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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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조선시대에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병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병영촌.
이칭
이칭
병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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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병마절도사가 주둔한 병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병영촌.
개설

병마 절도사영은 보통 내상(內廂)이라고 불렸다. 병영은 그 약칭으로서 병사가 담당하는 여러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품관인 우후(虞侯)·평사(評事)·구전군관(口傳軍官) 등을 두었고, 그 밖에 아전과 노비·공장(工匠) 및 유방군(留防軍)이 있었다.

병영 밑에는 여러 진이 있었는데, 진영(鎭營)에는 그 크기에 따라 절제사·첨절제사·동첨절제사·만호 등의 군직을 두었다. 대부분 수령들이 겸하고 있었으며, 평안도·함경도의 국경 지대와 해안의 요지에 한해서만 전문적인 무직(武職)으로서의 첨절제사가 배치되었다.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의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경기도·강원도에 각각 1원(員), 경상도·함경도에 각 3원, 기타의 도에는 각 2원을 두었다.

한편, 병영촌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백제의 금강변에 다수의 병영촌이 존재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 취락은 현재 동족촌을 형성하기도 한다.

내용

조선시대에 각 도의 국방상의 요지에 각각 하나씩의 병영을 두었으나, 영안도(永安道)와 경상도에는 여진과 왜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병영을 둘씩 두었다. 대표적인 병영취락의 예로는 울산광역시의 병영이 있다.

울산시 병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의 소재지였는데 울산군의 치소로서 석성을 축조하고 군창을 설치하였으며, 동계루(董戒樓)·선위각(宣威閣)·조련고(組練庫) 등도 축조하였다. 처음에는 경주 동남방에 있었는데, 조선 태종 때에 울산의 치소로 옮겼다. 울산은 일본에 대한 군사 및 국방의 요새로서, 조선시대에 부근의 좌도 수군절도사영·염포영(鹽浦營)·서생포영(西生浦營)과 같은 여러 영이 있어 근해를 방어하였다. 울산 병영성은 조선시대에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연해지역의 방어시설 정비계획에 의해 적대·옹성·해자 등의 시설이 보완되었다.

병영 취락은 산지·구릉 등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고, 그 주위에는 작은 취락이 발달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지방의 핵심 취락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발생적 취락은 아니고 그 대부분은 계획적으로 건설한 취락으로서, 일부 병영 취락은 병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농촌 인구를 끌어들여, 군사상으로 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중심 도시로 발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촌락지리학』(홍경희, 법문사, 1985)
「읍성형 문화재의 입지특성 보존에 관한 연구」(남하영, 울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근·현대 민촌의 사회공간적 성격과 영역성」(전종한, 『대한지리학회지』40(6), 2005)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오종록,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朝鮮の聚落-前篇-』(善生永助, 朝鮮總督府, 1933)
집필자
홍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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