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사업은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쳐서 생사를 생산하는 양잠업과 제사업을 가르키는 산업용어이다. 뽕나무를 재배하는 식물적 과정과 누에를 치는 동물적 과정을 거쳐서, 고치를 원료로 하여 공장에서 생사를 제조하는 공업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상으로 하는 범위가 매우 넓다. 조선시대에는 왕비가 스스로 누에를 치는 친잠 의식이 진행될 정도로 잠사업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 잠사업은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근래에 이르러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품생산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양잠의 수익성이 크게 낮아지게 되어 고치의 생산이 격감하게 되었다.
잠사업은 누에를 쳐서 생사를 생산하는 산업이며 그 과정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쳐서 고치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이것은 농업에 속하며 보통 양잠업(養蠶業)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생산된 고치를 원료로 하여 공장에서 생사를 생산하는 과정인데 이것을 제사업(製絲業)이라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공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일종의 농산물 가공업으로 양잠업과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이를 농업 분야에 속하게 하고 있다.
그 밖에 양잠업의 기반이 되는 뽕밭을 만드는 데 필요한 뽕나무의 묘목을 생산하는 상묘생산업(桑苗生産業)이 있고, 또 누에씨를 생산, 공급하는 잠종생산업(蠶種生産業)이 있다. 본래 잠사업의 2대분야는 양잠업과 제사업이지만 그 보조적인 분야인 상묘생산업과 잠종생산업을 포함시켜서 이들을 잠사업의 4개 업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부잠사(副蠶絲)를 원료로 하여 각종 견방제품을 만드는 견방업(絹紡業)도 잠사업의 일부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이들 모든 업종을 종합한 산업을 잠사업이라고 말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잠업(蠶業)이라는 말을 잠사업과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한다.
잠사업은 누에라고 하는 작은 곤충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이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 산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성격상의 특성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잠사업은 범위가 상당히 넓다. 잠사업은 뽕나무를 재배하는 식물적 과정과 누에를 쳐서 고치를 생산하는 동물적 과정을 거쳐서, 고치를 원료로 하여 공장에서 생사를 제조하는 공업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상으로 하는 범위가 매우 넓다. 산업의 성격상으로 보더라도 양잠업은 농업생산 분야로 1차산업 분야에 속하고 제사업은 공업생산 분야로 2차산업 분야에 속한다. 또한, 제품의 판매에 이르면 이것은 상행위로서 3차산업 분야가 되어 이들 각 분야의 산업이 잠사업이라는 한 산업 안에 통합되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② 잠사업을 구성하는 각 업종은 특수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잠사업을 구성하고 있는 상묘 · 잠종 · 양잠 · 제사의 각 업종은 성격상 이해관계가 서로 상치되어 때에 따라서는 대립하는 관계에 있지만, 잠사업 전체를 볼 때에는 상호의존관계에 있어 공동운명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관계이다.
③ 각 업종별로 경영형태에 차이가 있다. 잠사업의 각 업종 중 양잠업은 순전한 농업생산으로 그 경영의 주체는 농민이다. 상묘생산업과 잠종생산업도 그 형태가 농업적 생산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전문생산업자에 의하여 기업적으로 경영되고 있어 약간의 기업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제사업은 이들 업종과는 다르게 순전히 기업적으로 경영되고 있다.
④ 근래에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수출산업으로 육성되었다. 재래의 잠사업은 농민이 자급자족을 위하여 영위한 시대도 있었지만 근래에 이르러 산업화됨에 따라서 잠사업은 상품생산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근래 이를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수출산업은 외화를 벌어들여서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에 해외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서 경영상 불안정한 취약점이 있다.
누에는 실을 토하는 많은 곤충 중에서 사람의 생활에 가장 유익한 대표적인 견사곤충(絹絲昆蟲)이며, 동물분류학상 절지동물문의 곤충강, 나비목에 속하고 그 학명은 Bombyx mori L이다.
