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시 ()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남부에 위치한 시.
정의
평안남도 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용강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대동강을 경계로 황해도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5°22′∼125°25′, 북위 38°42′∼38°44′에 위치하며, 면적 41.3㎢, 인구 7만 7106명(1941년 현재)이다.

욱(旭) · 항(港) · 원(元) · 월견(月見) · 삼화(三和) · 명협(明峽) 등 6개 동과 비석(碑石) · 용정(龍井) · 한두(漢頭) · 억량기(億兩機) · 유사(柳沙) · 마사(麻沙) · 대두(大頭) · 후포(後浦) · 신흥(新興) · 지산(芝山) · 마산(麻山) 등 11개 이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욱동이다.

자연환경

대부분의 지역이 구릉 지대와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서남부에 명협산(明峽山, 35m) · 연대산(煙臺山, 98m) · 마산(麻山), 동남부에 한두산(漢頭山, 61m) 북부에 원산(圓山, 109m) 등의 낮은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으며, 남쪽과 동쪽은 넓은 후포천(後浦川)의 충적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대동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하구가 나팔상으로 벌어지는 삼각강을 이루어 항만으로서의 지형적 조건은 유리하지만 조차가 커서 선박 출입이 불편하다.

따라서, 1915년 시가지와 비발도(飛潑島) 사이의 간석지를 이용하여 개거식(開渠式) 축항을 하였으며, 연안의 가덕도(加德島) · 비발도 등의 작은 섬들이 인공적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내륙 지방에 비하여 온화하다. 연평균 기온 10.3℃, 1월 평균 기온 -6.8℃, 8월 평균 기온 25.1℃이며, 연 강수량은 701.6㎜로 소우지이다.

역사

[고 대]

이곳은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고,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금당(金堂) · 호산(呼山) · 칠정(漆井)의 세 부곡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그 세력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나 발해 건국 후,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하게 되었다.

[고 려]

1136년(인종 14) 묘청의 난을 평정한 뒤 서경기(西京畿) 4도를 나누어 6현을 신설할 때, 이곳의 세 부곡을 합하여 삼화현(三和縣)으로 삼아 현령을 파견하였다.

몽고의 지배 아래에 있던 1269년(원종 10)원나라의 동녕부에 소속되어 황주(黃州)의 영현이 되었다가 1278년(충렬왕 4) 현으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시 지역은 고려 말 증남포(甑南浦)라 불렸다.

[조 선]

1413년(태종 13)평안도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 삼화현의 호구는 410호, 3,105명이었다.

1686년(숙종 12) 삼화현민인 이원빈(李元馪)과 평안도관찰사인 권업(權0x9AA0)의 요청에 의하여 삼화현을 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부사로 하여금 청남수군방어사(淸南水軍防禦使)를 겸임하게 하고, 용강 · 강서 · 평양 · 중화 · 상원 · 함종 · 증산 · 영유 · 순안 · 숙천 · 안주 등 여러 고을의 수군(水軍)과 연군(烟軍)을 소속하게 하였고, 광량진(廣梁鎭)과 노강진(老江鎭)의 두 군진을 관할하게 하였다.

[근 대]

1896년평안남도 삼화군으로 개편되었는데, 진남포시 지역은 원당면에 속하였던 작은 어촌이었다. 지금은 진남포시의 중심지인 고패동[龍井里] · 뒷개[後浦里] · 비석거리[碑石里] · 새장거리[驛前里]일대는 잡초가 우거진 소택지였으나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드나들게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 · 원산 · 인천을 개항하게 한 뒤 다시 대동강구에 항구를 마련하여 관서 지방의 물산을 손아귀에 넣고자 삼화부의 개항을 추진하였다.

이때에는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1897년 10월대한제국이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하여 목포항과 삼화부를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해관(海關)을 설치하였다.

