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는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여 조상신으로 승화시키고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일생 의례로 통과 의례, 죽음 의례이다. 유적으로 보듯 상례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융화되었지만, 고려 말부터 유교식 상례가 문화적 전통으로 정립되었다. 유교식 상례는 중국의 문화였지만 우리에게 맞게 변형하여 고유문화로 전승되었다. 상례는 고인, 영혼, 조상신, 상주라는 네 주체의 의례가 상호작용하면서 3년간 진행된다. 여운으로 가장의 죽음이 가져오는 충격을 극복하고 가족의 상실에 따른 아쉬움과 슬픔을 완화했다.
상례는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의례이자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의례이기에 일생의 마지막 의례이면서 새로운 시작 의례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고, 혼례로 가정을 이루고, 노인으로 부양을 받다가 죽음에 이르는데, 이를 처리하는 의례가 상례이다. 국가의 이념과 종교, 민족에 따라 상례의 개념과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고려 말에 유입된 『가례(家禮)』가 규정한 유교식 관혼상제(冠婚喪祭)가 한국의 일생 의례로 자리잡으면서 상례 역시 유교식 상례가 문화적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한국의 상례는 역사적으로 고유문화, 신앙 민속,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외래 요소들이 융화되어 있다.
유교식 상례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기(氣)가 사라진다고 여기는 현세 중심적인 유교식 생사관에 기반한다. 그래서 고인의 체백(體魄)은 매장하고, 영혼은 조상신으로 승화시켜 사당에 모시고 사대봉사(四代奉祀)의 기한이 다하면 사라진다고 여겼다. 그러나 신앙 민속에서는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하고, 불교와 기독교 등에서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고 있어 생사관에 차이가 있다.
이기론(理氣論)에 기반한 사후 세계와 귀신에 대한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상례에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요소들이 융화되어 있다. 초혼(招魂)으로 혼백을 돌아오게 하여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인을 저승길로 안내한다고 믿는 저승사자를 대접하는 사잣밥을 차린다. 저승사자, 봉황, 용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상여에도 신앙 민속과 불교, 도교의 세계관과 생사관이 녹아 있다. 상여가 움직일 때는 반드시 “저승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라는 상엿소리가 등장한다. 매장을 할 때 좋은 흙은 덮어야 한다는 신앙 민속에 따라 ‘취토(取土)’를 하고, 회다지를 할 때 ‘회다지 소리’를 하면서 다양한 사상을 끌어들인다. 장지를 잡을 때도 풍수(風水)에 따라 명당(明堂)을 찾고, 사주(四柱)에 따라 좌향을 잡는다. 또한 매장할 때 관을 제거하고 시신만 매장하기도 하는가 하면 초분(草墳)이라는 복차장(復次葬)을 하기도 하였다. 무당에게 상례와 조상 제사를 맡기는 위호(衛護)가 성행하기도 하였고, 여말선초부터는 향도(香徒)가 지역 사회의 상례를 전담하면서 노래와 춤으로 상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들 향도는 조선 후기 마을 단위에서 집단으로 상례를 치르는 상두계 혹은 상여계로 발전하는 문화를 탄생시켰다.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해 시신을 되도록 빨리 처리하여 이승과 분리하려는 생사관이다. 불의 정화 기능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시신을 처리해 버리는 화장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조상 숭배의 과정으로 인식하여 상례 기간을 길게 하는 생사관이다. 달을 넘겨 장사(葬事)하는 유월장(踰月葬), 삼년상을 원칙으로 하는 유교식 상례가 그렇다.
상례는 초종의에서 급묘까지 고인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사와 우제부터 길제까지 슬픔과 충격을 완화하고, 고인을 조상신으로 승화시켜 가계의 계승을 정상화하는 상제(祥祭) 혹은 흉제(凶祭)로 구성되어 있다. 조상신의 승화와 상주의 가계 계승 과정이 가져오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삼년상이 필요했다.