누에는 본래 야생곤충이던 것을 사람이 치게 되면서 인위도태를 해온 결과 오늘날 우리들이 치고 있는 누에로 진화되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선조는 현재 뽕나무의 해충으로 알려져 있는 멧누에( Bombyx mandarina BUTLER )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 근거로는 누에와 멧누에가 형태상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서로 자유롭게 교배하여 새끼가 생겨나며, 그 새끼는 완전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세포학적으로도 멧누에의 염색체수는 n=27개이고 누에는 n=28개인데, 이것은 멧누에가 진화하는 도중 그 염색체 중의 하나가 2개로 나누어져서 28개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처음 누에를 치기 시작한 연대와 장소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명확하지 않다. 양잠의 발상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다르지만 대체로 중국일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뽕나무가 잘 자람으로써 현재까지 중국 잠사업의 중심지가 되어 있는 양쯔강(揚子江) 연안으로부터 광둥(廣東)에 이르는 아시아의 중부지방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양잠의 기원에 관한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 의하면 약 4,600년 전 복희씨(伏羲氏) 또는 신농씨(神農氏) 시대부터 양잠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의 고서인 회남자(淮南子)의 『잠경(蠶經)』에 “황제(黃帝)의 원비인 서릉씨가 처음으로 누에를 쳤다(黃帝元妃西陵氏初蠶).”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양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기전 2650년경 왕비가 궁중에서 처음 누에를 쳤다는 기록일 뿐으로 일반 농가에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누에를 쳤으리라고 추측되므로, 양잠의 기원은 그보다 더 오래 전인 5,000년 이전의 일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처음에는 야생뽕을 이용하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양잠을 해오다가 점차 뽕나무를 재배하여 집약적인 방법으로 누에를 치게 되었고, 고치의 품질도 점차 향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의 양잠은 그 발상지인 중국대륙에서 만주를 거쳐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양잠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고서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잠사업에 관련된 내용의 기록이 있고 『후한서(後漢書)』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잠은 3,000여년 전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한조(弁韓條)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는 데 적당하고 잠상을 알며 비단을 짜고(土地肥美宜移種五穀及稻, 曉蠶桑作絹布)”라 하였고, 마한조(馬韓條)에는 “주민이 토착하여 벼를 심고 잠상을 알며 면포를 짜고(其民土着種植(稻), 知蠶桑作綿布)”라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 지금의 강원지방에 있었던 예(濊)에 대하여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삼한시대에 이미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러한 기록은 『동국통감(東國通鑑)』 · 『한서(漢書)』 등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에는 양잠이 이미 널리 행하여졌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잠사업을 정부에서 권장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의 일이다. 삼국시대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의 약 1,000년에 해당하며, 이 시대의 잠사업에 관한 기록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농상에 힘쓴 치적이 있으며, 평원왕도 583년(평원왕 25)에 영을 내려 농상을 권장하였다. 백제에서는 시조 온조왕이 영을 내려 농상을 권장하였고, 초고왕 때는 양잠법 · 직조법 등을 일본으로 전파하여 후세에 일본 잠사업 발달의 기틀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시조 혁거세왕이 왕비와 함께 6부를 순무하면서 농상을 권장한 일이 있고, 파사왕은 82년(파사왕 3)에 관리에게 영을 내려 농상을 권장하였으며, 786년(원성왕 2) 4월에는 동부지방에 비와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대부분 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사치성향이 높아지는 데 따라서 비단을 짜는 기술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비단은 당나라에 보내는 주요 공물의 하나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양잠을 권장하였다. 태조 왕건은 즉위하자 영을 내려 3년간 전조(田租)를 면제하여 농상을 권장하였고, 현종은 1028년(현종 19) 각 도의 주현(州縣)에 영을 내려 매년 상묘 15∼20주씩을 밭머리에 심도록 하였다.
덕종은 1034년(덕종 3)에 농상은 의복의 근본이니 농민이 주력하도록 하라는 교시를 내렸고, 문종은 농상을 잘 권장하여 민생을 보살핀 관장들을 중용하였다.
인종은 1128년(인종 6)에 영을 내려 농상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함은 성왕의 급무라 하였고, 1145년에는 수양도감(輸養都監)의 상주에 따라 땅이 밭으로 적합하지 않은 곳에는 뽕나무 · 밤나무 · 닥나무 등을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명종은 1188년(명종 18)에 상묘는 적기에 심도록 하였다.
충숙왕은 1325년(충숙왕 12)에 8개 항목의 교를 내렸는데, 이 중 첫째 항목이 농상은 왕정에 있어 가장 우선하는 것이니 적기에 이를 권장하여 실작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에 영을 내려 인가에 뽕나무와 삼을 심는 것은 가족 수로써 그 율을 정하라 하였고, 1371년에는 교지를 내려 농상은 의식의 근본이므로 수령의 종상간전(種桑墾田)의 다소를 고찰하여 출척(黜陟)의 자료로 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도 전기간에 걸쳐 역대 왕들은 농상 권장을 왕정의 최우선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잠사업이 일시적으로 침체상태를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원나라로부터 목면이 전래된 것도 원인이 되었지만 고려 말의 정치적 · 사회적인 혼란이 그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약 500년간은 중국의 화려한 견직물 사용에 자극을 받아서 중국에서 비단을 수입해 왔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역대 왕들이 그 생산을 권장함으로써 많은 치적을 이룩한 시대이다. 태조 때는 창업 초기라 잠사업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토지제도의 개혁을 내세우고 중농과 각종 산업의 부흥에 크게 힘을 썼다.
