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홍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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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는 고려 말 공민왕 때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된 무신이다. 원의 남정군 참가 요청으로 고울부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건적의 1, 2차 침입을 방어하고, 개경 탈환전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1362년(공민왕 11) 김용의 거짓 왕명을 믿고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이방실·김득배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1391년(공양왕 3)에 신원되었다.
안우 (安祐)
안우는 고려 말 공민왕 때 기철을 주살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된 무신이다. 원의 남정군 참가 요청으로 고울부 전투에 참여하였다. 홍건적의 1, 2차 침입을 방어하고, 개경 탈환전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1362년(공민왕 11) 김용의 거짓 왕명을 믿고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이방실·김득배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1391년(공양왕 3)에 신원되었다.
안전은 고려 후기에 전라도안찰사, 지밀직사사, 서북면도지휘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유경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 전라도안찰사, 좌승지, 부지밀직사사, 충청도안무사, 지밀직사사, 경상도도지휘사, 충청도도지휘사, 서북면도지휘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주로 충렬왕 대 정방의 필도적(비칙치)으로 활약하였으며, 인사 행정에 있어서 굳게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들이 쇠떡[鐵餻]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안전 (安戩)
안전은 고려 후기에 전라도안찰사, 지밀직사사, 서북면도지휘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유경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 전라도안찰사, 좌승지, 부지밀직사사, 충청도안무사, 지밀직사사, 경상도도지휘사, 충청도도지휘사, 서북면도지휘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주로 충렬왕 대 정방의 필도적(비칙치)으로 활약하였으며, 인사 행정에 있어서 굳게 바름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들이 쇠떡[鐵餻]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염국보는 고려 후기 안렴사, 지공거,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지춘추관사 등을 거쳤다.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1385년(우왕 11)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정몽주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3년 복제를 초상 때 입는 복제로 최초로 도입하였다. 1388년(우왕 14) 최영, 이성계에 의하여 아우 염흥방·임견미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염국보 (廉國寶)
염국보는 고려 후기 안렴사, 지공거,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지춘추관사 등을 거쳤다.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1385년(우왕 11)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정몽주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3년 복제를 초상 때 입는 복제로 최초로 도입하였다. 1388년(우왕 14) 최영, 이성계에 의하여 아우 염흥방·임견미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염승익은 고려 후기에 필도치, 도첨의중찬, 흥법좌리공신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78년(충렬왕 4) 필도치(비칙치)에 임명되었고, 현화사의 불전을 세웠으며, 현화사를 수리하고, 남계원·왕륜사의 석탑을 수리하였다. 『묘법연화경』 7축과 「아미타여래도」를 제작, 봉안하였다. 흥법좌리공신에 봉해지고, 도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다.
염승익 (廉承益)
염승익은 고려 후기에 필도치, 도첨의중찬, 흥법좌리공신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78년(충렬왕 4) 필도치(비칙치)에 임명되었고, 현화사의 불전을 세웠으며, 현화사를 수리하고, 남계원·왕륜사의 석탑을 수리하였다. 『묘법연화경』 7축과 「아미타여래도」를 제작, 봉안하였다. 흥법좌리공신에 봉해지고, 도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다.
염신약은 고려 후기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장서기, 첨사부녹사가 되었으며, 명종 때 국자시를 주관하고, 동지공거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이후 서북면병마사, 이부상서,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다. 조위총의 난 당시 대금외교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192년(명종 22)에 정당문학으로 치사하였고 이해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문이다.
염신약 (廉信若)
염신약은 고려 후기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 정당문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장서기, 첨사부녹사가 되었으며, 명종 때 국자시를 주관하고, 동지공거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다. 이후 서북면병마사, 이부상서,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다. 조위총의 난 당시 대금외교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192년(명종 22)에 정당문학으로 치사하였고 이해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문이다.
