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혜장 ()

의생활
개념
조선시대에, 짐승의 가죽으로 가죽신[革履]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 갖바치. 주피장.
이칭
이칭
화장(靴匠), 혜장(鞋匠), 삽혜장(靸鞋匠), 온혜장(溫鞋匠), 화아장(靴兒匠), 석장(舃匠), 목화장(木靴匠), 주피장(周皮匠)
속칭
갓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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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화혜장은 조선시대에 신목이 긴 화를 만드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짧은 혜를 제작하는 혜장(鞋匠)를 통칭하며,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나 '주피장(周皮匠)'이라고도 불렀다. 신발을 만드는 장인은 화장과 삽혜장(靸鞋匠) 및 화아장(靴兒匠)이 공조와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왕실 의례 때 석장(舃匠), 삽혜장, 온혜장(溫鞋匠), 화아장, 석장(舃匠), 목화장(木靴匠) 등이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전통 신의 제작 기술은 200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화혜장으로 지정되었다. 황해봉이 화예장 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키워드
정의
조선시대에, 짐승의 가죽으로 가죽신[革履]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 갖바치. 주피장.
내용

조선시대에 가죽을 재료로 삼아 신발을 만드는 장인은 장화를 만드는 화장(靴匠)과 신목이 짧은 혜(鞋)를 제작하는 혜장(鞋匠)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화혜장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신발은 신분과 계층에 따라 재료나 형태, 종류에서 차등을 두어 착용하였다. 서민들은 짚이나 나무로 만든 짚신과 나막신 등을 신은 데 비해 왕실이나 사대부 등은 가죽으로 만든 석(舃)을 비롯하여 당혜, 운혜, 온혜, 수혜, 흑피혜, 녹비혜, 태사혜, 투혜, 제혜, 유혜 등 다종다양한 신발을 신었다. 국왕이나 왕비 및 왕세자 등은 국혼이나 제례 때 면복이나 적의를 입고 석을 착용하였는데, 이것을 만든 장인이 석장(舃匠)이다. 국왕이나 신하들은 평상시에 목이 긴 흑피화(黑皮靴)나 목화(木靴)를 신었으며, 이 신발들은 목화장(木靴匠)이 만들었다. 목이 짧은 신발을 만드는 장인은 삽혜장(靸鞋匠)이나 온혜장(溫鞋匠)이고, 신발에 장식을 하던 장인은 화아장(靴兒匠)이었다.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은 주피장(周皮匠)이고, 순한글로는 ‘갓바치’라 불렸다.

역사적 변천

조선시대에는 가죽 신발을 만드는 장인을 법제화하여 『경국대전』에 관청 소속의 경공장(京工匠) 숫자를 규정하였다. 신목이 긴 화(靴)를 제작하는 화장(靴匠)은 공조에 6명이 소속되었고, 신목이 짧은 혜를 제작하는 삽혜장은 공조에 8명, 상의원에 8명이 소속되었다. 신 위에 장식을 하는 화아장(靴兒匠)은 공조에 2명과 상의원에 4명이 소속되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의례 행사 때 신발을 제작하는 장인은 신발의 재료나 형태 및 장식에 따른 기술에 따라 석장, 삽혜장, 온혜장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석장(舃匠)의 경우 1610년 의인왕후에게 존호를 올리고 광해군비를 중궁전으로 책봉하는 책례도감에서 장인 3명을 동원하여 의례용 신발인 청석(靑舃)이나 적석(赤舃)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삽혜장(靸鞋匠)은 1627년 소현세자의 국혼 때 가례도감과 1784년 문효세자를 왕세자로 책봉하는 책례도감에 장인 3-4명을 동원한 적이 있다. 한편 온혜장은 상의원 소속의 경공장이었는데, 1719년 왕세자 경종선의왕후의 국혼을 비롯하여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거행된 국혼 때마다 동원되었다. 1727년 진종효순왕후의 국혼 때 가례도감,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국혼 때 가례도감, 1759년 영조정순왕후의 국혼 때 가례도감, 1762년 정조효의왕후의 국혼 때 가례도감, 1802년 순조순원왕후의 국혼 때 가례도감에 온혜장을 동원하여 왕실의 신발을 제작하였다. 이 중 온혜장 김수천(金壽天)은 상의원 소속의 관공장으로서 1759년에 동원된 후 1762년에도 거듭 동원되어 주목된다.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는 주피장(周皮匠)이 왕이나 왕비의 사후에 설치된 국장도감이나 세자나 세자빈의 사후에 설치된 예장도감에 동원되어 활동하였다. 1702년 인현왕후의 사후 국장도감을 비롯하여 1718년 단의빈의 사후 예장도감, 1721년 숙종의 사후 국장도감, 1725년 경종의 사후 국장도감 및 1729년 효장세자(후일 진종으로 추존)의 사후 예장도감, 1731년 선의왕후의 사후 국장도감, 1732년 인조 장릉의 천릉도감, 1759년 현빈(진종비)의 사후 예장도감, 1762년 사도세자의 사후 예장도감, 1776년 영조의 사후 국장도감, 1895년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사후 국장도감, 1821년 효의왕후의 사후 국장도감 등에 주피장을 동원하였다. 특히 주피장 박평회(朴平會)는 1718년부터 1735년까지 32년 동안 훈련도감 소속의 군문 장인으로서 국장 때 가죽신을 만드는 데 동원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주피장 김만의(金萬義)는 1752년부터 1762년까지 10년 동안, 주피장 이수항(李守恒)은 1789년부터 1821년까지 32년 동안 국역에 동원되는 등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기도 하였다.