정종은 1400년(정종 2) 고려시대에 행해졌다가 중단되었던 선잠(先蠶)의 제사를 다시 행하였다. 이 선잠은 중국 황제의 원비(元妃)인 서릉씨를 제사하는 의식인데, 이때 이후로는 다시 행해지지 않았다. 태종은 잠사업을 권장하는 데 있어서 그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후비친잠(后妃親蠶)의 예법을 새로 정하였다.
친잠은 왕비가 스스로 누에를 치는 본을 보여줌으로써 양잠을 권장하는 의식이며 그 뒤 500년간 궁중에서 계속된 의례로 삼게 되었다. 또 1416년(태종 16)에는 백성들에게 양잠법을 습득하게 하기 위하여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는데, 처음에는 경기도에 두 곳만 설치하였다가 그 뒤 5개도에 확대, 설치하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농서를 편찬하게 하고 또 잠실을 3개 도에 증설하고 제사(諸司)의 노복으로 하여금 양잠을 모범적으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단종은 잠종을 각 고을에 배부하고 양잠을 권장하여 그 성적에 따라서 수령을 표창하였다고 한다.
역대왕 중에서 잠업장려에 가장 주력한 것은 세조이다. 세조는 먼저 종상법(種桑法)을 공포하여 대호(大戶) 300주, 중호 200주, 소호 100주, 빈호(貧戶) 50주씩을 각각 식상하게 하고, 또한 여러 관청에 상묘를 나누어 주어 식상하게 하였으며 이를 말라죽게 한 자는 엄벌에 처하였다.
또, 서강(徐岡)으로 하여금 『잠업주해(蠶業註解)』를 편찬하게 하여 잠업기술의 보급을 도모하였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잠업도서이다. 또, 동궁에 친잠실을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이 시대는 우리 나라 잠업의 기초를 마련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뒤 성종은 각 도에 설치되었던 잠실을 각 읍에 설치하게 하여 식상 · 양잠 · 제사 등을 지도, 장려하였고, 중종은 창덕궁 후원에 친잠단을 설치하였다. 숙종은 제주도에까지 농상을 권하였고, 영조는 친잠례의 격식을 높임으로써 잠업의 중요성을 알게 하였다.
1876년의 개항기를 전후하여 사회는 급격히 변화해 갔고 견직물의 소비도 크게 증가함에 따라 중국에서 각종 견직물이 다량으로 수입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잠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잠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 위하여 1883년에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내에 농상사(農商司)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잠업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또 「양잠규칙(養蠶規則)」을 발표하는 동시에 지방의 잠업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각 도에 「농상신법(農桑新法)」을 명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잠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1884년(고종 21) 잠업장려의 전문기관인 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는 재정의 곤란과 기술의 미비로 설치된 지 5년 만인 1889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한편, 정부는 1885년에 경성농상회사(京城農桑會社)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잠업을 주로 하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토지의 개발을 통하여 적당한 토지에 뽕나무의 식재를 장려하였다. 또, 새로운 잠업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잠서(蠶書)를 편찬하였다. 그때의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1884년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蠶桑撮要)』, 1884년 김사철(金思轍)의 『증보잠상촬요(增補蠶桑撮要)』, 1886년 이희규의 한글체 『잠상집요(蠶桑輯要)』 등이 있다.
1894년의 갑오경장은 우리 나라 여러 분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잠업에 대하여도 이것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각종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1900년에는 농상공부 안에 잠업과(蠶業課)를 설치하여 외국의 양잠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을 배치, 주로 일본으로부터 누에의 품종과 새로운 뽕나무의 재배기술을 도입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1890년에는 서울에 잠업시험장이 설치되어 잠업에 관한 시험과 생도의 양성을 시작하였으며, 1901년에는 양잠전습소를 설치하여 양잠기술의 전습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장은 1900년에는 함경도에, 1901년에는 평안북도와 경상북도에도 설치되어 잠업기술을 보급시키는 데 힘쓰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잠업장려정책에 호응하여 민간에서도 민영의 잠업회사들이 설립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00년 서울에 설립된 대한제국 인공양잠합자회사이고 이 밖에도 여러 회사들이 설립되어 잠업생산에 참여하거나 양잠기계의 수입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밖에도 새로운 양잠기술의 보급을 위하여 1901년 이후 지방 여러 곳에 사설 양잠전습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잠업은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기술상에 있어서도 재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생산형태로 전환되어 가는 시기였다고 볼 수가 있다.
