의하면 능구역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13m,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1단에는 봉분과 2기의 석수 및 곡장을 둘렀고, 2단과 3단에는 문인석 1쌍씩 동서 6m를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마주 서 있다. 1단의 무덤칸은 화강암 통돌로 남북 길이 3m, 동서 너비 1.2m,높이 1.6m이며 금박을 입힌 목관 조각 등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장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청교면 장릉리 일대에 비정되는 고려 전기 제17대 인종의 능이다. 인종은 1146년(인종 24) 2월 정묘일에 보화전에서 승하하고 3월 갑신일에 나성 남쪽에 장례 지냈다. 후에 제18대 의종, 제19대 명종, 제20대 신종이 참배한 적이 있다. 장릉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성의 서쪽인 벽관동에,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에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제16대 예종 유릉이나 제20대 신종 양릉 등이 있고, 양식이 유사하다고 여겨지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장릉 (長陵)
장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청교면 장릉리 일대에 비정되는 고려 전기 제17대 인종의 능이다. 인종은 1146년(인종 24) 2월 정묘일에 보화전에서 승하하고 3월 갑신일에 나성 남쪽에 장례 지냈다. 후에 제18대 의종, 제19대 명종, 제20대 신종이 참배한 적이 있다. 장릉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도성의 서쪽인 벽관동에,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장릉리에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제16대 예종 유릉이나 제20대 신종 양릉 등이 있고, 양식이 유사하다고 여겨지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숙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9대 덕종의 능이다. 덕종은 1034년(덕종 3) 9월 계묘일에 개성 북쪽 교외에 장례 지냈다.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태조 현릉과 제8대 현종 선릉 근처의 능을 발굴한 결과 덕종 숙릉으로 밝혀졌다. 무덤의 구조는 3단이고, 1단에는 봉분과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되어 있다. 2단에는 문인석이 좌우에 2쌍, 3단에는 정자각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무덤칸에서 금동제 활촉과 장식판, 은제 장식품과 고리, 청자보시기 조각, 청자대접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숙릉 (肅陵)
숙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9대 덕종의 능이다. 덕종은 1034년(덕종 3) 9월 계묘일에 개성 북쪽 교외에 장례 지냈다.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태조 현릉과 제8대 현종 선릉 근처의 능을 발굴한 결과 덕종 숙릉으로 밝혀졌다. 무덤의 구조는 3단이고, 1단에는 봉분과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되어 있다. 2단에는 문인석이 좌우에 2쌍, 3단에는 정자각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무덤칸에서 금동제 활촉과 장식판, 은제 장식품과 고리, 청자보시기 조각, 청자대접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질릉은 고려 전기 제9대 덕종의 비인 경성왕후 김씨의 왕후릉이다. 1086년(선종 3) 7월에 승하하여 질릉에 장례를 지냈고, 1096년(숙종 1) 덕종의 사당에 신주를 모셨다. 고려 전기에는 산직 장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으나 무신란 이후 왕후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여 능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2016년 남편인 덕종 숙릉이 발굴되어 그 근처에서 질릉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질릉 (質陵)
질릉은 고려 전기 제9대 덕종의 비인 경성왕후 김씨의 왕후릉이다. 1086년(선종 3) 7월에 승하하여 질릉에 장례를 지냈고, 1096년(숙종 1) 덕종의 사당에 신주를 모셨다. 고려 전기에는 산직 장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으나 무신란 이후 왕후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여 능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2016년 남편인 덕종 숙릉이 발굴되어 그 근처에서 질릉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주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능이다. 정종은 1046년(정종 12) 9월 계묘일에 개성 북쪽 교외에 장례 지냈다.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해선리 2릉을 발굴한 결과 정종 주릉으로 밝혀졌다. 주릉은 3단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 1단 봉분 주위에는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되어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 1기가 넘어진 것을 세웠다. 3단에는 정자각의 터가 있었던 초석이 발견되었다. 주릉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되어 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주릉 (周陵)
주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능이다. 정종은 1046년(정종 12) 9월 계묘일에 개성 북쪽 교외에 장례 지냈다.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 위치한 해선리 2릉을 발굴한 결과 정종 주릉으로 밝혀졌다. 주릉은 3단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 1단 봉분 주위에는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되어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 1기가 넘어진 것을 세웠다. 3단에는 정자각의 터가 있었던 초석이 발견되었다. 주릉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되어 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알 수 있다.
