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거제는 천거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개인의 덕행이나 학문적·정치적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중앙귀족과 명문세가에 대항하여 왕권을 지지할 새로운 관료를 확보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 급제자를 대상으로 현직을 제수하거나 고급 관직으로 승진시키는 등 과거제를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학행과 효행이 뛰어나거나 학업 성적이 우수한 성균관 유생을 등용하여 과거로는 발탁할 수 없는 인재를 등용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산림을 특별히 우대하여 산림만 진출하는 관직을 신설하여 운영하였다.
관리천거의 관행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일성이사금대(逸聖尼師今代) 이후 3차의 천거 칙령이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본기에도 태조대왕(太祖大王) 때 현량(賢良) · 효순(孝順)을 천거하라는 왕의 칙령을 전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본기에 을파소(乙巴素) · 달가(達賈) · 고노자(高奴子) 등 3인이 천거되는 과정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3건의 기사 가운데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① 외침 등 국난이 있을 때 왕이 신하들에게 현량 또는 현자를 천거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② 피천거자가 모두 승진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일약 고급관직에 제수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후대의 천거제에서 볼 수 있듯이 천거제도의 특질과 같은 것이다.
천거제가 활발하게 운영된 시기는 고려시대였다.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 서문에서 고려의 관리등용방법에는 “과거 이외에도 유일지천(遺逸之薦)과 문음지서(門蔭之敍) · 성중애마(成衆愛馬) · 남반잡로(南班雜路) 등이 있었다.”라고 했는데, 유일지천은 곧 천거제를 가리킨다. 또한 선거지에는 천거제의 조목이 있으며, 992년(성종 11) 정월부터 1391년(공양왕 3) 11월까지 모두 15회의 시행교령이 기재되어 있다. 교령의 내용에서 천거제 시행의 정신, 즉 고려국가측의 시행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그 제도적 형태의 윤곽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고려 천거제의 정신은 재야현인(在野賢人)의 등용에 있었다. 992년의 교령에서 “현인을 임용하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다.”라고 했고, 1168년(의종 22)의 칙령에서는 “근래에 천거의 길이 끊어져 현인과 불초인이 구별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1361년(공민왕 10) 이후부터는 천거대상자를 가리켜 ‘현량’이라 하였다. 현(賢)의 뜻은 문무(文武)의 재능과 청백(淸白) · 수절(守節) · 효렴(孝廉) · 방정(方正) 등의 덕행을 가리킨다.
고려 천거제의 특징은 ① 시행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가 정규적으로 실시되었는 데 반해 천거제는 비정규적으로 운영되었다. ② 천거자의 범위가 매우 다양하였다. 중국의 경우, 주로 공경(公卿) · 왕후(王侯) · 군태수(郡太守) 등에게만 구현조칙이 내려졌는데, 고려에서는 양부재추(兩府宰樞) · 대성(臺省) · 육조(六曹) · 종실(宗室) 및 시종관(侍從官) · 지제고(知制誥) · 유수관(留守官) 등과 경관(京官) 5품 이상과 소재관(所在官) · 안렴사(按廉使) 등 광범위한 관료층과 지방의 기로(耆老)까지 천거자격자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천(自薦)까지도 허락되었음은 매우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③ 국왕의 책문(策問)과 피천거자의 대책(對策)이라는 과정이 없다. 중국의 경우, 구현(求賢)이 큰 책사(策士)라 할 정도로 책시(策試)의 과정은 천거제의 핵심적 요소로 간주되었지만, 고려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 까닭의 하나는 아마도 당시 병행해 시행되고 있던 과거의 시험과목 가운데 책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고려 천거제의 독특한 존재의미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려 천거제의 존재의미에 대한 이해의 단서는 천거대상자의 정치 · 사회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종은 고려 초 최초의 구현조칙에서 고대의 성왕들이 미천한 신분의 현인들을 궁색한 은일처에서 일으켰음을 강조했고, 16년에는 ‘구원(丘園)에 은거한 자’를 수방(搜訪)해 알리라고 명하였다. 충선왕도 ‘암곡(巖谷)에 퇴거해 있는 자’에 한해 그 소재관이 천거하도록 했고, 충숙왕 역시 ‘미천해 알려지지 않은 자’를, 공민왕은 원년에 ‘산림향곡에 있는 고절(苦節)의 선비’를, 5년에는 ‘숨어서 사환(仕宦)하지 않는 자’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즉, 고려의 구현교령은 한결같이 향리에 은거해 등사하지 못한 유일지사(遺逸之士)를 대상으로 했으니, 천거제도를 유일지천(遺逸之薦)이라 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역대의 구현교령에서 가문이 빈한하고 미세한 자를 강조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충선왕은 즉위교령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세가자제(世家子弟)만을 쓸 필요는 없다.”라고 강조한 바 있으니, 왕권측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세가의 자제들이 아니라 가문이 한미한 자들이었다.