당시 잠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지역은 주로 대도시 주변이나 잠업시험장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당시 이들 지역에서 주로 사육되었던 잠종과 뽕나무는 재래종이었고, 개량종은 일부분만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되었을 뿐이다. 1905년 일제가 우리 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함에 따라 잠업은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일본은 마침내 우리 나라를 강점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경제 지배체제로는 농업을 통한 수탈을 기본적인 방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1908년에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바 있고, 1912년에는 농업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기본 방침은 쌀 · 면화 · 양잠 · 축우의 4종류에 대하여 개량과 증식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이와 같이 양잠은 일제수탈의 가장 중요한 종목의 하나로 지목되게 되었는데, 이는 생사가 당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수출물자로서 우리 나라의 기후가 양잠을 하는 데 적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양잠은 오랜 전통산업으로서 농민에 대한 기술보급에 어려움이 없고 또 농촌에 유휴노동력이 많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편의상 이 시대를 4기로 구분하여 잠업장려의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가 처음 잠업장려에 착수하여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기간이다. 1912년에 결정, 시달된 농업정책의 기본 사항 중에 포함된 잠업장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4개항에 대하여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 우량잠종의 보급에 관한 것으로 우리 나라의 풍토에 적응할 일본종 우량품종을 장려품종으로 지정하여 보급에 노력하는 동시에 재래잠종의 구축에도 힘을 기울이도록 하였다. 그래서 1913년에는 권업모범장에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하여 원잠종의 제조 · 배부는 물론 새로운 품종의 육성과 각종 시험 ·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원잠종을 기초로 잠종을 만들어 배부하기도 하였지만 부족한 것은 일본에서 수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잠종의 국내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1915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잠실리에 일본에서 업자를 데려다가 잠종제조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한편, 잠종제조의 단속을 위하여 1913년 경상북도에 잠업취체소(蠶業取締所)를 설치한 것을 시초로 그 뒤 몇 개 도에도 이것을 설치하게 되었지만 1919년에 이르러서 누에병의 예방, 뽕나무의 병충해 예방 및 잠종 제조의 단속을 목적으로 「조선잠업령(朝鮮蠶業令)」을 제정, 공포하게 되었다.
㉯ 양잠업자에게 직접 육잠상의 이익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양잠기술을 편리하고 빠르게 습득하게 하기 위하여 애누에 공동치기 시설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 양잠은 주로 여자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기술보급에 힘쓰게 되었다. ㉱ 고치 처리의 개선인데, 당시 고치의 처리방법은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새로 건견(乾繭)시설(施設)을 설치하게 하여 고치의 처리를 개선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뽕밭의 개량증식에 노력하도록 하였다. 새로 우량품종을 장려품종으로 지정하고 뽕나무의 묘목을 무상으로 배부하여 새로운 뽕밭 조성을 장려하였다.
잠사업의 기반이 서서히 확립되어 가는 기간이다. 이 시기의 주된 시책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 잠종제조기술이 아직 유치하여 잠종의 질이 좋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개량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각 도에 동업조합을 조직하게 하여 잠종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였다. ㉯ 상묘의 수요가 해마다 증가하는 데 따라서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 건견장의 설치를 계속 권장하였다. 그리고 1918년부터는 제사공장이 설립되기 시작하여 1920년에는 9개 소에 이르렀다. ㉱ 고치 100만 석 증수계획은 1925년부터 1939년까지 15년간에 당시 약 20만 석(약 6,000여M/T)이었던 고치의 생산량을 100만 석으로 늘리는 계획이다.
이 계획은 농가경제의 향상을 꾀하고, 일제의 수출무역에 도움을 주며, 우리 나라의 자연적 · 인적 요소를 적당히 이용할 수 있다는 등 식민지에 대한 수탈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하여 수행하였다. 목표 연도의 실적은 당초 목표의 57%에 해당하는 65만 6000석에 지나지 않았지만 잠업발전상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증산계획이었다.
이 기간은 일제가 마침내 대륙침략의 야욕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기간으로 일본은 준전시체제로 바뀌어 갔고 세계 경제불황도 겹치며 잠사업도 그 영향을 받아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 기간중의 주요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 1925년에 시작된 고치 100만 석 증수계획은 이 기간중 가장 중점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는 극심한 농업불황의 영향을 받아서 예정된 계획을 추진하기가 어려워서 결국 목표의 57%를 달성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 양잠소작제도는 양잠의 불황에 대처하여 고치의 감산을 우려한 일제가 그들의 자본인 제사회사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이용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규모가 큰 제사회사와 20㏊를 1단지로 하는 지역 안의 양잠농가와 계약을 맺고, 제사회사는 각종 기술지도를 하고 양잠농가는 생산된 고치를 해당 회사에 판매하는 제도이다.
이 기간은 1940년부터 일제가 패망하여 식민지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기간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일본의 모든 산업이 전쟁수행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달성을 위하여 강력한 통제체제 밑에 들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 고치 100만 석 증수계획에 이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에 ‘고치 50만 석 급속증산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이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섬유자원이 부족하게 되고 생사가 군수물자로 중요시됨에 따라 1940년 산견량 약 2만 2000M/T(70만 석) 수준보다 1만 6000M/T(50만 석)을 더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가열되고 모든 형편이 어려워짐으로써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1944년에는 고치생산량이 약 1만 4000M/T으로 감소되고 말았다.