염흥방은 고려 후기 좌대언, 밀직부사, 도병마사, 삼사좌사 등을 역임하며 2등 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좌대언, 지신사, 밀직부사, 밀직지신사, 밀직제학, 도병마사, 서성군, 삼사좌사를 역임하였다. 1387년(우왕 13)에는 염흥방의 종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을 계기로 1388년(우왕 14)에 최영·이성계 등에게 지윤·임견미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염흥방 (廉興邦)
염흥방은 고려 후기 좌대언, 밀직부사, 도병마사, 삼사좌사 등을 역임하며 2등 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좌대언, 지신사, 밀직부사, 밀직지신사, 밀직제학, 도병마사, 서성군, 삼사좌사를 역임하였다. 1387년(우왕 13)에는 염흥방의 종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을 계기로 1388년(우왕 14)에 최영·이성계 등에게 지윤·임견미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오계남은 고려 후기 순군경력, 예부상서, 덕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65년(공민왕 14) 신돈의 당여가 되어 순군경력으로서 최영 등을 국문하였다. 명나라가 요구한 탐라의 말을 가져가기 위하여 제주에 왔으나, 1372년(공민왕 21) 제주에 반란이 일어나 말을 바치지 못하자, 예부상서로서 명나라에 말 6필을 바치고 돌아왔다. 1378년(우왕 4) 전라도에 파견되어 호구를 조사하였고, 예의판서로서 북원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2년(우왕 8) 덕성군으로서 경상도도안무사에 기용되었다.
오계남 (吳季南)
오계남은 고려 후기 순군경력, 예부상서, 덕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365년(공민왕 14) 신돈의 당여가 되어 순군경력으로서 최영 등을 국문하였다. 명나라가 요구한 탐라의 말을 가져가기 위하여 제주에 왔으나, 1372년(공민왕 21) 제주에 반란이 일어나 말을 바치지 못하자, 예부상서로서 명나라에 말 6필을 바치고 돌아왔다. 1378년(우왕 4) 전라도에 파견되어 호구를 조사하였고, 예의판서로서 북원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2년(우왕 8) 덕성군으로서 경상도도안무사에 기용되었다.
오잠은 고려 후기에 상의회의도감사, 삼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간신이다. 지신사,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 장안의 서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삼사사, 찬성사에 이어 구성군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두어야 한다는 입성책동을 벌여 고려 측에 많은 해를 끼쳤다.
오잠 (吳潛)
오잠은 고려 후기에 상의회의도감사, 삼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간신이다. 지신사,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 장안의 서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삼사사, 찬성사에 이어 구성군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여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두어야 한다는 입성책동을 벌여 고려 측에 많은 해를 끼쳤다.
오형은 고려 후기 군부총랑, 첨의찬성사, 감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60년(원종 1)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후 지공거 김지대가 주관한 과거에 합격하였다. 원종대 동궁시학, 남경사록, 중서주서를 거쳤고, 충렬왕 대에 첨의사인, 금녕부사, 군부총랑, 경사교수 등을 지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삼사우사가 되었으며, 이해 왕명으로 제궁 및 내료의 이름을 고치고 또 궁주를 옹주로 고치는 등의 일을 주관하였다.이후 첨의찬성사·감춘추관사·지선부사로 치사하였다.
오형 (吳詗)
오형은 고려 후기 군부총랑, 첨의찬성사, 감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60년(원종 1)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후 지공거 김지대가 주관한 과거에 합격하였다. 원종대 동궁시학, 남경사록, 중서주서를 거쳤고, 충렬왕 대에 첨의사인, 금녕부사, 군부총랑, 경사교수 등을 지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삼사우사가 되었으며, 이해 왕명으로 제궁 및 내료의 이름을 고치고 또 궁주를 옹주로 고치는 등의 일을 주관하였다.이후 첨의찬성사·감춘추관사·지선부사로 치사하였다.
왕강은 고려 말 서북면안무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 초기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조선 개국세력에 의해 유배된 문신이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직학·강녕부승이 되었다. 우왕 때 서북면안무사, 양광·전라·경상도수군도체찰사 겸 방어영전염철사가 되었고, 조선 건국 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나, 거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회군공신에 추록되었으나, 1394년(태조 3) 다시 공주에 유배되고 뒤에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왕강 (王康)
왕강은 고려 말 서북면안무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 초기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조선 개국세력에 의해 유배된 문신이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성균직학·강녕부승이 되었다. 우왕 때 서북면안무사, 양광·전라·경상도수군도체찰사 겸 방어영전염철사가 되었고, 조선 건국 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나, 거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회군공신에 추록되었으나, 1394년(태조 3) 다시 공주에 유배되고 뒤에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함께 살해되었다.
