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은 고려전기 국사, 승통, 국청사 제1대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055년(문종 9)에 태어나 1101년(숙종 6)에 사망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자원하여 11세에 출가했다. 송나라에 유학해 수도 변경의 여러 절에 머물면서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에 대해 토론하며 견문을 넓혔다. 1086년(선종 3)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불교전적 정비·편찬에 힘썼다. 1097년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하여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 · 율 · 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았다.
1067년(문종 21)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송나라에 유학을 계획하고,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와 편지를 통하여 교유하였다. 1085년(선종 2) 송나라로 수도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면서 화엄의 대가인 유성법사(有誠法師)와 교유하였다.
그 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의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또,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 가서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그가 고려에서 가지고 간 지엄(智儼) · 현수(賢首) · 청량(淸凉) · 규봉(圭峯) 등의 저술을 통해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원소율사(元炤律師)를 비롯한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 담론하였다.
1086년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 · 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정원에게 『화엄경』과 장경각 건립비로 금 2,000냥을 보냈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국내의 고서를 모았다.
그는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교장』의 간행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는데,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1097년(숙종 2) 국청사(國淸寺)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1099년 천태종의 제1회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그가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 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저서에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22권, 『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 『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23권과 『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 『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 천태사교의주(天台四敎儀註)』 3권, 『계악권선면학(誡惡勸善勉學)』 1권, 『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등이 있다. 그밖에 『화엄경』 180권을 비롯하여 국어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 권이다.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만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교웅(敎雄), 징엄(澄儼), 수개 등 160여 명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며, 비는 영통사와 선봉사(僊鳳寺)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