㉯ 태평양전쟁이 가열되는 데 따라서 일제는 모든 산업을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강력한 통제를 하게 되었다. 잠사업에 있어서도 1942년에 「조선잠사업통제령(朝鮮蠶絲業統制令)」을 공포하고 이 법령에 따라서 조선잠사통제회사를 설립하여 잠사업 전체를 완전한 통제체제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고치값을 공정가격제도로 고쳐서 정부에서 통제하고 농민이 생산한 고치는 일정한 양의 고치를 할당하여 강제로 판매하게 하는 이른바 공출제도로 바꾸어 놓았다. 이 공출제도는 생산된 고치를 강제수매하여 제사공장의 원료를 확보하여 생사의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한 강제수단으로 항상 과중한 공출량을 할당함으로써 농민을 괴롭혔던 가장 악랄한 일제의 수탈수단이었다.
㉰ 일제는 섬유자원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이 기간중에 열대성인 피마잠(蓖麻蠶)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이 피마잠은 피마자의 잎을 먹고 자라며 피마자의 열매에서 짜는 기름은 비행기의 윤활유로 쓸 수가 있어 전쟁물자로도 중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그 시험연구에 힘썼지만 별로 기대할 만한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1945년 마침내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 나라는 국권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새로운 형태의 산업으로 개발, 육성되었다. 즉,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농촌소득증대사업의 중요한 산업으로, 또 국가적으로는 외화획득을 위한 중요한 수출산업으로 육성, 발전하게 되었다. 이 기간을 3기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광복 직후의 미군정과 과도정부를 거쳐서 1948년 정부가 수립되어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광복 직후의 우리 나라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여 잠사업도 이렇다 할 발전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였다. 잠사업에 있어서도 재기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일제하에서 고치의 강제공출에 시달려 온 농민들의 생산의욕의 저하와 이른바 적산인 제사공장의 관리권을 둘러싼 분쟁 등으로 업계는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경제개발에 착수하게 되어 마침내 1949년을 기점으로 하여 1951년까지 ‘산견(産繭) 3개년계획’을 수립하여 고치의 증산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은 광복 후 최초의 증산계획이었지만 이 계획은 제대로 추진도 해보지 못한 채 1950년에 일어난 6 · 25전쟁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당시 제사공장이 40여 개나 되어 과잉상태에 있었던 것을 28개로 정비하기도 하였다. 6 · 25전쟁은 많은 잠사관계 시설, 특히 제사공장을 파괴함으로써 우리 나라 잠사업에 큰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식량의 증산과 수출산업의 육성이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다시 ‘5개년잠견증산계획(1952∼1956)’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경제여건의 불리함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치의 생산량도 별로 증가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새로운 ‘잠업증산5개년계획(1959∼1963)’도 세워졌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광복 후 1951년경까지는 생사는 대부분 국내용으로 충당되었으나 수출물자로 주목을 받게 되어 1952년에 한국생사수출조합이 결성되고 수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중석(重石)에 이어 제2위의 수출액을 보였지만 그 규모는 200만 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전재복구와 생산증대에 힘쓴 결과 1953년부터는 생산이 6 · 25전쟁 전의 수준까지 회복되고 수출도 점차 활발하여져서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정부는 새로이 ‘잠사업증산10개년계획(1961∼1970)’을 수립하였으나 이 계획은 1962년부터 추진한 새로운 증산계획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의 말기인 1961년 말에 우리 나라 잠사업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잠업법(蠶業法)」이 제정, 공포되었다.
광복 후 1962년까지의 기간은 우리 나라의 모든 면에서 별로 발전을 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였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1962년부터 1976년까지의 15년간은 우리 나라 잠사업이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로 우리 나라 잠업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기간이다. 정부는 경제발전에 가장 역점을 두었고 그 중에서도 잠업증산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이 잠업증산계획은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이 기간중 3차에 걸쳐서 수립, 추진되었다.
