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쌍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쌍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원종|인헌왕후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 (풍무동)
내용 요약

김포 장릉(金浦 章陵)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쌍릉이다. 1619년에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사망하자 양주에 안장되었다. 1623년에 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를 정원대원군, 어머니를 연주부부인으로 봉하였으며, 1626년에 연주부부인의 장례를 치른후 정원대원군의 묘를 이장하여 쌍분으로 만들어 흥경원이 되었다. 1632년에 정원대원군을 원종이라 추존하고 흥경원을 장릉(章陵)이라 능호를 올리고 능제로 돌거리를 갖추었다.

정의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의 쌍릉.
건립경위

원종(元宗, 1580~1619)은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87년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지고, 1590년에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의 딸과 결혼하여 능양군 · 능원군 · 능창군을 낳았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에 의해 능창군이 유배되었다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1619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의 경계 속에서 양주 곡촌리에 급히 안장되었다.

1623년에 정원군의 장자 능양군이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16대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된다. 인조는 즉위하여 아버지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어머니를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봉하였다.

1626년 1월에 연주부부인이 경희궁 회상전에서 죽음을 맞게 되자 김포 성산 언덕에 묘소를 마련하고 안장하였다. 이때 정원군의 묘를 흥경원(興慶園)이라 하고 어머니의 묘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다. 1627년에 양주에 있던 흥경원을 이장하여 연주부부인의 육경원에 쌍분으로 장사 지내고 흥경원이라 불렀다.

1632년(인조 10) 이조판서 이귀(李貴, 1557~1633)의 주청으로 정원대원군의 신분을 원종에 추존하고 어머니 연주부부인은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로 추봉하였다. 흥경원은 능으로 격상하여 장릉(章陵)으로 능호를 올렸다. 원(園)에서 능(陵)으로 격상되자 능제에 맞추어 주1, 장명등(長明燈), 주2, 주3, 주4 등의 돌거리를 갖추었다.

변천

1634년 예조에서는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의 경릉(敬陵)을 참고하여 주5주6, 난간석(欄干石)을 갖출 것을 제안하였다. 인조는 난간석을 설치하려면 주7의 가까운 땅을 다지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난간석은 설치하지 말고 양석과 호석만 추가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장릉은 능제에 맞추어 문석인과 무석인을 각 1쌍, 주8 · 양석 · 호석을 각 2쌍, 장명등 1좌, 혼유석 1쌍, 망주석 1쌍을 갖추었다. 1753년에 표석을 세우고 비각(碑刻)을 갖추었다.

형태와 특징

김포 장릉은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침을 한 언덕에 조성한 쌍릉이며, 주9으로 자리 잡았다. 능상은 주10을 두어 단을 구성하여 상계에는 봉분과 망주석 · 혼유석이 있으며, 하계에는 장명등을 중심에 두고 문 · 무인석이 있다.

봉분에 주11과 난간석이 없이 주12만 둘러진 모습이 능제와 차이가 있다. 주13은 3칸의 정전(正殿)과 2칸의 배위청(配位廳)으로 구성되었으며, 동쪽에는 비각과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주14 밖에는 연못과 주15이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김포 장릉은 본래 대군의 묘(墓)로 건립되었으나 인조의 즉위 이후 대원군과 부부인의 원(園)으로 격상하고,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되면서 능제를 갖추게 된 사례이다. 처음부터 능제로 건립된 조선왕릉과는 돌거리에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장릉지(莊陵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흥경원이장시예장도감의궤』(1627)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Ⅳ』(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3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4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7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우리말샘

주8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9

묏자리나 집터가 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우리말샘

주10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1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12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병풍석 대신으로 둘러 세운 돌.    우리말샘

주13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4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5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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