현릉은 북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제1비인 용신왕후 한씨의 왕후릉이다. 용신왕후가 1036년(정종 2) 7월 경자일에 사망하자 그해 8월에 현릉에 장례를 지냈다. 능호는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능이다. 현재 그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아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는 알 수 없다.
현릉 (玄陵)
현릉은 북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제1비인 용신왕후 한씨의 왕후릉이다. 용신왕후가 1036년(정종 2) 7월 경자일에 사망하자 그해 8월에 현릉에 장례를 지냈다. 능호는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능이다. 현재 그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아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대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선적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11대 문종의 비 인예순덕태후의 왕후릉이다. 인예순덕태후가 1092년(선종 9) 9월 2일(임오)에 서경에서 세상을 떠나 개경으로 운구해 온 후 대릉에 장례를 지냈다. 1098년(숙종 3) 숙종이 대릉을 참배하여 아들을 왕태자로 책봉한 경사를 고하였다. 대릉은 산직장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으나 무신란 이후 관리가 소활하여 위치를 잃어버려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남편인 문종의 경릉이 위치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선적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릉 (戴陵)
대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선적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제11대 문종의 비 인예순덕태후의 왕후릉이다. 인예순덕태후가 1092년(선종 9) 9월 2일(임오)에 서경에서 세상을 떠나 개경으로 운구해 온 후 대릉에 장례를 지냈다. 1098년(숙종 3) 숙종이 대릉을 참배하여 아들을 왕태자로 책봉한 경사를 고하였다. 대릉은 산직장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으나 무신란 이후 관리가 소활하여 위치를 잃어버려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남편인 문종의 경릉이 위치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선적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동쪽에 있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의 합장릉이다. 선종은 1094년(선종 11) 5월 임진일에 연영전에서 사망하였고 빈소는 선덕전이었다. 이후 장례는 22일 뒤인 5월 갑인에 도성의 동쪽에 능침을 조성하였다. 정비인 사숙태후 이씨가 1107년(예종 2)에 사망한 후 합장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수직군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 관리 소홀로 위치를 잃어버렸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릉 (仁陵)
인릉은 북한 개성특별시 동쪽에 있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의 합장릉이다. 선종은 1094년(선종 11) 5월 임진일에 연영전에서 사망하였고 빈소는 선덕전이었다. 이후 장례는 22일 뒤인 5월 갑인에 도성의 동쪽에 능침을 조성하였다. 정비인 사숙태후 이씨가 1107년(예종 2)에 사망한 후 합장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수직군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 관리 소홀로 위치를 잃어버렸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릉은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의 제1비 경화왕후 이씨의 왕후릉이다. 경화왕후가 1109년(예종 4) 사망하자 왕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자릉은 산직당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다. 능의 위치는 남편인 예종 유릉이 있는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청교면 유릉리 근처로 여겨지나 위치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능의 구조나 규모를 알 수 없다.
자릉 (慈陵)
자릉은 고려 전기 제16대 예종의 제1비 경화왕후 이씨의 왕후릉이다. 경화왕후가 1109년(예종 4) 사망하자 왕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자릉은 산직당상 2명이 능을 수호하였다. 능의 위치는 남편인 예종 유릉이 있는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청교면 유릉리 근처로 여겨지나 위치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능의 구조나 규모를 알 수 없다.
진릉은 고려 후기 제20대 신종의 비 선정태후 김씨의 왕후릉이다. 선정태후가 1222년(고종 9) 8월 임인일에 사망하자 왕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진릉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편인 신종 양릉이 있는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고남리 근처로 여겨지며 능의 구조나 규모는 알 수 없다.
진릉 (眞陵)
진릉은 고려 후기 제20대 신종의 비 선정태후 김씨의 왕후릉이다. 선정태후가 1222년(고종 9) 8월 임인일에 사망하자 왕실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진릉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편인 신종 양릉이 있는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구역 고남리 근처로 여겨지며 능의 구조나 규모는 알 수 없다.