‘제1차잠업증산5개년계획(1962∼1966)’은 기준연도인 1960년도의 산견량 4,599M/T을 목표연도인 1966년도에 1만 500M/T으로 증산하는 것이었으나, 실적은 9,600M/T에 그치고 말았다. 제1차증산계획에 이어서 확대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잠업증산5개년계획(1967∼1971)’과 ‘제3차잠업증산계획(1972∼1976)’이 수립, 추진되었다. 이러한 3차에 걸친 증산계획의 추진으로 우리 나라 잠사업은 일대 약진을 하여 근대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우리 나라의 뽕밭면적은 최고 전체 밭면적의 약 10%(1969), 양잠농가 수는 농가수의 약 20%를 차지하게 되었고, 고치의 생산량은 목표량에는 약간 미달하였지만, 남북한을 통한 최고생산량(1945년 약 2만 2700M/T)의 1.8배에 해당하는 4만 1704M/T을 기록하여 제1차증산계획의 시발연도인 1962년의 5,513M/T에 대하여는 8.3배에 이르게 되어 우리 나라 잠업사상 가장 많은 산견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 기간중 정부는 농민의 소득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1968년부터 1971년까지의 4개년을 1차계획, 1972년부터 1986년까지의 15년간을 2차계획으로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잠사업이 그 주요 사업의 하나로 지정되어 적극 추진되었으며, 이 계획에 따라 전국에 12개의 단지를 조성하여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한편, 증산계획의 추진에 따라서 산견량이 크게 증가하자 새로운 제사공장을 면허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1967년에 ‘기업양잠농육성요강’을 제정하였다. 이는 요강에 따라 일정 면적의 뽕밭을 조성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한 규모의 제사공장의 면허를 부여하는 제도로, 그 결과 새로 2만 8948.9㏊의 뽕밭이 조성되었고 42개의 제사업체가 면허되었다. 그러나 이 요강은 1970년에 폐지되었다.
고치의 거래제도는 생산된 고치를 공동판매제도에 의하여 생견으로 거래하는 것이었는데 미리 지정된 구역에 따라서 제사공장이 수매하였다. 고치는 주로 육안검사에 의하여 등급이 정하여졌지만, 1966년에 「잠견기계검사규칙」이 제정됨에 따라 일부는 기계검사에 의하여 거래되기 시작하였다. 고치값은 처음에는 업자간의 협정에 의하여 결정되었지만, 1963년부터는 「잠사류가격안정기금법」에 따라, 또 1971년부터는 「잠업법」 중의 「잠업진흥심의회규정」에 따라 정부의 고시가격으로 결정되었다.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수출산업으로 육성되었다. 따라서, 생산된 생사의 거의 전량이 수출되었는데 이 기간중 최고를 기록하였던 1970년대 전반기에는 견직물을 포함한 생사류의 수출량이 5,000M/T을 넘었고 수출액도 3억달러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 금액은 우리 나라 총수출액의 4% 내외, 총 농림수산물 수출액의 40% 내외를 차지하여 생사가 우리 나라의 중요한 수출물자의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의 생사는 거의 전량이 일본에 수출되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기에 걸쳐서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던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큰 변동기를 맞이하여 마침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생사는 거의 전량을 안정적으로 일본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1974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의 수출에 큰 변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즉 석유파동은 세계경제, 특히 우리의 유일한 생사 수출시장인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일본에서의 생사 소비량이 격감하고, 또 생사값도 크게 떨어졌다.
결국 그동안 무제한으로 생사를 수입하던 일본이 1974년에 생사수입규제조처를 단행함으로써 우리 나라 생사수출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조처로 1976년에는 생산한 생사의 60% 이상이 재고로 남게 되고 수출부진과 가격하락으로 고치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어 우리 나라 잠사업은 침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는 1976년부터 정기적으로 ‘한일생사회담’을 개최하여 양국간에 수출물량을 조정함으로써 일정한 수출량을 확보하도록 하는 한편, 생사의 형태를 처음에는 견연사(絹撚絲)로, 다음에는 견직물로 바꾸어 나감으로써 수출물량을 확보하고 수출시장을 늘리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1977년에는 생산량을 억제하기 위하여 잠업사상 처음으로 감산정책까지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고치의 생산량은 1976년을 정점으로 하여 그 뒤로는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정세는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서 1979년부터 다시 증산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농촌에서는 극심한 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고, 노동집약적인 양잠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뒤따르지 못하여 양잠을 포기하는 농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고치값도 제대로 오르지 못하여 양잠의 수익성이 떨어지게 되어 상품생산이 목적인 양잠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적극적으로 증산을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치의 생산량은 거의 직선적으로 감소하여 1989년에는 최성기의 약 13%에 해당하는 5,300M/T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편, 고치의 생산량은 해마다 줄어 들었지만 생사류의 수요는 큰 변동이 없어 공급이 수요에 따르지 못하게 됨으로써 부득이 1981년부터는 고치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량은 해마다 증가하여 1987년에는 1,000M/T을 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1980년부터는 부족한 생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생사류(견직물 포함)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는데, 거의 소요량의 3분의 2를 수입하기에 이르렀으며 고치의 수입량까지 계산한다면 수입생사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서 이제 우리 나라는 생사의 수입국으로 그 모습이 바뀌고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이러한 격동기를 통하여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그 체질이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즉, 과거에는 원료인 생사의 형태로만 수출하던 것이 일본의 생사류 수입규제를 계기로 견직물 가공기술을 개발하여 생사형태로의 수출은 극히 적고 그 대부분이 견직물이나 봉제품으로 수출을 함으로써 제품의 형태가 바뀌었다.