성종은 992년 자천을 허락하면서 ‘현(賢)과 능(能)을 엄폐하고 방해’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이는 곧 구현의 대상자들이 세가의 자제들과 달리 유력자의 추천을 받을만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고려조에서는 중앙귀족 또는 지방호족으로 대표되는 명문세가의 지배력에 대항할 새로운 성격의 관료층이 요구되었다. 이들 사인층(士人層)은 문학적 · 정치적 능력과 덕행을 갖추었으나, 빈한한 가문의 출신이어서 당시 지배적 등사로(登仕路)였던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왕권측은 이들에게 새로운 사환(仕宦)의 길을 마련함으로써 왕권지지 기반으로서의 관료층을 확보하려 했으니, 그것이 곧 유일지천이라 불린 천거제였다.
그러나 천거제의 이러한 정신이 그대로 실현되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천거제에 의해 선발된 인물들의 사회적 배경과 등사과정을 보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기재된 16인의 피선거인 중에는 상당수의 명문출신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천거되기 전에 이미 과거에 등제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보아 천거제의 실질적인 기능은 그 정신과는 달리 과거에 합격한 하급관료를 보다 상급관직으로 승직시키거나, 과거에 합격해도 현직을 제수받지 못한 자를 입사하게 하는 등 과거제의 보완적 기능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제는 원래 음서 등 귀족제적인 등용체제에 대항하는 존재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고려시대의 과거제는 귀족계층이 관료기구를 독점하는 또 하나의 진입로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과거제의 보완적인 기능을 담당한 고려의 천거제 역시 본래의 정신과 같이 귀족체제에 대항하는 존재의미만을 갖고 있었다고 규정짓기는 어렵다. 천거제의 이러한 변질은 아마도 고려사회의 독특한 상황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의 천거제는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것이다. 중국의 천거제는 한대, 특히 서한(西漢) 전기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천거제가 중국에서 처음 시행되었을 때의 존재의미는 당시 관료기구를 독점하고 있던 공신집단 또는 호족세력에 대신해 개인의 문학적 · 정치적 능력만을 소지한 새로운 성격의 관료층을 확보함으로써 황제권력의 지지기반을 확고하게 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천거제에 내재한 본래의 제도적 정신은 음서와 같은 귀족제적 관리등용방법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천거제를 도입하면서 고려의 특수한 상황과 모순되지 않도록 천거제의 기능을 다소 변질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과거제가 중국으로부터 수용되면서 고려의 귀족사회와 조화될 수 있도록 고유한 기능을 바꾸었던 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고려의 천거제가 시행과정에서 본래의 정신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천거제는 처음부터 왕권확립을 방해하는 세가출신의 독점물인 음서 등 기존의 취사(取士) 방도의 차원을 극복하고, 왕권과 보다 밀접하게 결합할 수 있는 세력 없고 빈한한 은일지사(隱逸之士)들을 국왕의 교령으로 직접 발탁함으로써 새로운 관료층을 확보하려는 왕권측의 적극적인 의지를 전제하고 있었다. 또한 실제의 시행과정에서 비록 상당수의 명문세가 출신자가 피선거인에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보다 많은 인물들이 무명의 빈한한 가문으로부터 선발되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고려 천거제의 구체적 기능이 비록 과거에 이미 급제한 관리를 승진시키거나 과거에 급제는 해도 현직을 제수받지 못한 자를 입사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이 역시 천거제 본래의 정신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직을 제수받지 못하거나 하급관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곧 정치적 · 사회적 배경이 미약함을 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천거제를 통해 이들에게 현직을 제수하거나 고급 관직으로 승진시키는 일은 곧 명문세족에 의한 관료기구의 독점화를 견제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천거제가 과거 급제자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은 역시 고려 천거제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시의 과거가 귀족적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면, 천거제는 실제에 있어 귀족세력 내지 귀족권에의 참여자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 천거제의 한계성은 본래의 구현정신이 실현과정에서 완강한 신분제적 현실에 의해 견제된 데 연유한다. 또한 과거제라는-표면적으로는 구현 본래의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귀족제적 현실과 보다 정밀하게 타협된-새로운 취사제도가 이미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천거제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저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 천거제의 존재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고려 4백여 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과거제의 기능을 보완하면서 귀족제사회로부터 관료제사회로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에 적지 않은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천거제의 운용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왕조에서는 개국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고, 여기에 중국 원 · 명의 제도를 참용(參用)해 천거제를 확립하였다. 조선왕조의 천거제는 초입사로(初入仕路)인 유일천거제(遺逸薦擧制) · 효행천거제(孝行薦擧制) · 성균관공천제(成均館公薦制)와 승진 · 전보로인 보거제로 나눌 수 있다. 유일천거제는 학행이 뛰어난 유일지사를, 효행천거제는 효행이 뛰어난 효자 · 순손(順孫)을, 성균관공천제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성균관 유생을 천거해 등용하는 제도였다.