영릉은 고려 말기 제27대 충숙왕의 비 명덕태후 홍씨의 왕후릉이다. 충혜왕과 공민왕의 모후이고 우왕의 할머니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380년(우왕 6) 1월 무술일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2월에 왕실 법도에 따라 영릉에 장례를 치렀다. 영릉의 위치는 기록이 없어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영릉 (令陵)
영릉은 고려 말기 제27대 충숙왕의 비 명덕태후 홍씨의 왕후릉이다. 충혜왕과 공민왕의 모후이고 우왕의 할머니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380년(우왕 6) 1월 무술일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2월에 왕실 법도에 따라 영릉에 장례를 치렀다. 영릉의 위치는 기록이 없어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의릉(毅陵)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7대 충숙왕이 묻힌 왕릉이다. 충숙왕은 부친인 제26대 충선왕이나 아들인 제28대 충혜왕과 마찬가지로 즉위와 양위 및 복위를 반복하다가 1339년(충숙왕 복위 8) 3월 세상을 떠났다. 충숙왕은 같은 해 6월 개성에 묻혔고 능호는 의릉이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이 의릉을 이장하고자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현재 의릉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능제나 구조 및 상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의릉 (毅陵)
의릉(毅陵)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에 있는, 고려 후기 제27대 충숙왕이 묻힌 왕릉이다. 충숙왕은 부친인 제26대 충선왕이나 아들인 제28대 충혜왕과 마찬가지로 즉위와 양위 및 복위를 반복하다가 1339년(충숙왕 복위 8) 3월 세상을 떠났다. 충숙왕은 같은 해 6월 개성에 묻혔고 능호는 의릉이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이 의릉을 이장하고자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현재 의릉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능제나 구조 및 상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화혜장은 조선시대에 신목이 긴 화를 만드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짧은 혜를 제작하는 혜장(鞋匠)를 통칭하며,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나 '주피장(周皮匠)'이라고도 불렀다. 신발을 만드는 장인은 화장과 삽혜장(靸鞋匠) 및 화아장(靴兒匠)이 공조와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왕실 의례 때 석장(舃匠), 삽혜장, 온혜장(溫鞋匠), 화아장, 석장(舃匠), 목화장(木靴匠) 등이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전통 신의 제작 기술은 200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화혜장으로 지정되었다. 황해봉이 화예장 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화혜장 (靴鞋匠)
화혜장은 조선시대에 신목이 긴 화를 만드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짧은 혜를 제작하는 혜장(鞋匠)를 통칭하며,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나 '주피장(周皮匠)'이라고도 불렀다. 신발을 만드는 장인은 화장과 삽혜장(靸鞋匠) 및 화아장(靴兒匠)이 공조와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왕실 의례 때 석장(舃匠), 삽혜장, 온혜장(溫鞋匠), 화아장, 석장(舃匠), 목화장(木靴匠) 등이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전통 신의 제작 기술은 200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화혜장으로 지정되었다. 황해봉이 화예장 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길쌈은 삼풀·모시풀·목화·누에고치 등에서 실을 자아 삼실·모시실·무명실·명주실을 만들어 삼베·모시베·무명베·명주베를 짜는 전 과정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좁은 의미에서 실을 잣는 과정[紡績, 製絲]에 국한되었지만 지금은 넓은 의미로 베를 짜는 방직 과정[紡織, 織造]까지 모두 포함한다. 특히 길쌈은 인류가 식물의 잎이나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입다가 식물의 줄기나 솜에서 실을 만들어 천을 짜 옷을 지어 입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 노동하는 두레길쌈의 형태로 삼을 짓게 된 삼베길쌈이 발전한 것이다.