진남포가 개항한 뒤, 일본 상인이 진출하고 청나라도 이들과 경쟁하게 되어 양국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거류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삼화군청을 지금의 진남포시내로 옮겼고, 감리서(監理署)를 두어 행정과 무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906년 감리서가 폐지되자 다시 삼화부로 개칭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이곳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군수품 수송의 핵심 항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반도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그들의 영사관을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하였고, 1910년이사청과 삼화부를 폐지하고 진남포부가 되었다.

그 뒤 이곳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1914, 1938년, 1945년 4월 용강군 일부 지역을 차례로 편입, 1945년진남포부가 시로 되었으며, 27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유물 · 유적

시의 동쪽 삼화교 아래에 있는 호도(虎島)는 명소로 꼽히고 있다. 호도에는 조선 초기에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있었으나, 1444년(세종 26) 광량진(廣梁鎭)으로 그 군영이 옮겨갔다.

교육 · 문화

옛 교육기관은 별로 없어 1939년 현재 서당이 2개뿐이며 교육은 대체로 용강군 내의 서당에 의지하였다. 1907년 근대 교육기관으로 진남포공립보통학교가 처음으로 설립되었으며, 안중근(安重根)이 안악에서 옮겨 와 1907년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 그가 연해주로 망명하게 되자 신민회 간부이던 김지간(金志侃) 등이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실과계 기술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1913년 진남포실과고등여학교, 1916년 진남포상공학교가 세워졌고, 그 밖에 상업전수학교와 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되어 초급 실과 기능인들을 키워 냈다.

또한, 상공업 도시로 발전됨에 따라 근로자가 늘어나자 노동 권익 사업에 힘써 오던 강정정(姜停情)은 근로자 자제를 위한 육영 기관인 삼천학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관서 지방에 뿌리내리게 된 그리스도교 각파에서는 장로교계인 득신학교, 감리교계인 삼숭학교, 천주교계인 해성학교 등을 설립하여 신학문 교육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39년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 중등학교 4개교가 있었다.

1938년의 종교 상황은 천주교 성당 1개, 개신교 교회 14개가 있었다. 불교는 한국 사찰은 없고 일본계 일련종 · 정토종 등의 사원이 있었다.

이곳의 문화 활동은 이 지역의 신문사인 서선일보사와 동아일보 · 조선일보 · 조선중앙일보 등의 진남포 지국이 주도하였다. 1930년대에 동아일보 지국에 한글연구회가 설치되어 문자 교육과 문화 계몽을 통한 민족운동이 이루어졌고, 조선중앙일보 지국장 박석관(朴碩寬)은 지방 문예인을 규합하여 문예인 동지회를 결성하고 문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에 부립 도서관이 설치되었고, 1924년에 조직된 삼화노동청년회는 지육부(智育部) · 체육부 · 음악부를 두고 체육과 문화 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폈다. 각 종교 단체는 종교 활동을 통한 민족 계몽과 교육 사업으로 문화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1924년에 공설 운동장이 건설되어 주경기장과 야구장 · 정구장 · 대궁장 · 아동놀이터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매년 5월 단오를 전후하여 시민 대운동회가 개최되었으며, 지역사회의 단합에 큰 구실을 하였다.

이(里) 대항전으로 각종 경기가 진행되었으며, 대개 용정리 · 비석리 · 후포리의 삼파전으로 압축되어 우승이 결정지어졌다. 그리고 유명한 육상 선수와 축구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산업 · 교통

1897년 개항과 더불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방의 항구도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지이며, 평안남도 공업 지대의 관문으로 각종 공업이 발달하고, 원료와 제품의 수출입이 이루어지는 무역항이다.

이곳에 발달한 평야 지대는 평양평야 · 재령평야와 접하고 있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고, 또한 진남포사과의 산지로 토양과 건조한 기후가 사과 재배에 적합하며, 품질이 우수하고 수확량이 많아 국내뿐 아니라 일본 · 중국에 널리 수출되고 있다.

근대식 제련을 위하여 대두리에 1915년 진남포제련소가 설립되어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는 조동(粗銅)을 제련하고 있다. 그 밖에 경금속 · 화학 · 조선 등의 중공업과 정미 · 제분 · 양조 · 도자기 등의 공업도 발달하고 있다.