한국의 상례에는 고인, 영혼, 조상신, 상주라는 네 주체가 등장하고, 이들을 위한 네 의례로 구조화되어 있다. 첫째는 ‘고인을 위한 의례’로, 상례 초반부에 등장하는 시신 처리를 위한 의례이다. 둘째는 ‘영혼을 위한 의례’로, 고인을 조상신으로 승화시키는 전 단계인 영혼과 관련된 의례이다. 셋째는 ‘조상신을 위한 의례’로, 시신을 매장한 후 고인을 완전한 조상신으로 승화시키는 의례이다. 넷째는 ‘상주와 그의 공동체를 위한 의례’로, 고인의 상례를 주관하는 상주에서 새로운 가계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의례이다. 이 네 주체의 의례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3년간에 걸친 대서사시를 이룬다.
흔히 상례는 효의 실천이라는 철학적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례는 가장(家長)의 상실로 나타나는 위기를 극복하는 산 사람을 위한 의례로 해석된다. 위기 극복의 표현은 여운(餘韻)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3’으로 표현된 여운이다. 영혼을 불러오는 초혼(招魂)을 할 때는 반드시 세 번 불러야 이승을 떠나던 혼이 돌아오고, 고인의 시신은 3일에 걸쳐 위생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3일이 지나야 성복을 함으로써 상주가 되어 비로소 고인의 죽음을 인정하고, 세 단계의 우제를 지내야 비로소 고인은 조상신으로 승화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반복과 추가’의 여운이다. 소상으로는 부족하여 다시 대상을 지내야 하고, 다시 미더워 담제와 길제를 지내야 비로소 조상신으로 완성되고, 상주는 가계의 계승자로서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상례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운은 가장의 죽음을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고인이 조상신이 되는 것을 점차 인정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이처럼 여운은 추가와 반복이라는 점차적인 시간의 연장으로 가족 성원의 죽음이 가져오는 충격을 완화하는 위기 극복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죽음을 처리하는 의례인 상례는 완전한 의례의 형태는 아니지만, 인류의 시작과 동시에 존재했었다. 선사시대부터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 땅에 묻는 매장, 풀을 두껍게 덮어 들에 버리는 유기장 등 장례 방법이 있었다. 이러한 장법의 결과 고인돌, 고분 등이 유물로 남아 있다.
고대에는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 간다는 민속 종교 등의 상례와 단편적이지만 유교식 상례의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면, 동옥저(東沃沮)에서는 육탈 후 뼈를 안치하고, 생시와 같이 목상을 세웠다. 부여(夫餘)에서는 순장을 하였고, 장사 기간을 길게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풍악을 울려 장사를 지냈고, 장사에 많은 재물을 쓰기를 좋아했다. 진한과 마한에서는 큰 새의 깃으로 장사를 지내고, 장사에 가축을 사용하였다. 예(濊)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새집을 지어 옮기는 등 민속 종교적 혹은 자연 철학적인 믿음에 기반한 상례가 있었다.
이 시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식 상례 역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부여에서는 초상이 나면 흰옷을 입고, 관은 사용하고 곽은 사용하지 않으며, 얼음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혼인하면 수의를 먼저 만들고, 초종에 곡읍(哭泣)하고, 부모는 3년, 형제는 3월 복을 입었다.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백제에서도 부모와 남편의 상에는 3년 복, 그 외에는 매장 후 상복을 벗었다. 신라에서는 염을 하고, 관에 넣어 봉분을 조성하였고, 왕과 부모, 처자의 상에 1년 복을 입었다.
3년간 임시 매장인 빈(殯)을 하였다가 정식으로 장사를 지낸 고구려 광개토대왕, 백제 무령왕의 상례는 전형적인 유교식 상례였다. 지증왕 3년(502)에는 순장을 금지하였고, 지증왕 5년(504년)에는 상복법을 제정하였다. 왕이나 왕자의 상례를 예로써 치르는 등 유교식 상례가 조금씩 유입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에서는 왕들을 중심으로 화장이 성행하였고, 문무왕의 유언에서 보듯 화장 후 산골(散骨)하거나, 뼈단지를 매장하였다. 승려들은 다비를 하는 등 불교식 화장도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사람이 운명하면 집이나 원찰(願刹)에 빈소를 마련하였고, 스님의 주관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날을 잡아 화장하였다.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하여, 길게는 6년간 절에 권안(權安)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한 후 장사를 지내는 불교식이 유행하였다. 고려는 불교와 함께 유교를 숭상하여 985년(성종 4) 오복제도(五服制度)를 정하고 오례(五禮)에 상례를 포함하였다. 왕실을 중심으로 삼일장을 금하고 13개월에 소상(小祥), 25개월에 대상(大祥), 27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유교식 상례를 받아들였다.