① 유일천거제는 국왕의 교령(敎令)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대개 피천자의 인원과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고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25회의 천거교령(薦擧敎令)이 내려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빈번한 천거교령의 하달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유일천거제의 시행이 부진해 이것을 통해 입사(入仕)한 자는 20여 명 정도에 그쳐, 유일천거제가 확고하게 정착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② 효행천거제는 개국 직후부터 제도화하여 시행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된 자들에게는 상직(賞職) · 상물(賞物) · 정문(旌門) · 복호(復戶)로 포상토록 규정되어 있었다. 초기에 상직을 받은 자들은 효행으로 천거된 자들의 절반가량인 13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는 사인(士人)의 경우 무직자(無職者)에게는 종9품직을 제수하고, 유직자(有職者)에게는 일계(一階)를 가자(加資)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효행천거제는 유일천거제와 함께 초입사로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③ 조선 초기의 성균관공천제는 시행이 매우 부진해 이것을 통해 등용된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④ 천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주(擧主)의 연좌(緣坐)를 전제로 한 보증천거제(保證薦擧制) 즉, 보거제(保擧制)는 현직관리의 승진(陞進) · 전보로(轉補路)로서의 기능을 위주로 했으나, 초입사로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私情)이나 청탁이 개입되어 불공정의 문제를 빈번하게 야기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거주연좌제(擧主緣坐制) 역시 대부분의 거주들이 고관(高官)이었던 관계로 본래의 취지에서 빗나가는 사례가 빈발하였다.
중종(中宗)대에 접어들면서 부진하던 천거제의 시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관리등용상에서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파(士林派)는 자파(自派)의 인물들을 정계에 대거 진출시켜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거제를 활용하였다. 1515년(중종 10)부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하는 1519년(중종 14) 사이에 천거제의 시행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다수의 사림파 인사들이 등용되었다. 기묘사화 직전까지 대략 1백명 이상이 천거되어,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인 31명이 입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입사자들은 과반수 정도가 곧바로 참상직(參上職)에 진출하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으며, 유례없는 급속한 승진을 거듭했다.
이른바 조광조 일파는 천거를 통해 자파를 정계에 진출시킴으로써 세력강화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으며, 다시 천거과를 강행해 더욱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조성하려고 시도하였다. 천거과는 종래에 현량과라고도 불리워졌지만, 이 현량과라는 명칭이 기묘사화 직후 훈구파에 의해 악의적으로 붙여졌고, 실시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천거과라 칭해졌음을 감안할 때 이를 천거과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조광조 일파가 천거과를 실시한 목적은 급제자들에게 문과급제자와 동등한 자격을 주어 청요직(淸要職)에 진출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1519년 4월 10일에 대책이 치루어지고, 이어 14일에 김식(金湜)을 장원으로 한 28명의 급제자가 확정되었다. 이러한 천거제와 더불어 무과도 실시되어 46명의 무사(武士)를 선발하였다. 이들 천거과 급제자들에게는 파격적인 특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즉 유사(儒士)로서 급제한 16명 중 11명이 권지(權知)에 분차(分差)되는 관례를 깨고 실직(實職)에 즉서(卽敍)됨과 아울러 6품직 등에 초서(超敍)되었다. 동시에 조관자(朝官者)로서 급제한 자들에게도 이례적인 초서가 배풀어졌다. 또한 이들이 진출한 관서(官署)도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 예문관 · 성균관 · 육조 등의 청요직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이 사림파에 의해 활발히 시행되었던 천거제는 기묘사화 직후 한때 침체되었다. 그러나 사림파가 재등장하는 중종 말기부터 다시 활기를 띠어 명종대와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 처럼 천거제의 소장(消長)은 사림파의 그것과 맥을 같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로서 향촌에 은거하고 있던 성수침(成守琛) · 조식(曺植) · 성운(成運) 등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인재들이 유일로 천거되어 입사하였다. 또한 효행자(孝行者)에 대한 천거도 활성화되어 다수가 상직(賞職)을 받았다. 이 밖에 효행자 · 충신(忠臣) · 열녀(烈女) · 전망인(戰亡人) · 청백리(淸白吏)의 자손들에 대한 포상도 활발해 다수의 자손들이 입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천거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3년마다 일정 인원을 정적으로 천거토록 하는 향천법(鄕薦法)과 국왕의 교령에 의해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별천법(別薦法)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러한 천거제를 통해 재야의 산림이 대거 진출함으로써 천거제의 비중이 전기에 비해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산림(山林)이 천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의 일이었으나,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명종(明宗)대부터였다. 전기에 진출한 산림들은 정계에서의 활약이 미약해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산림의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들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최초의 산림은 선조(宣祖)대에 천거를 통해 입사한 후 광해군대에 대북(大北)의 영수(領袖)로서 정계를 주도했던 정인홍(鄭仁弘)이었다고 하겠다.
