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의한(李宜翰, 16921766)의 자는 계응(季鷹), 호는 자운(紫雲) · 일화재(一和齋),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외삼촌으로부터 글공부를 시작했고, 자라서는 사서삼경과 사서(史書),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을 두루 익혔다. 19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으로부터 수학하며 과거 공부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9세부터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편자는 저자의 9세손 이종덕(李鍾德)이다.
6권 3책, 목활자본이다. 벽진이씨대종회에 있다.
1960년 이종덕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정기(李貞基)의 서문이, 권말에 이종덕의 발문이 있다. 1996년 경인문화사에서 한국역대문집총서 No.1616 『자운선생문집』으로 재간행했다.
권1·2에 시 69수, 소(疏) 1편, 서(書) 32편, 권3에 표(表) 1편, 책(策) 2편, 잡저(雜著) 4편, 권4에 서(序) 5편, 기(記) 6편, 발(跋) 3편, 권5에 상량문(上樑文) 5편, 축문(祝文) 11편, 제문(祭文) 15편, 권6에 뇌문(誄文) · 애사 · 비명 · 묘갈명 각 1편, 행장(行狀) 2편, 부록으로 행장 · 묘갈명 · 만장 · 제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많지 않으나, 저자의 생활상과 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과단월역억임장군(過團月驛憶林將軍)」은 임경업(林慶業)의 사당이 있는 단월역을 지나면서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친 충신의 넋을 추모하며 무상한 세상사를 탄식한 내용이다. 「화권정랑일보만소차근사록권면운(和權正郞一甫萬所次近思錄卷面韻)」은 권두경(權斗經)의 시에 저자의 벗 권만(權萬)이 차운한 시를 저자가 다시 『근사록(近思錄)』을 소재로 읊은 것으로, 저자가 『근사록』을 심도 있게 읽었음을 알 수 있다. 「회산원(檜山院)」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기상이 남은 곳이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정신이 깃든 곳이 바로 회산원이라는 내용이다. 「경차미노선생팔자전(敬次眉老先生八字篆)」은 저자가 미수 허목이 병풍에 소전(小篆)으로 ‘좌우매죽교영금서(左右梅竹交映琴書)’ 8자를 남긴 것을 보고 시를 지어 미수를 흠모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시를 통해 저자의 학문이 한강과 미수를 이어서 내려온 근기실학에서 연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의 「상눌옹선생(上訥翁先生)」은 저자의 스승 이광정에게 보낸 편지로 과거 공부할 때 아껴주던 모습을 회상하며 지금도 다시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자신의 벗 권만에게 두 편의 「여권일보(與權一甫)」를 보냈다. 한 편은 수십 년을 궁벽한 곳에 살다 보니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어 학문에 진전이 없음을 토로하며 권만을 찾아가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내용이고, 다른 한 편은 자운 외에 저자가 호로 삼은 ‘일화재(一和齋)’에서 ‘화(和)’자를 쓴 이유는 저자가 평생 배우고자 하는 뜻이 화(和)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 「답대산이상정(答大山李象靖)」은 이상정이 저자를 조정에 추천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 데 대하여 답한 것이다. 그밖에는 김성탁(金聖鐸), 최흥원(崔興遠)과 최흥점(崔興漸)과 최흥건(崔興建) 형제를 비롯해 지인들과 주고받은 것이 있는데 대부분 학문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소의 「청수삼척선묘소(請修三陟先墓疏)」는 삼척 지방에 산재해 있는 왕실의 선대 묘소가 관리 소홀로 퇴락해 왕가의 위신을 손상시킨다고 지적하면서 보수할 것을 청한 것이다.
책은 과거장에서 답한 대책문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및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에 천지이수가 모두 설명되어 있다고 해설하고, 하늘이 인간에게 가르침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성인(聖人)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나타내며, 성인은 이것을 연구하고 발명하여 하늘의 뜻을 바르게 시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중 「심경책(心經策)」은 심성(心性)의 학문에 대한 의견을 진술한 것이다.
잡저는 관찰사에게 이로(李魯)와 이만승(李曼勝)을 포창해줄 것을 청하는 「청포계이송암이괴당양공정방백장(請褒啓李松庵李槐堂兩公呈方伯狀)」, 이태빈(李泰彬)을 포창해줄 것을 청하는 「청포계이공태빈정뱅박장(請褒啓李公(泰彬)呈方伯狀)」 등 밀양 지역 출신 인물들의 행적이 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포창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서의 「치재집서(恥齋集序)」는 저자의 벗 조선적(曺善迪)의 문집에 대한 것이다. 「언지첩서(言志帖序)」는 정치 · 경제 · 언론 · 학문 등 광범위한 내용이 다루어져 있다.
기의 「밀주균부청중창기(密州均賦廳重刱記)」는 1751년(영조 27) 밀양부사로 부임한 이덕현(李德顯)이 밀양 지역 세금 거두는 일을 담당하는 서역소(書役所) 건물이 퇴락한 것을 보고 새로 짓고 이름을 균부청(均賦廳)으로 삼은 일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그밖에 적계전사(積溪田舍), 금시당(今是堂) 중수기 등이 있다.
발의 「서격재손공행적발(書格齋孫公行蹟跋)」은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던 여섯 명이 죽임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는데, 조정에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하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 대한 발문이다.
상량문의 「향사당중수상량문(鄕社堂重修上梁文)」은 1764년(영조 40)경 고을 풍속을 바로잡고 고을 아전을 감찰하는 역할을 하던 밀양의 향사당을 중수한 연원을 기록한 것이다.
축문의 「점필재김선생묘도개수후고제문(대)(佔畢齋金先生墓道改修後告祭文(代))」는 김종직(金宗直)의 묘도를 개수하고 고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쓴 것이다.
제문은 외숙(外叔) 권공(權公), 장인(丈人) 도만추(都萬秋) 등 친인척을 제한 것, 벗 권일보 등을 제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부록은 이동급(李東汲)의 행장, 권상규(權相圭)의 묘갈명, 삼종손(三從孫) 이홍의(李弘毅)의 만장, 이홍의의 제문이 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평생 학문에 심혈을 기울인 유학자의 문집으로, 저자의 학문이 한강과 미수를 이어서 내려온 근기실학의 맥을 이은 사실과 저자가 활동한 밀양 주변에 건립되거나 중수된 건물들에 대한 연원 및 밀양 출신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