한편, 3년이란 기간이 길고 낯설어 달을 날로 바꾸어 계산하는 일역월제(日易月制)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 『주자전서(朱子全書)』와 함께 『가례(家禮)』가 들어오고 공양왕 때에는 불교식 다비를 금지하고 유교식 상례를 권장하였으나 일반화되지는 못하였다. 원찰과 유사한 형태로 집에 신사(神祠)를 세우고 이를 위호(衛護)라 하였다. 이는 무당에게 재물과 노비를 주고 조상의 신위를 맡겨 제사하는 등 상례와 제례를 무당에게 일임하는 문화도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위호를 설치하는 집이 많았는데, 불효라는 이유를 들어 위호를 경계하기도 한 기록에서 보듯이 유교식 상례도 공존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기가 되면 향도(香徒)가 상여를 메는 역할을 하였기에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상여꾼, 상두꾼 외에 상두꾼[香徒軍]이라는 상례 전문 집단이 생긴다. 이들은 조선 중기 향약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되지만, 상례 전담 역할은 지속된다. 이후 향도꾼은 마을 단위로 상두계, 상포계, 위친계, 향도계(香徒契) 등 이름은 달랐지만, 계(契)로 변화되었다. 상두계는 마을 주민으로 구성되는데, 상호 부조, 상여 조달, 상두꾼, 매장 등 상례 전반에 걸쳐 인적 물적 부조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가 되면 상례는 물론 모든 의례가 유교식으로 바뀐다. 주자의 『가례』에 근거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조선의 기본 의례로 삼았다. 7품 이하 과거 시험에 『가례』가 의무적으로 포함될 정도로 적극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경국대전(經國大典)』(1485)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모든 제도와 의례를 유교식으로 전환하는 데에 국가가 앞장선다.
조선 초기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국가가 사당(祠堂) 건립과 유교식 제사 등의 의례를 강요하였으나 불교식 의례 문화의 전통을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했다. 왕실은 물론 사대부들 역시 『가례』를 모방하는 정도였다. 16세기부터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가례』를 뛰어넘어 고례(古禮)를 연구하고, 조선의 사정에 적합한 예법에 관한 책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성리학자들이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의 재건에 큰 역할을 하면서 조선은 자연스럽게 유교 국가로 전환하였다. 상례 역시 유교식으로 일반화되어 유교식 상례가 한국의 문화적 전통으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예학(禮學)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해년(1659)과 갑인년(1674)에 있었던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상복에 대한 이론적 논쟁은 예송(禮訟)으로 발전할 정도로 깊이가 있었다.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개항과 함께 다양한 종교적 상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1900년에 개정한 『증보 사례편람(四禮便覽)』 부록에 ‘신식’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기독교식 상례’를 소개할 정도로 상례 역시 종교에 따라 다양화된다.
일제강점기가 되면 근대화와 신식 교육의 영향으로 의례 역시 ‘신식’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한다. 서구식 상례의 도입은 물론 일본식 화장이 행해졌으며, 천도교,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의례들이 유교식 전통과 함께 행해진다. 식민 통치자들은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단속 규칙」을 제정하여 매장을 단속하고, 화장을 권장하면서 상례는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게다가 가족 중심의 선영(先塋), 선산(先山)의 전통에서 공동묘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매장 공간도 등장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면서,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1934년 「의례준칙」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일제는 전통적인 상례는 고루하고 복잡하다고 규정하고, 상복의 변화, 상기(喪期)의 단축 등을 강제하면서 상례의 문화적 전통 역시 변화의 길을 걷는다. 1940년대 국민복을 제정하면서 일상복에 의례장(儀禮章)을 부착하여 의례복으로 간주하는 규정에 따라 나비장, 완장, 리본 등의 의례장 부착 문화가 생겨났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의 가정의례 간섭은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1969)에 근거한 「가정의례준칙」으로 재탄생된다. 조국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가정의례를 단속하였고, 전통 상례의 상징과 의미는 사라지고, 절차에 따른 형식만 남게 된다. 1999년 「가정의례준칙」을 폐지하고, 「건전 가정의례 준칙」으로 개정하였지만, 그 기능은 상실한 상태이다.
