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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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인물
개항기 전운서낭청, 내무부참의직, 법무아문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자고(子皐)
시호
헌민(獻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894년(고종 31)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함경북도 경흥
정의
개항기 전운서낭청, 내무부참의직, 법무아문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고(子皐),  함경북도 경흥의 토반 출신.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김인승(金麟昇)을 따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뒤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6년에 일본에 건너가 약 1년반 동안 동경에서 우치무라[內村直義]의 무급(無給) 어학교사 자격으로 머무른 일이 있었다. 또 만주의 길림(吉林)과 중국 북경에도 드나든 적이 있어 비교적 해외사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 일본어 ·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변경 사무로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었던 함경도 경성(鏡城) 출신 관리 장박(張博)의 주선으로 서울에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1884년부터 1886년까지 기기국위원(機器局委員) · 전환국위원(典圜局委員)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국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정부가 추진한 각종 개화사업, 특히 일본 및 청나라로부터의 선박 · 무기 구입, 전선가설, 전선기술자의 양성, 그리고 모스부호의 도입 등에 종사하였다.

1886년 8월 이른바 제2차 한러밀약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서울에 파견된 청나라의 주차관(駐箚官) 위안스카이[袁世凱]로부터 한러밀약을 방조한 반청독립노선파(反淸獨立路線派) 인물로 지목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및 미국 공사관측의 개입으로 곧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뒤 전운서낭청(轉運署郎廳) · 연무공원사무(鍊武公院司務) ·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등 개화 담당부서의 요직을 맡아 자주 일본을 내왕하면서 기선과 석탄 구입을 주선하였다. 또 국내에서는 밀어채(密漁採)와 밀무역을 막는 일에도 종사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경장이 시작되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친일개혁관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계에 두각을 나타났다. 내무부참의직을 거쳐 군국기무처회의원 겸 법무아문협판 · 법무아문대신서리 등 요직을 차지하고 김홍집(金弘集) · 유길준(兪吉濬) 등과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반일세력인 대원군파의 미움을 받아 그 해 10월 31일에 흥선대원군 및 이준용파(李埈鎔派)의 자객인 전동석(田東錫) · 최형식(崔亨植) 등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참고문헌

「갑오경장 이전의 유길준-1894년 친일개혁파로서의 등장배경을 중심으로-」(유영익, 『한림대학논문집』 4, 1986)
「구한말노령이주민의 한국정계진출에 대해-김학우의 활동을 중심으로-」(이광린, 『역사학보』 108, 1985)
「日本外務省御雇外國人 金麟昇について」(崔書勉, 『韓』 7-6, 1978)
집필자
유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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