길쌈
길쌈은 삼풀·모시풀·목화·누에고치 등에서 실을 자아 삼실·모시실·무명실·명주실을 만들어 삼베·모시베·무명베·명주베를 짜는 전 과정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는 좁은 의미에서 실을 잣는 과정[紡績, 製絲]에 국한되었지만 지금은 넓은 의미로 베를 짜는 방직 과정[紡織, 織造]까지 모두 포함한다. 특히 길쌈은 인류가 식물의 잎이나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입다가 식물의 줄기나 솜에서 실을 만들어 천을 짜 옷을 지어 입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여럿이 함께 모여 노동하는 두레길쌈의 형태로 삼을 짓게 된 삼베길쌈이 발전한 것이다.
무명짜기는 경상북도 성주지방에서 목화를 따서 실을 뽑아 무명을 짜는 길쌈을 말한다. 한말 이후 전통 무명짜기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현재 국가와 시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무명짜기는 방적 과정과 방직 과정으로 구분된다. 방적 과정은 씨앗기,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로 실을 만든다. 방직 과정에서 씨실은 꾸리감기로 단순하며, 날실은 베뽑기, 베날기, 날실 익히기, 바디 끼우기, 베매기를 거쳐 베틀 위에서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 베짜기한다. 다 짠 무명베는 잿물에 삶아 손질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무명짜기
무명짜기는 경상북도 성주지방에서 목화를 따서 실을 뽑아 무명을 짜는 길쌈을 말한다. 한말 이후 전통 무명짜기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현재 국가와 시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무명짜기는 방적 과정과 방직 과정으로 구분된다. 방적 과정은 씨앗기,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로 실을 만든다. 방직 과정에서 씨실은 꾸리감기로 단순하며, 날실은 베뽑기, 베날기, 날실 익히기, 바디 끼우기, 베매기를 거쳐 베틀 위에서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 베짜기한다. 다 짠 무명베는 잿물에 삶아 손질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빗접은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빗솔·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그릇이다. 빗접은 만드는 재료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부르는 명칭도 달라진다. 기름에 절은 종이를 사용하여 납작하게 만든 제품은 빗접이고, 이것을 한자어로 소첩(梳貼)이라고 한다. 빗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 도구까지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은 소함(梳函) 혹은 소첩함(梳貼函) 및 소갑((梳匣)이다. 빗접을 벽걸이 형태의 고비에 꽂아서 사용하거나 고비로 만든 것은 빗접고비이다.
빗접
빗접은 머리 손질에 필요한 빗·빗솔·빗치개 등을 넣어 두는 그릇이다. 빗접은 만드는 재료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부르는 명칭도 달라진다. 기름에 절은 종이를 사용하여 납작하게 만든 제품은 빗접이고, 이것을 한자어로 소첩(梳貼)이라고 한다. 빗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 도구까지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은 소함(梳函) 혹은 소첩함(梳貼函) 및 소갑((梳匣)이다. 빗접을 벽걸이 형태의 고비에 꽂아서 사용하거나 고비로 만든 것은 빗접고비이다.
석수(石手)는 돌을 깨거나 쪼고 다듬어 석조물이나 기물을 만드는 장인이다. 석장(石匠), 석공(石工)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화강암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밖에 납석이나 청석, 대리석 등이 산재해 있다. 이른 시기부터 석수는 망치나 정과 같은 수공 도구로 돌을 다루어 생활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만들었고, 국가적으로는 성을 쌓거나 건물을 짓거나 석탑 및 불상 등을 세울 때 동원되었다. 현재 석수의 전통 수공 기술은 국가 및 시도 무형문화재인 석장(石匠)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석수 (石手)
석수(石手)는 돌을 깨거나 쪼고 다듬어 석조물이나 기물을 만드는 장인이다. 석장(石匠), 석공(石工)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화강암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밖에 납석이나 청석, 대리석 등이 산재해 있다. 이른 시기부터 석수는 망치나 정과 같은 수공 도구로 돌을 다루어 생활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만들었고, 국가적으로는 성을 쌓거나 건물을 짓거나 석탑 및 불상 등을 세울 때 동원되었다. 현재 석수의 전통 수공 기술은 국가 및 시도 무형문화재인 석장(石匠)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실첩은 조선시대에 색실이나 수본 및 헝겊 조각 등을 넣고자 종이를 배접하여 책처럼 접도록 만든 수납구이다. 실패가 나무를 깎아 실을 감아 보관하는 것과 달리 실첩은 종이로 지갑처럼 만들고 책처럼 접어서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백지를 두껍게 배접하여 반으로 접고 안쪽에 칸을 만드는 단순한 형식이다. 이것을 두세 번 접고 그 안에 칸칸이 갑을 만들어 여러 색실을 분류하여 넣기도 한다. 표면에 색지로 좋은 의미를 지닌 여러 길상 문양을 오려 붙여 장식한다. 납작한 책 형태의 실첩은 직육면체의 나무로 심을 넣은 실상자로 발전하였다.