개인의 상례를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相助會社)에 의뢰하면서 전문 회사의 의례 대행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영향으로 상기의 단축, 상복의 다양화, 의례의 간소화 등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두드러진 장례(葬禮)라는 용어가 상례라는 용어를 대체한 것이다. 여기에 장례 전문화, 불교, 기독교 등 종교 장례가 활발해지면서 장례라는 용어가 일반화된다. 또한 도시 공동 주택의 주거 환경은 상례를 집이 아닌 장례식장에서 치르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가족이 아닌 대행업자가 상례를 대행하는 변화가 일어났으며, 장례 지도사라는 전문 직업이 탄생하였다. 이에 따라 상례의 절차는 장례식장 혹은 상조회사의 장례 지도사가 제시하는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복제에 따라 고인과의 관계를 엄격히 구분하였던 삼베 상복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양복과 양장, 심지어는 디자인 상복이 등장할 정도로 변화되었다.
장례를 치르는 기간 역시 삼년상에서 1년 탈상, 100일 탈상을 거쳐 요즘에는 3일 탈상으로 단축되어 삼일장이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현대의 상례는 고인의 죽음 처리에 집중되고, 조상신의 승화 과정은 생략되었다. 시대와 일상생활의 변화, 국토의 효율적 이용, 화장 운동의 영향으로 장법 역시 전통적인 매장은 자취를 감추고 화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화장터는 화장장으로 바뀌었고, 혐오하는 화장에서 선호하는 화장으로 변화되었다. 화장은 봉안당, 봉안묘, 수목장, 해양장 등 다양한 장법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일반화된 예서이자 편람인 『사례편람』과 『상례비요』에서 제시한 상례는 신주를 모시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19개 대절차로 진행된다. 대절차 안에 수많은 소절차가 포함되어 있고,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절차도 있어 모든 절차가 순차적이지는 않다.
초종의(初終儀): 죽음을 확인하고, 상례를 준비하는 최초 절차이다. 시신을 정침으로 옮기는 천거정침(遷居正寢), 영혼을 불러오는 복(復), 시신을 가지런히 하는 수시(收屍), 입상주(立喪主), 부고(訃告), 사잣밥을 차리는 소절차가 행해진다.
습(襲): 1일째 행하는 의례로 시신을 목욕시켜 수의를 입히는 시신 처리 절차이다. 목욕에 사용한 수건 등을 버릴 구덩이를 파는 굴감(掘坎)을 비롯하여 목욕을 시키고, 시신의 입에 쌀과 구슬을 넣는 반함(飯含), 혼백을 만들어 설치하고, 명정을 써서 세우는 입명정(立銘旌) 등의 소절차가 있다.
소렴(小斂): 2일째 행하는 의례로 시신을 천으로 싸서 묶는 절차이다. 소렴에 사용되는 옷을 준비하고, 상주가 한 쪽 어깨를 벗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묶고 소렴을 진행하는 소절차가 진행된다.
대렴(大斂): 3일째 행하는 의례로 소렴한 시신을 입관(入棺)하는 절차이다. 요즘은 목욕과 습, 소렴과 대렴을 한꺼번에 처리하며, 염습(斂襲)이라 한다.
성복(成服): 4일째 행하는 의례로, 상주가 상복(喪服)을 갈아입고 상주 역할을 정식으로 시작하는 절차이다. 성복 후부터 행하는 조석곡(朝哭夕), 무시곡(哭無時), 조석전(朝夕奠), 삭망전(朔望奠) 등의 소절차를 제시하였다.
조(弔): 조객으로부터 조문을 받는 절차로, 성복 후부터 하도록 하였지만, 요즘에는 구분이 없다.
문상(聞喪): 출타 중에 부고를 받았을 때 상주가 행하는 일로, 급히 집으로 뛰어가는 분상(奔喪)을 한다.
치장(治葬): 상여, 명기, 신주를 만들고, 장지(葬地)와 장사할 시간을 정하는 등 준비를 하는 절차이다. 광중(壙中)을 파고, 지석(誌石), 명기(明器), 삽(翣)과 신주를 만들고, 회격(灰隔) 준비를 한다.