다음으로는 생사는 일본이 유일한 수출시장이었지만 견직가공수출로 바뀜에 따라서 수출시장이 다변화되어 일본지역 약 40%, 기타지역 약 60%로 일본 이외의 지역에 대한 수출이 도리어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 잠사업의 체질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수출산업인 잠사업의 취약성이 크게 보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잠사업은 그 본질이 누에를 쳐서 고치를 생산하여 생사를 제조하는 산업이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초반부터 그 성격이 크게 달라져서 누에를 치는 것이 고치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약용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우리 나라 잠사업은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농촌의 노임이 높아져서 고치의 생산비가 상승하자 양잠의 수익성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따라 많은 양잠농가가 양잠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치의 생산량이 격감하게 되어 잠사업은 그 형태를 유지하기 조차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거의 모든 제사공장들도 원료인 고치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자 휴업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만 외국에서 생사를 수입하여 가공하는 견직업만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마침 누에의 분말이 당뇨병의 혈당강하제로 효과가 있음이 밝혀져 누에의 냉동건조 분말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고치를 생산하기 보다는 차라리 약용으로 하는 것이 그 수익성이 월등하게 높아짐에 따라 이제 양잠에 의한 고치의 생산은 극히 적고, 그 대부분이 약용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뽕잎과 그 밖의 잠상산물의 기능성 식품으로서의 이용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등 양잠은 그 성격상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치의 생산과정은 뽕나무의 재배와 누에치기의 두 과정으로 나눌 수가 있다. 고대에는 야생의 뽕나무를 이용했다. 점차 사람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서 이것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집터, 밭둑, 하천의 연안 등에 식재하였다.
그 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일본에서 새로운 뽕나무의 품종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비로소 실용적인 품종이 계획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뽕밭용지도 처음에는 숙전이 아닌 곳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일부 숙전에 뽕나무를 심게 되었는데 이른바 순뽕밭형태는 매우 적었다.
그러던 것이 광복 이후 우리 나라의 잠사업이 근대산업으로 육성되기 시작하면서 뽕밭의 형태도 집약적인 형태인 순뽕밭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거의 전부가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뽕나무의 재배기술도 과거에는 자연교목으로 방치하고 다만 잎만 수확하여 이용하였을 뿐 별다른 비배관리를 하지 않았다.
그 뒤 숙전에 뽕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위적으로 수형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약간의 비배관리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부에서 숙전에 순뽕밭을 만들면서 오늘날과 같은 낮추베기 수형으로 만들게 되었지만, 이것이 보편화되기는 광복 후 증산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이렇게 뽕나무의 재배를 집약적인 방법으로 하게 됨에 따라 합리적인 비배관리도 이루어지게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뽕나무 재배기술이 확립된 것이다. 옛날에는 물론 오늘날과 같이 성능이 우수한 누에의 품종은 없었고 다만 고치의 품질이 매우 좋지 못한 재래종 3면잠(三眠蠶)을 사육하였을 뿐이다.
누에씨도 농가가 스스로 복제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1912년에 이르러 일본이 일본종 봄품종 3종과 가을품종 2종을 도입하여 장려품종으로 지정, 장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개량 누에품종의 시작이다. 그 뒤 1대교잡종의 우수성이 알려짐에 따라 1917년에는 4개의 교배조합이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서도 교잡종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 많은 변천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성능이 우수한 교배종을 육성, 사육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누에씨의 제조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우수한 누에씨를 생산할 수 있도록 되었다. 누에의 사육기술도 옛날에는 주택의 일부를 이용하여 극히 유치한 방법으로 누에를 쳤지만 그 뒤 점차 전용 잠실을 이용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누에를 치게 되었다. 한편 그 기술체계는 매우 노동집약적이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광복 이후 양잠의 규모가 커지고 산업화해 감에 따라 이에 적합한 기술체계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어 새로운 양잠기술로서 애누에공동치기와 큰누에의 연간가지뽕치기가 기본적인 누에치기의 기술체계로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여기에 적합한 시설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양잠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누에는 본래 뽕잎이 유일한 사료이었지만 1960년대 초부터 인공사료의 개발에 착수하여 점차 실용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고, 1990년대에는 애누에 공동치기의 인공사료육이 보편화되어 누에의 사육기술에 일대 혁신을 가져 오게 되었다.