전통 신을 제작하는 장인은 한말까지 활동하였다. 그런데 양복이나 양장이 생활화되면서 구두 착용이 보편화될 뿐만 아니라 1920년 경에 고무신이 양산되면서 전통 화혜를 제작하는 장인과 그 기술은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근대기에 전통 신발을 제작하는 장인들은 성북구 동소문동에 많이 살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1971년 2월 9일 황한갑(黃韓甲, 1889-1982)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제37호 화장(靴匠)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같은 해 그의 아들인 황등용(黃登龍)이 전수를 시작하였지만 전승이 끊어졌다. 이후 1980년 손자인 황해봉(黃海逢, 1952년생)이 배우기 시작하여 200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10년에는 부산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 제17호 화혜장으로 안해표(安海杓, 1951년생)가 추가로 인정되어 활동하고 있다.

제작 과정

『상방정례』에 의하면 전통 신을 제작하는 재료는 다종다양하다. 겉감은 검은 곰 가죽이고, 안감은 사슴 가죽이다. 뒤꿈치 안쪽에는 자색의 사피근을 대며, 도리는 백색 개가죽으로 두르고, 휘는 대홍색과 초록색 비단을 마련한다. 도구는 백비판, 칼판, 풀널, 각종 칼, 송곳, 서개, 배기쇠, 신본, 버팀목 등이다.

운혜의 제작 과정을 예로 들면 먼저 광목모시를 겹쳐 백비에 신본을 대고 마름질하여 운혜용 공단을 그 위에 올려놓고 마름질한다. 가위로 시접을 정리하고 꺾어 올린다. 신울의 가장자리에 삼팔명주를 붙이고 안쪽에 창호지를 붙이고, 윗변과 아랫변에 곱게 박음질한 후, 신울에 덧천을 대서 보강한다. 내피를 재단하여 신울의 안쪽에 붙이고 도리용 면사에 밀납을 발라 신울의 겉과 겉을 맞바느질한다. 밑창은 3㎜의 쇠가죽에 신본을 대고 그려 칼로 잘라낸 후 신굽이 되는 도두개도 잘라 쌀풀을 바르고 방망이로 두들겨 접착시킨다. 밑창과 안창 사이에 여러 겹의 중창을 만들어 깐다. 신코를 뒤집어 잡아 뺀 후 매만진다. 목화실을 꼬아 코실을 만들고, 겉코 끝에 건다. 도리와 근피를 재단하여 붙이고 신창을 정리한다. 밑창과 도두개 및 중창에 대대리를 재단하여 붙이고 굼벵이와 죽엽을 만들어 붙인다. 신골에 박아 신의 형태를 잡아 주기 위해 꽉 맞게 끼우고 방망이로 500-1,000번 가량 두들긴 후, 쐐기를 박고 숯불에 건조시킨다. 마지막으로 신창과 신울의 봉제 부분 등에 활석을 발라 주고 지저분한 것을 떼어 내고 완성한다.

의의와 평가

가죽을 주재료로 하는 화혜를 비롯한 전통 신발은 수십 번의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므로 장인의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을 요한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신이나 신을 만드는 장인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여 그 기술과 당시 생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화혜장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작 기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
『상방정례』

단행본

조선희,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국립무형유산원, 2007)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솔과학, 2012)
최공호 외, 『한국인의 신발, 화혜』(미진사, 2015)
장경희, 『한 눈으로 보는 화혜』(공예디자인진흥원, 2019)

기타 자료

국가유산청(www.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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