이 후 산림은 조정의 적극적인 징소정책(徵召政策)에 의해 정계에 대거 진출, 적극적인 활약을 보이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산림을 특별히 우대해 등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산림만이 진출할 수 있는 이른바 산림직(山林職)을 신설, 운영하였다. 산림직은 성균관의 좨주(祭酒) · 사업(司業)과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 · 진선(進善) · 자의(諮議)를 말한다.
산림들은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을 필두로 산림직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산림직에의 진출은 인조대부터 조선 말기인 고종대까지 꾸준히 이루어져, 인원은 대체로 좨주 24명, 사업 21명, 찬선 28명, 진선 33명, 자의 34명으로서 연인원은 140명에 이르고 있다.
산림은 산림직 외에 사헌부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천거를 통해 입사한 후 대관(臺官)을 역임한 자를 남행대관(南行臺官)이라는 의미의 남대(南臺)라고 불렀는데, 조선 후기의 남대는 120명 정도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림은 이 밖에도 경연관(經筵官) · 서연관(書筵官) · 세자 보양관(世子輔養官) · 육조(六曹) 등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 산림은 이와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진출해 국왕과 세자의 보필, 유생의 교육, 언론, 실무행정 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감으로써 과거출신관료들을 제치고 조선 후기 정계의 중심적 존재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표적 산림으로는 광해군대의 정인홍, 효종∼ 숙종대 송시열 · 송준길, 숙종대의 윤휴(尹鑴) · 허목(許穆)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각 당파의 영수로서 당쟁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자기 당파를 선두에서 이끌었기에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천거를 통해 등용된 자들의 관력(官歷)을 보면, 초직(初職)으로 종9품 참봉(參奉)에 임명된 자가 가장 많았으나, 입사자의 5분의 1정도가 그 후 당상관(堂上官)까지 진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비율은 문과급제자와 유사한 것으로서 피천자(被薦者)들이 크게 우대받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피천자들은 외관(外官) · 육조 속아문(屬衙門) · 사헌부 등에서 주로 활동했고, 특히 후기에는 사업 · 좨주 등의 산림직에 활발히 진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조선시대 천거를 통해 초입사한 자들은 관직의 제수만을 기준으로 할 때 문과급제자들과 거의 대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천거제의 위상이 과거제에 못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시대 천거제도의 정치 · 사회적인 의의는 ① 천거제는 관리등용에 있어서 과거제 · 문음제(門蔭制)와 함께 중요한 초임사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밖에도 현직관리의 승진 · 전보로와 전직관리의 복직로(復職路)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② 천거제는 과거를 기피한 채 은거하고 있는 재행(才行)을 겸비한 유일 또는 산림, 여러번 과거에 낙방한 누거부중자(累擧不中者), 효행자 등 과거로는 발탁할 수 없는 인재를 등용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과거제의 보완적 역할도 담당하였다.
③ 천거제는 과거제의 모순이나 한계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으로서 부각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과거제 시행이 극히 문란해지자, 실학자들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천거제를 전면적 실시하자는 천거제론이나, 천거제와 과거제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는 과천병용론(科薦倂用論) 등을 제시했던 것이다. ④ 천거제는 지방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유일 또는 산림을 회유, 포섭하고, 학행(學行)이나 효행(孝行)이 탁월한 자들을 등용케 함으로써 정권안정 · 민심수습 · 유교윤리보급 · 풍속교화 · 학문장려 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