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효증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희삼(希參)
시호
공목(恭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8년(세종 30)
사망 연도
1513년(중종 8)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공조판서|함경도관찰사
정의
조선 전기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삼(希參). 민유의(閔由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호례(閔好禮)이고, 아버지는 민오(閔悟)이며, 어머니는 봉안국(奉安國)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6년(성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경연전경(經筵典經), 1479년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거쳐 1487년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1489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다음 해 간원(諫院)으로부터 논박을 당한 사헌부 대사헌 박숭질(朴崇質)의 교체를 적극 주장하다가 상관을 비방했다는 지적을 받고 해임되었다. 1491년 야인을 토벌할 때 서북면 도원수 이극균(李克均)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493년 사간원 사간과 사헌부 집의를 역임했으며,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1497년(연산군 3) 상소문 10개항을 올려 경연의 필요성과 간언을 중히 여길 것, 사(邪)·정(正)을 밝힐 것, 절검(節儉)에 힘쓰고 애민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501년 형조참의, 이듬해 공조참판을 거친 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관찰사 재직 시 함경도 내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민폐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1504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로 재임 중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춘추관당상을 지냈다. 1506년 지의금부사와 좌·우참찬에 이르고, 같은 해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여평군(驪平君)에 봉하여졌다.

1507년(중종 2)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성품이 강개하고 청백하여 언사가 매우 격하였으며 만년에는 조급하고 관용심이 없었다. 연산군 때에는 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로 있으면서 영선의 일을 많이 벌였고 연산군의 명에 잘 복종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권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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