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미지(眉之). 할아버지는 이신효(李愼孝)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이덕숭(李德崇)이다. 어머니는 홍순성(洪循性)의 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삼촌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참봉이 되어 151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9년 예조좌랑이 된 뒤 1521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지평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을 구출하려다 무고를 당한 안처겸(安處謙) 등의 죄를 엄정히 처리할 것을 강변하였다. 1523년에 문학을 거쳐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이 되자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사헌부의 장계로 체차(遞差: 관직에 있는 사람을 임기 만료나 기타 이유로 인해 해임시키고 후임자를 임명하는 것)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1525년 보덕을 역임한 뒤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전라도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들의 근무 태만과 부정을 조정에 보고해 이들을 면직시켰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응교를 거쳐 1526년에는 전한이 되었다.
이듬해 예조참의·동부승지를 거쳐 승지가 되었을 때, 강서(講書) 시험의 시관으로 부표(付標)를 누통(漏通: 비밀을 누설해 알려줌)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고의가 아니라는 왕의 옹호로 무사하였다.
이 해 대사간에 임명되자, 지난날 부표의 누통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왕에게 아뢰어 체차를 자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528년 관찰사가 되고, 이어 1530년에 대사성의 물망에 올랐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곧 좌부승지가 되었다.
1532년 특명으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534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듬해 유수·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37년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 해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 실록이 소실되자, 춘추관의 실록을 베껴 옮겨 재배치할 것을 청해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이어 1539년 빈객(賓客)이 되었다. 이듬해 좌참찬이 되자 동반 정3품 이상, 서반 2품 이상의 중신들은 유일지사(遺逸之士: 과거를 거치지 않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생원 안백증(安伯增), 유학 성수침(成守琛)을 천거하였다.
곧 우참찬을 거쳐 병조판서가 된 뒤 1542년에 지돈녕부사로 죽었다. 척신으로 고관을 지냈으면서도 국사에 소홀했다는 사가들의 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