고려 후기에 상장군,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대호군으로 반란군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 부자을 진압하였고, 원나라의 남정군 참가 요청으로 고울부 전투에서 참여하였다. 홍건적의 1~2차 침입을 방어하고, 개경 탈환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1362년(공민왕 11) 재상이었던 김용의 거짓 왕명을 믿고 총병관 정세운을 마음대로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안우·김득배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1391년(공양왕 3)에 신원되었다.
이방실 (李芳實)
고려 후기에 상장군,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대호군으로 반란군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 부자을 진압하였고, 원나라의 남정군 참가 요청으로 고울부 전투에서 참여하였다. 홍건적의 1~2차 침입을 방어하고, 개경 탈환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1362년(공민왕 11) 재상이었던 김용의 거짓 왕명을 믿고 총병관 정세운을 마음대로 살해하였다는 죄목으로 안우·김득배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1391년(공양왕 3)에 신원되었다.
인당은 고려 후기 첨의평리,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356년(공민왕 5)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동지밀직사사 강중경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 8참과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3참을 공략하였다. 이는 공민왕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원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원을 오가는 교통로를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고려가 원나라 국경을 침범한 것은 공민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변방의 장수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라 변명하였다. 그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인당이 소환되어 처형당하였다.
인당 (印璫)
인당은 고려 후기 첨의평리,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356년(공민왕 5)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동지밀직사사 강중경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 8참과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3참을 공략하였다. 이는 공민왕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원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원을 오가는 교통로를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고려가 원나라 국경을 침범한 것은 공민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변방의 장수가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라 변명하였다. 그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인당이 소환되어 처형당하였다.
정방의는 고려 후기 진주 출신의 향리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1200년(신종 3) 진주의 공·사 노예가 중심이 되어 주리들의 강압적인 수탈과 억압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정방의가 진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 기세를 타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주변의 천민들과 힘을 합쳐 계속 정방의를 치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정방의는 1201년(신종 4) 3월 진주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아우 정창대의 무리 200여 명도 평정되었다.
정방의 (鄭方義)
정방의는 고려 후기 진주 출신의 향리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1200년(신종 3) 진주의 공·사 노예가 중심이 되어 주리들의 강압적인 수탈과 억압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정방의가 진주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 기세를 타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주변의 천민들과 힘을 합쳐 계속 정방의를 치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정방의는 1201년(신종 4) 3월 진주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아우 정창대의 무리 200여 명도 평정되었다.
정세운은 고려 후기,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공민왕을 복주까지 호종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벽상도형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이방실·김득배·안우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이전 총병관 김용이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정세운를 살해하였다. 그 뒤 공민왕이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를 살해한 죄를 물어 처형하였고, 그를 첨의정승을 추증해 장사를 지냈다.
정세운 (鄭世雲)
정세운은 고려 후기,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공민왕을 복주까지 호종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벽상도형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이방실·김득배·안우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이전 총병관 김용이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정세운를 살해하였다. 그 뒤 공민왕이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를 살해한 죄를 물어 처형하였고, 그를 첨의정승을 추증해 장사를 지냈다.
정신용은 고려 전기에 장군, 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거란 침입으로부터 흥화진을 지켜낸 무신이다. 1014년(현종 5) 거란의 침입 때, 거란군이 통주에 침입하자, 흥화진의 장군으로서 이를 격퇴시키고 7백여 급의 목을 베었다. 이듬해 1015년(현종 6) 거란이 통주와 흥화진에 침입하자, 정신용은 대장군으로서 막하와 함께 거란군의 후미를 쳐서 700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정신용 (鄭神勇)
정신용은 고려 전기에 장군, 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거란 침입으로부터 흥화진을 지켜낸 무신이다. 1014년(현종 5) 거란의 침입 때, 거란군이 통주에 침입하자, 흥화진의 장군으로서 이를 격퇴시키고 7백여 급의 목을 베었다. 이듬해 1015년(현종 6) 거란이 통주와 흥화진에 침입하자, 정신용은 대장군으로서 막하와 함께 거란군의 후미를 쳐서 700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서릉은 고려 후기 제23대 왕 고종에게 절효라는 시호를 받은 효자이다. 전라도 장성현 사람으로, 어머니의 낫기 어려운 악성 종기를 낫게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 효우 열전에 입전되어 있으며,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거가십훈」을 만들어 가르쳤다. 1578년(선조 11)에 효자 서릉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정려비를 세웠다.