사람이 누에를 치는 목적은 고치에서 실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늘날처럼 긴 실을 얻는 방법은 알지 못했고, 다만 이 껍질 고치를 삶아서 부드럽게 한 것을 활줄로 퉁겨 펴서 늘인 다음 이것을 꼬아서 긴 섬유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뒤 실켜는 연모가 개발됨에 따라 고치를 삶아 손으로 직접 실을 잡아 당겨 실켜기를 하게 되었으며, 이를 족답식(足踏式) 제조기로 개선하여 얼레를 발로 밟아 실얼레를 돌리면서 손으로는 고치를 붙여 실켜기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는데 이와 같은 실켜기 방법은 1910년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다가 1910년에 당시 총무대신 송병준(宋秉畯)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좌조조사기(座繰繰絲機) 32부를 도입하였고, 1914년에는 처음으로 민간 제사공장이 설립되면서 점차 많은 제사공장이 설립되어 우리 나라의 제사기술도 근대화되기 시작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 뒤 1930년대에는 더욱 개량된 조사기인 다조조사기(多條繰絲機)로 대치되기 시작하였으며, 1957년에는 일본에서 개발된 자동조사기(自動繰絲機)를 도입하여 다조조사기와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이 자동조사기는 그 뒤 몇 차례에 걸쳐 개량된 결과 오늘날과 같은 성능이 좋은 조사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고치는 이 조사기에 의하여 생사로 만들어지고 있다. 한편, 조사기가 이렇게 발전해 오는 데 발맞추어서 건견기(乾繭機)나 자견기(煮繭機)도 발전하여 전부 자동화됨으로써 제사의 전과정이 최신의 기술로 근대화되었다.
잠사업의 장래를 전망해 보기 위하여는 먼저 그 생산물인 천연견사와 그와 경쟁적인 위치에 있는 인조섬유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단은 옛날부터 가장 귀중한 의료자원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근래 인조섬유, 특히 합성섬유가 발달하여 그 생산량과 소비량이 급진적으로 증가하는 데 따라 비단을 비롯한 천연섬유가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천연섬유인 비단은 보온성 · 흡습성 · 촉감 등의 품질에 있어서 월등하게 우수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량도 극히 적어서 귀중한 섬유로서의 희소가치가 커서 인조섬유와의 경쟁관계는 그리 심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합성섬유는 대량생산을 할 수 있고, 또 값이 비교적 쌀 뿐만 아니라 품질이 질겨서 대중적인 옷감으로 알맞지만 질에 있어서는 아직 비단에 미치지 못한다. 한편, 비단은 값이 비싸서 대중적인 옷감은 되지 못하지만 합성섬유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독특한 품질을 가지고 있어 고급옷감으로서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합성섬유가 따를 수 없는 우수한 특성을 계속 유지하도록 품질의 향상에 노력하면서 가격도 되도록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면 비단에 대한 수요는 계속될 것이며 잠사업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잠사업은 옛날에는 다만 농가의 부업으로 고급의류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여 경영되어 오다가 그 뒤 점차 상업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양잠은 점차 현금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소득작목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지만 1950년대까지는 아직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이후 3차에 걸친 증산계획의 추진에 따라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근대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제 잠사업이 우리 나라 농업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연대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최성기인 1970년대에 있어서는 뽕밭면적이 전체 밭면적의 9% 내외를 차지하였으며, 농가수에 대한 양잠농가 수의 비율도 20%를 넘어 양잠은 농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뒤 잠사업이 침체상태에 들어가면서 그 비중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양잠은 농촌에 있어서 소득작목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 우리 나라의 농업은 구조적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경영규모가 매우 영세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세한 규모의 경지를 기반으로 한 경영의 형태로서는 경영의 합리화를 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농업경영의 충분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농업구조에 있어서는 농촌노동력의 효율적인 분배와 농촌경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소득작물을 도입한 다각적인 경영형태, 즉 복합영농형태가 바람직하다.
양잠은 본래 상품생산을 목적으로 경영되는 종목으로서 짧은 기간 내에 현금을 얻는 데 적당하고 또 시장성이 안정되어 있으며 수익성도 낮지 않다는 등 소득작목으로서 적당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어 복합영농의 한 가지 중요한 작목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1966년부터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의 가장 중요한 작목으로 양잠을 적극 권장하여 큰 성과를 보게 되어 농촌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양잠은 농촌에 있어서의 소득작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중요한 수출물자인 생사류의 원료가 되는 고치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1989년까지만 하여도 생사류(견직물 포함)의 수출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다만 국내산 고치로 생산되는 생사로는 소요량의 겨우 20% 내외를 충당하는 데 지나지 않고 그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고치의 증산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에 들어와 양잠에 대한 환경조건이 더욱 나빠져서 양잠의 수익성이 크게 낮아지게 되어 고치의 생산이 격감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약용으로 누에분말의 수요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수익성이 고치를 생산하는 경우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고치의 생산은 그 흔적만 남게 되었다. 결국 앞으로 우리 나라의 잠사업은 고치의 생산이라는 그 본래의 성격으로는 유지되기가 어려워졌고 약용을 비롯한 잠상산물을 이용한 기능성 식품의 생산이라는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해 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