실첩
실첩은 조선시대에 색실이나 수본 및 헝겊 조각 등을 넣고자 종이를 배접하여 책처럼 접도록 만든 수납구이다. 실패가 나무를 깎아 실을 감아 보관하는 것과 달리 실첩은 종이로 지갑처럼 만들고 책처럼 접어서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백지를 두껍게 배접하여 반으로 접고 안쪽에 칸을 만드는 단순한 형식이다. 이것을 두세 번 접고 그 안에 칸칸이 갑을 만들어 여러 색실을 분류하여 넣기도 한다. 표면에 색지로 좋은 의미를 지닌 여러 길상 문양을 오려 붙여 장식한다. 납작한 책 형태의 실첩은 직육면체의 나무로 심을 넣은 실상자로 발전하였다.
영릉은 고려 전기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 김 씨가 묻힌 왕릉이다. 경종이 981년 승하하여 경기 남쪽 영릉에 묻혔고, 이후 헌숙왕후 김 씨의 사후에 합장되었다. 능제는 고려 전기의 전형적인 4단이고, 봉분 주위에 12각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 우석 및 면석이 있다. 석사자로 추정되는 석수 3기가 있다. 입체감이 있는 문인석 1쌍은 양관을 쓰고 두 손에 홀을 들고 있는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조각 솜씨를 보인다. 능 아래쪽에서 비석을 받쳤던 거북 받침돌이 발견되었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이 있다.
영릉 (榮陵)
영릉은 고려 전기 제5대 왕 경종과 왕비 헌숙왕후 김 씨가 묻힌 왕릉이다. 경종이 981년 승하하여 경기 남쪽 영릉에 묻혔고, 이후 헌숙왕후 김 씨의 사후에 합장되었다. 능제는 고려 전기의 전형적인 4단이고, 봉분 주위에 12각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 우석 및 면석이 있다. 석사자로 추정되는 석수 3기가 있다. 입체감이 있는 문인석 1쌍은 양관을 쓰고 두 손에 홀을 들고 있는데,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조각 솜씨를 보인다. 능 아래쪽에서 비석을 받쳤던 거북 받침돌이 발견되었고, 1867년(고종 4)에 세운 표석이 있다.
명릉(明陵)은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국왕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1028년 7월에 조성하였는데 『고려사』에는 현종의 선릉과 원성왕후의 명릉을 지키는 인원이 같다는 기록으로 보아 1031년 조성된 현종의 선릉이 있는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어 그중 1기가 원성왕후릉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북한에는 명릉이라는 고려왕릉의 능호를 지닌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지만, 이곳은 충목왕의 명릉으로 여겨져 능호만 같을 뿐이지만, 명릉떼 2릉의 능묘 문석인이 선릉떼 1릉의 것과 양식적으로 같아 이곳일 가능성도 있다.
명릉 (明陵)
명릉(明陵)은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8대 국왕 현종의 제3비인 원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1028년 7월에 조성하였는데 『고려사』에는 현종의 선릉과 원성왕후의 명릉을 지키는 인원이 같다는 기록으로 보아 1031년 조성된 현종의 선릉이 있는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어 그중 1기가 원성왕후릉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북한에는 명릉이라는 고려왕릉의 능호를 지닌 곳에 3기의 무덤이 있지만, 이곳은 충목왕의 명릉으로 여겨져 능호만 같을 뿐이지만, 명릉떼 2릉의 능묘 문석인이 선릉떼 1릉의 것과 양식적으로 같아 이곳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