서릉 (徐稜)
서릉은 고려 후기 제23대 왕 고종에게 절효라는 시호를 받은 효자이다. 전라도 장성현 사람으로, 어머니의 낫기 어려운 악성 종기를 낫게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 효우 열전에 입전되어 있으며, 시묘살이할 때 배우러 온 어린 자제들이 예제를 알지 못하므로 「거가십훈」을 만들어 가르쳤다. 1578년(선조 11)에 효자 서릉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정려비를 세웠다.
경령전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고려시대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이다. 고려 원묘(原廟) 중의 하나로 태조·황고(太祖皇考)의 별묘(別廟)라고 불렸다. 태조와 국왕의 직계 4대친(부·조·증조·고조)의 진영을 봉안한 영전(影殿)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주고(奏告)와 부묘(祔廟)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사직·태묘와 같이 대사에 올라 있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와 단오·추석·중구일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경령전 (景靈殿)
경령전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고려시대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이다. 고려 원묘(原廟) 중의 하나로 태조·황고(太祖皇考)의 별묘(別廟)라고 불렸다. 태조와 국왕의 직계 4대친(부·조·증조·고조)의 진영을 봉안한 영전(影殿)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주고(奏告)와 부묘(祔廟)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사직·태묘와 같이 대사에 올라 있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와 단오·추석·중구일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만권당은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北京)에 세운 서재(書齋)이다. 이곳에서 남송(南宋) 출신의 유학자인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고려의 명유 이제현(李齊賢)이 서로 교유(交遊)하였고, 그 결과 만권당을 중심으로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만권당 (萬卷堂)
만권당은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北京)에 세운 서재(書齋)이다. 이곳에서 남송(南宋) 출신의 유학자인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고려의 명유 이제현(李齊賢)이 서로 교유(交遊)하였고, 그 결과 만권당을 중심으로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삼각산명당기』는 고려시대에 남경(현, 서울 지방)을 명당으로 풀이한 지리도참서이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삼각산명당기』는 고려시대 지리도참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의 하나로,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고 그 일부만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전하고 있으며, 이궁(離宮) 설치나 천도설(遷都說)이 제기될 때마다 주목되었다.
삼각산명당기 (三角山明堂記)
『삼각산명당기』는 고려시대에 남경(현, 서울 지방)을 명당으로 풀이한 지리도참서이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삼각산명당기』는 고려시대 지리도참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의 하나로,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고 그 일부만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전하고 있으며, 이궁(離宮) 설치나 천도설(遷都說)이 제기될 때마다 주목되었다.
대관전(大觀殿)은 개성특별시 만월동 송악산에 있었던 고려시대 정궁인 연경궁 안에 있는 전각이다. 고려 개경 본궐인 연경궁의 정전 중 하나이다. 1138년(인종 16) 본궐에 있는 전각의 명칭을 고칠 때 건덕전에서 대관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건덕전은 고려 전기부터 있었던 천덕전과 같은 전각으로 추정된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에는 1339년(충숙왕 복위 8) 6월에 대관전 은행나무가 저절로 넘어졌다는 기록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대관전 (大觀殿)
대관전(大觀殿)은 개성특별시 만월동 송악산에 있었던 고려시대 정궁인 연경궁 안에 있는 전각이다. 고려 개경 본궐인 연경궁의 정전 중 하나이다. 1138년(인종 16) 본궐에 있는 전각의 명칭을 고칠 때 건덕전에서 대관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건덕전은 고려 전기부터 있었던 천덕전과 같은 전각으로 추정된다. 몽골과의 전쟁 이후에는 1339년(충숙왕 복위 8) 6월에 대관전 은행나무가 저절로 넘어졌다는 기록밖에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