북서 지방 제1의 무역항으로 무역액에 있어 부산 · 인천에 이어 제3위를 차지하였다. 주요 수출품은 쌀 · 사과 · 밀가루 · 석탄 · 종이 · 청주 · 옥수수유 · 고무제품 · 흑연 · 시멘트 등이며, 주요 수입품으로는 비료 · 기계류 · 생고무 · 유리 · 양털 등이다. 그리고 황해를 사이에 두고 뤼다(旅大) · 톈진(天津) · 칭다오(靑島)와의 대중국(對中國) 무역항으로서의 중요성이 크다.

또한, 북서해안 제1의 어항으로 어패류의 집산지이다. 부근의 해안은 간만의 차가 크고 간석지가 넓으며, 강수량이 적고 증발량 · 일조량이 많아서 덕동 · 광량만 · 귀성 등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 최대의 염전 지대를 이루고 있다.

중국 · 일본과의 무역으로 인하여 시장의 기능이 두드러졌으며, 특산물인 사과의 수집, 판매를 위한 산업조합과 청과물 주식회사 등이 조직되어 중국과 일본 상인의 내왕이 빈번하였다.

상설 시장으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중국인 화상(華商)들이 활동하였던 용정리장이 있다. 정기 시장으로는 신흥리장이 6일장으로 2 · 8일에 개시되고, 비석리장이 3일장으로 1 · 4 · 7일에 개시된다. 주요 거래 품목은 농산물 · 수산물 · 직물 · 공산품 · 특산품 등과 생활필수품이다.

그 밖에 삼화동의 어시장과 욱수동의 곡물 시장이 따로 열려 수산물과 곡물의 거래가 이루어졌고, 곡물과 가축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었다.

교통은 1910년에 준공된 평양∼진남포 간의 평남선이 통과하며, 그 뒤 평원선 · 만포선 · 서선(西鮮)중앙철도 등 배후철도망의 개통으로 지하자원 · 농산물 · 공산품의 수송에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1938년 완공된 평안철도선(平安鐵道線)은 진남포역을 기점으로 유사 · 덕동 · 신덕역을 지나 염전 지대인 광량만 · 귀성과 용강온천이 있는 해운면 온정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국도는 평양∼진남포간, 지방도로는 진남포에서 황주 · 중화 · 강서 · 함종 지역과 각각 연결되어 있다. 또한, 대동강과 재령강을 이용한 수운도 발달하여 교통은 상당히 편리하다.

광복 후 변천

1952년남포시로 이름이 바뀐 것을 비롯하여 여덟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으며, 현재는 강서군과 용강군을 통합, 북한 행정구역상 남포직할시가 되었다.

1961년 3월 후포동과 용수동(龍水洞) 일부가 분리되어 해안동(海岸洞)이 신설되었으며, 용강군의 양곡면 갈천리(葛川里) · 우산리(牛山里) · 덕해리(德海里)가 남포시에 편입되었다.

1967년 10월 진도동(進道洞)과 새길동이 신설되는 한편, 강서군 보봉리(寶鳳里) · 강선리(降仙里) · 고창리(高昌里)가 분리, 강선노동자구로 개편되고, 보림리(普林里)가 대성리(臺城里)에 편입되는 등 구역 개편이 있었다.

1974년 5월 한학리와 덕해리의 일부가 도지동(島智洞)에 통합되고, 문애리는 신흥리(新興里)에, 고령리는 대대리(大臺里)에 합쳤다.

1978년 3월 강서군과 용강군 일부로서 대안시(大安市)가 신설되고, 강서군이 폐지되었다. 이 지역은 1979년 12월남포시가 직할시로 되면서 남포직할시에 편입되었다. → 남포직할시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朝鮮の市場』(朝鮮總督府)
『진남포시민회지』(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신한국지리』(강석오, 새글사, 1974)
집필자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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