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창(黃義昌)의 교열로 1935년 서울 방촌선생문집간역소(厖村先生文集刊役所)에서 간행되었다. 권두에 이건방(李建芳)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승규(李昇圭)의 발문이 있다.
원집·별집·외집·연보·부록 합 14권 7책. 석인본.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권수에 서문·범례·총목록·본전(本傳) 및 유상(遺像)·옥동서원전경(玉洞書院全景)·유묵(遺墨)·유물(遺物) 등의 사진이 실려 있다. 권1·2의 원집에 시 17수, 사(詞) 3수, 서(書) 7편, 소 15편, 전(箋) 11편, 계 48편, 의(議) 55편, 보고(報告) 1편, 여서(與書) 3편, 유서(遺書)·찬·비문 각 1편, 권3∼6의 별집에 서(書) 4편, 소 5편, 계 410편, 의(議) 6편, 상신서(上申書) 6편, 율문(律文) 1편, 의(儀) 4편, 권7·8의 외집에 서(書) 8편, 소 4편, 전(箋) 1편, 계 22편, 의(議) 44편, 교서 1편, 부록으로 행장·묘표·서(序) 각 1편, 권9∼12에 연보, 권13·14에 부록으로 사제문(賜祭文) 10편, 금석문 6편, 전선생시(餞先生詩) 3수, 가전문헌절초(家傳文獻節抄) 4편, 야사절초(野史節抄) 54편, 유상문헌(遺像文獻) 6편, 유물문헌(遺物文獻) 6편, 원우문헌(院宇文獻) 41편, 잡록(雜錄) 7편, 구실기서발문(舊實記序跋文) 4편,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시에는 「제영월금강정(題寧越錦江亭)」·「제강릉경포대(題江陵鏡浦臺)」 등 서경시가 있고, 「제길주객사(題吉州客舍)」·「제강계객사(題江界客舍)」 등 북변(北邊) 일대를 여행하며 객회(客懷)를 읊은 것도 여러 수이다. 사(詞) 3수는 모두 시조로 『가곡원류』에서 뽑아 수록한 것이다. 서(書)와 소는 대개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사직을 청원한 내용이다. 「청물가급의주노비소(請勿加給義州奴婢疏)」·「청물변경육전지법소(請勿變更六典之法疏)」 등 정책을 건의한 내용의 상소문도 있다.
권2의 전(箋)에는 그가 상중(喪中)에 있을 때 기복출사(起復出仕)를 사양하면서 올린 전문이 여러 편 있다. 권2∼8에 수록된 각종 계·의(議)에는 세종 때 좌의정·영의정 등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정책 수립이나 제도 개선에 관해 건의한 내용이 많다. 이 글에는 농사의 개량 및 구황책(救荒策), 교육의 진흥,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내치(內治)로부터 북방 야인(野人)의 토벌 및 왜인과의 무역 정책 등 외치(外治)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다.
권7의 소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궁궐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금하도록 건의하며, 그의 죄상을 논한 상소문 2편이 있다. 그는 태종 때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했었지만, 일단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상 정사에 간여함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대개 『세종실록』 등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것이 많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그의 업적에 비추어볼 때 사료적 가치가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