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필(柳相弼, 1782~?)이 1811년(순조 11)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 간의 대마도(對馬島)에 다녀온 사행 기록이다. 당시 정사는 김이교(金履喬, 17641832), 부사는 이면구(李勉求, 17571818)였다. 유상필은 군관(軍官)으로 동행하여 일공(日供)을 맡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책 49장이며 필사본이다. 이 책은 본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했다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 기증된 것이다. 원본의 출처나 소장자는 미상이다. 1913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 『해행총재(海行摠載)』에는 실려 있지 않았으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된 『해행총재』에는 수록, 번역되었다. 목차는 따로 없이 12월 12일 사신에 임명된 시점부터 이듬해 7월 11일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한 시점까지 기록되었다.
다른 사행 기록과 달리 사사로이 쓴 사행기록이다. 내용은 「사행 명단」, 「양국 간의 강정(講定)」, 「일기」, 「양국 국서(國書)」, 「서계(書啓)」,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별도 서계」, 「공사예단(公私禮單)의 물품 명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행은 관백(關白)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한 관례적인 사행이었다. 그러나 종전의 통신 사행과는 달리 에도(江戶 : 지금의 東京)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대마도에서 사행임무를 수행하는 역지사행(易地使行)로, 이 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수신사(修信使)가 파견될 때까지 통신사란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된 마지막 사행이었다.
이 역지사행은 일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은 당시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존왕사상(尊王思想)과 왕정복고를 내용으로 한 이른바 일본학이 대두되고 국방론이 제기되어 조선사행을 통한 유교·불교 사상의 수용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사행은 종사관도 없이 그 규모도 대폭 줄여 정사를 비롯한 부사 이하 모두 336명이었다.
「사행 명단」은 원역(員役)과 격군(格軍) 등을 제외하고 예하 수행원을 정사와 부사로 나누어 적었다. 「양국 사이의 강정」은 모두 31항목으로 종전의 사행 중 제외할 수행원, 예의 규정, 정사·부사 등에 관한 자격 규정, 예물 등을 규정하였다.
「일기」는 다른 사행 기록에 비해 매우 소략한데, 그것은 일본의 관심이 적어진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행이 도착하면, 일본 지식인층은 사행과 접촉하여 한시(漢詩)와 서화의 휘호(揮毫)를 구하거나 필담을 통해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정정(政情)·역사·풍물·경사(經史) 등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 나타난 태도는 이제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러한 태도의 변화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서」나 「서계」도 형식적이고, 예물의 물목(物目)도 크게 줄었다.
이 사행 기록은 이 책외에 김이교가 쓴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과 서기(書記)였던 김선신(金善臣)이 쓴 『도유록(島游錄)』 등에도 있다. → 해행총재
기존에 보낸 통신사는 에도까지 갔지만, 대마도까지만 갔던 역지사행으로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의 일행이 작성했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