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국(洪柱國, 1623~1680)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범옹(泛翁), 죽리(竹里)이며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홍수(洪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이상(洪履祥)이고, 아버지는 홍영(洪霙)이며, 어머니는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무하당(無何堂) 홍주원(洪柱元)의 동생이고, 홍만선(洪萬選)의 아버지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으로 심유(沈攸), 송시열(宋時烈) 등과 교유하였다.
1662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주서, 지평을 거쳐, 1671년 부응교가 되고, 이에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지냈다. 그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왕이 온천에 행차하려 하자 중국의 예를 들어 행차를 중지하도록 간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제2차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9개월의 대공제(大功制)를 주장하여 남인들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기용되어 안악 현감이 되었다. 1680년 귀국하는 연행 사신을 맞이하러 갔다가 황주(黃州)에서 죽었다.
6권 3책의 목판본이다.
저자 사후에 장남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은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1683년에 남용익(南龍翼)에게 부탁하여 1차 산정(刪定)과 서문을 받았고, 1686년에 추가로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을 받아 놓았다. 이후 1697년에 김창협(金昌協)에게 부탁하여 다시 교정을 받은 후 발문(跋文)도 받아 두었다. 이 원고를 홍만선이 1709년에 의성(義城)에서 6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저자의 둘째 아들 홍만적(洪萬迪)의 문집인 『임호유고(臨湖遺稿)』도 부집(附集)하여 간행되었다. 『임호유고』의 권말(卷末)에 ‘기축계춘의성개간(己丑季春義城開刊)’이라는 간기(刊記)가 기재되어 있어 1709년(숙종 35)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이 1686년에 지은 서문과 과 1683년에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서문이 있다.
권1∼5은 시 443수이다. 시는 문집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데, 시체(詩體)도 다양해 오언(五言)의 절구(絶句) · 율시(律詩) · 배율(排律) · 고시(古詩), 칠언(七言)의 절구 · 율시 · 배율 · 고시와 잡체시(雜體詩) · 건제체(建除體) · 팔음체(八音體) · 옥련환체(玉連環體) · 회문(回文) · 집구(集句) 등이 있다. 또한 시제(詩題)에 일언(一言)에서 십언(十言)까지 이어지는 연작(連作)도 있어 시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감적인 자료이다. 시격(詩格)도 청선직(淸選職)에 드나들며 30여 번의 장원시가 있을 정도로 높다.
또한 주로 증별(贈別)이나 수창(酬唱) 등의 교유시, 차운시, 만시(挽詩), 일상에서 느낀 개인적 감회를 읊은 시, 행로(行路) 중의 경물이나 감회를 읊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유시에는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오탄(梧灘) 심유(沈攸)와 주고받은 시가 특히 많으며, 차운시에서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를 차운한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행로 중에 읊은 시에는 행주(杏州)나 북도(北道)의 경물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은데, 이 작품들은 저자가 고양(高陽)으로 정배(定配)되었을 때와 함경북도 평사, 안변(安邊) 부사가 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권6은 「응제록(應製錄)」 11편, 「월과(月課)」 7편이 있다. 「응제록」에는 불윤비답(不允批答) · 교서(敎書) · 사제문(賜祭文) · 기우제문(祈雨祭文) · 진향제문(進香祭文) · 하전(賀箋) 등이 실려 있다. 「월과」는 반중(泮中) 또는 환로(宦路)에서 지은 것들로 거수(居首)한 작품도 있다. 이 밖에 「분산도기」는 서종태(徐宗泰)가 저자의 묘소가 위치한 산천의 형세를 그리고, 오행(五行)에 따라 그 방위를 적어 놓고 그 아래 지리설에 의해 설명을 붙인 것이다.
권말에 김창협(金昌協)이 1697년에 지은 발문이 있다.
부록으로 행장(行狀) · 묘갈명 · 묘지명 · 묘표 · 분산도기(墳山圖記) 등이 수록되어 있고, 끝에 저자의 둘째 아들 홍만적(洪萬迪)의 『임호유고(臨湖遺稿)』가 합본되어 있다. 묘갈명은 송시열, 묘지명은 남구만(南九萬), 묘표는 박세당(朴世堂), 행장은 조지겸(趙持謙)이 지은 것으로 저자의 명망을 짐작하게 한다. 『임호유고』에는 김창흡(金昌翕)이 1709년에 지은 서문이 있고 시(詩)가 시체별로 총 83제(題)가 수록되어 있고, 잡저(雜著)는 문체별로 각 1편씩 총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는 대체로 유약하고, 매끄럽지 않다. 잡저의 「무린우서(無隣友書)」는 벗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글이다.
『임호유고』 끝에 ‘기축계춘 의성개간(己丑季春 義城開刊)’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