천구(遷柩): 발인 하루 전날 영구를 옮길 것을 사당에 고하고, 다음 날 상여를 조립하고, 견전(遣奠)을 지내 고인의 체백(體魄)을 장지로 보낸다. 빈을 여는 계빈(啓殯), 영구를 옮겨 사당에 인사하는 조우조(朝于祖)를 행하고, 다음 날 아침 조전을 올리고, 상여에 영구를 싣고 이제 떠날 것을 고하는 견전(遣奠)을 올리는 소절차가 진행된다.
발인(發靷): 상여가 장지로 출발하는 절차이다. 요즘은 천구의 절차가 생략되고, 발인 전에 발인제(發靷祭)를 지내고, 중간에 노제(路祭)를 지낸다.
급묘(及墓):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는 절차로, 방상시(方相氏)가 광중(壙中)의 잡귀를 몰아내면, 시간에 맞추어 하관하고 봉분을 만들며, 신주에 글씨를 쓰는 제주(題主)를 한 후 제주전(題主奠)을 지내는 소절차가 행해진다.
반곡(反哭): 새로 만든 신주와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절차이다.
우제(虞祭): 시신을 떠나보낸 영혼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제사이다. 맏상주가 비로소 주인 역할을 하는 흉제(凶祭)로, 고인을 조상신으로 승화시키는 첫 번째 단계이다. 우제는 반곡 당일 초우, 재우, 삼우로 3번 지내는데, 각각 하루를 건너 지낸다.
졸곡(卒哭): 삼우제를 지낸 후 무시로 하는 곡을 그쳐 슬픔의 강도를 줄이는 의례이다.
부제(祔祭): 제주한 고인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게 되었음을 고하는 절차이다. 소목계서(昭穆繼序)의 원리에 따라 고인의 조부에게 지낸다. 신주를 모시지 않으면 필요 없는 제사이다.
소상(小祥): 1주기에 제사로 추모와 상주의 슬픔을 줄이는 절차이다. 연복(練服)으로 갈아입는 역복(易服)과 소상제가 소절차로 진행된다.
대상(大祥): 2주기에 지내는 제사로 빈소를 철거하여 탈상하는 절차이다. 소복으로 갈아입고, 대상제를 지낸 후 빈소인 영좌(靈座)를 철거한다.
담제(禫祭): 탈상 후 바로 일상으로 돌아가기 미안하여서 한 시절을 더 기다려 지내는 제사이다. 25~26개월경에 지내는데,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담제를 지낸다.
길제(吉祭): 상례의 마지막 절차로, 27개월쯤에 지내는데, 고인의 신주를 정식으로 사당에 모시고, 봉사 대수가 지난 신주를 처리하는 의례이다. 하루 전에 바뀐 봉사자에 맞게 신주의 대수를 고쳐 쓰는 개제(改題)를 하고, 다음날 모든 조상을 내모시고 길제를 지낸다. 길제를 지내면 상주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례』의 절차는 1. 초종, 2. 목욕 습 전 위위(僞位) 반함, 3. 영좌 혼백 명정, 4. 소렴 단 괄발 면 좌 전 대곡, 5. 대렴, 6. 성복, 7. 조석곡전 상식, 8. 조 전 부, 9. 문상 분상, 10. 치장, 11. 천구 조조 전부 진기 조전, 12. 견전, 13. 발인, 14. 급묘 하관 사후토 제목주 성분, 15. 반곡, 16. 우제, 17. 졸곡, 18. 부, 19. 소상, 20. 대상, 21. 담(禫)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례비요』 등에 비해 대절차의 짜임새가 약하고, 상례의 마지막 절차 인식에 차이가 있다. 신주를 모시지 않으면 습과 염의 절차가 통합되고, 신주와 관련된 천구나 부제, 길제 등의 대절차가 생략된다. 또한, 작주(作主) 또는 제주와 같은 소절차도 생략된다. 신주를 모시면 대렴을 하여야 죽음으로 인정하고 우제를 지내야 조상신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신주가 없을 때는 운명과 동시에 죽음으로 인정하고 성복하면 곧바로 조상신으로 인정하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무속의 진도다시래기, 씻김굿, 오구굿, 자리걷이, 불교의 49재 등은 그 자체가 독립적 상례로 기능하지 못하고, 유교식 상례 절차의 한 부분으로 융화되어 기능한다. 