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광무 7) 1월 23일, 궁내부에 박문원을 설치하고 국내외 고금(古今)의 유명한 서적, 신문, 잡지, 월보(月報), 연보(年報) 등을 보관, 관리하는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관원으로 원장 1인은 칙임관(勅任官), 부장(副長) 1인은 칙임관 혹은 주임관(奏任官)으로 임명하였다. 찬의(贊議) 2인은 칙임관 대우, 감서(監書) 2인은 주임관, 기사(記事) 2인은 판임관(判任官)으로 임명하였다.
1903년 2월 3일, 프랑스어학교 교사 마르텔(E. Martel)을 박문원 찬의에 임명한 것을 보면, 박문원은 해외서적 및 자료 수집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르텔은 1904년 1월 21일, 러일전쟁 발발 직전에 대한제국이 중국의 산둥반도 지푸에서 「전시중립선언」을 발표하는데 관여한 사람이다.
관제의 변동 사항을 보면, 1903년 10월 19일에 부장 1인과 찬의 3인을 증원하였고, 감서는 참서(叅書)로 명칭이 바뀌었다. 11월 26일에는 기사가 주사(主事)로 명칭이 바뀌었고, 참서와 주사는 필요에 따라 증감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04년 1월 11일에 불필요한 관청의 통폐합 조처를 건의한 궁내부대신 서리 성기운(成岐運)의 상소에 따라 궁내부 수륜원(水輪院), 평식원(平式院), 관리서(管理署)와 함께 박문원도 폐지되었다. 다만 박문원의 기능은 궁내부 산하 예식원(禮式院)에 박문과(博文課) 설치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