민속 신앙 및 여타 종교에서 행하는 상례의 부분들은 유교식 상례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어 융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예수교회 상례』를 시작으로 기독교식 상례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예식서에는 경계하는 말, 조례라는 항목을 두어 제사 금지, 곡 금지, 시신 묶지 말 것, 2~3일의 장례 기간, 음복 금지, 요령과 상엿소리 금지 등을 강조하여 기존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의 윤리를 강조하였다. 기독교식 상례는 종파, 집례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입관 예배, 출관식, 하관식으로 나뉜다. 입관 예배는 1. 기도, 2. 찬송, 3. 성경 봉독, 4. 설교, 5. 신앙고백, 6. 찬송, 7. 기도로 구성된다. 출관식은 1. 개식사, 2. 찬송, 3. 유족 위로의 기도, 4. 성경 봉독, 5. 설교, 6. 기도, 7. 고인의 신앙 설명, 8. 조사, 9. 찬송, 10. 축복, 11. 발인으로 진행된다. 하관식은 1. 찬송, 2. 기도, 3. 성경 봉독, 4. 하관과 취토를 위한 축사, 5. 고별 기도, 6. 찬송, 7. 축복, 8. 폐식의 순서로 진행된다.
천주교에서는 『천주성교예규』와 『상장예식』을 기본으로 한다. 절차는 장례 미사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데, 1. 운명, 2. 수시로 진행되는 연도, 3. 위령 미사, 4. 입관 예절, 5. 장례 미사, 6. 하관 예식, 7. 삼우제 추도 미사로 구성된다. 한국 천주교의 상례는 연도(煉禱)라는 노래 형식의 기도가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습과 염의 인정, 명정 사용, 전통적 매장법 수용, 우제의 수용, 절을 하는 문상 방법 등 한국의 전통문화와 많은 부분이 융화되어 있다.
불교의 상례는 종파와 집례자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략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임종 의례: 장례 준비, 2. 빈소 의례: 수시, 영단 구성, 수계 의례 및 경전 독송, 염습 및 입관, 성복, 진반 의례, 조문, 3. 이운 의례: 발인, 운구, 4. 다비 의례: 화장, 염불과 경전 독송, 5. 위폐 봉안례: 사찰에서는 상단의례와 하단의례가 있고 가정에서는 위폐봉안례로 구성, 6. 49재로 구성된다.
현대의 장례식장에서 행해지는 상례 역시 장례식장, 상조회사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일차에는 '운명, 안치, 빈소 설치, 부고, 염습, 입관, 환복, 성복제, 조문'을 한다. 2일차에는 '입관, 성복제, 조문, 장지 확정'한다. 3일차에는 ‘발인, 운구, 화장, 자연장으로 봉안, 귀가, 삼우제와 같은 자가 의례’ 등으로 구성된다.
상황에 따라 1일차 의례와 2일차 의례가 선별적으로 진행된다. 상업적 장례식장을 이용하므로 중간에 상담의 절차가 포함된다.
한국의 상례는 중국의 유교식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우리 사정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그 결과 고유문화가 융화하여 우리식의 유교식 상례로 순화되고, 이것이 문화적 전통으로 정착하였다. 그 결과 종주국인 중국과 타이완에서 한국의 상례를 배우고자 견학할 정도이다.
중국의 예법인 『가례』는 ‘담제(禫祭)’를 상례의 마지막 절차로 삼았지만, 한국에서는 ‘길제(吉祭)’를 상례의 마지막 절차로 삼는다. 이 둘은 동일한 삼년상(三年喪)이지만, 중국은 죽음의 처리에 비중을 두어 ‘담제’로서 상례를 마치게 했고, 한국에서는 가계의 계승을 확정하는 ‘길제’를 지내야 비로소 상례를 마치는 것으로 여기는 차이가 있다.
한국화된 유교식 상례는 의례의 과정(Ritual Process)이었기에 철학이나 종교적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문화적 전통으로 지속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종교와 신앙에 따라 다양한 이념과 종교적 요소가 서로 융화된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