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7년(태조 6)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학덕 있는 사람의 神主를 모시는 것) 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보성읍 남문 밖 주봉리 구계동에 창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의 연혁은 자세하지 않으며, 《산양지 山陽誌》에 의하면 언제쯤인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가 다시 사창(社倉:還穀을 쌓아 두던 창고)의 서편으로 옮겨 갔고, 정유재란중에 소실되자 1602년(선조 35)에 새로이 중건하면서 또다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인조 때 진사인 박춘장(朴春長)이 주선하여 보수가 이루어졌고, 1832년(순조 32)에 군수 유장환(兪章煥)이 중수하였다. 1875년(고종 12) 군수 오도영(吳道泳)이 대성전을 개수하고 1899년 군수 민영일(閔泳一)이 명륜당을 보수하였으며, 1921년 도유사(都有司) 박남현(朴南鉉) 등이 향교 전반에 걸쳐 보수하였다.
그 뒤 1931년에 명륜당을, 1950년에 향교 전체를, 1971년에 동무(東廡) · 서무(西廡)를, 1979년에 외삼문(外三門)을 중건하고, 1984∼1986년에는 명륜당을 복원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 정면 7칸, 측면 2칸의 명륜당,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동무와 서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앞쪽에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 동무 · 서무 · 명륜당 · 동재 · 서재 등이 있다. 명륜당은 본래 풍화루였으나, 개축하여 명륜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외삼문은 근래에 신축한 것이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건립한 것이다.
건물구성은 명륜당과 양재가 내삼문 쪽으로 트인 ㄷ자집 형태로, 중앙은 전면의 내삼문 좌 · 우측 담장과 함께 중정(中庭)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성전은 2고주 5량의 맞배지붕으로, 공포는 2익공 양식이며,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있다. 또한 창방(昌枋)과 장여 사이의 꽃받침은 귀면으로 특이하다. 동 · 서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5량가의 건물이다. 우측 툇간을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자연석 덤벙주춧돌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며, 2고주 5량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자연석 덤벙주춧돌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우측 2칸은 온돌방으로, 우측 툇간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4칸은 넓은 대청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 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 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 《양사재안 養士齋案》 · 《향교유안 鄕校儒案》 · 《향교서재유안 鄕校西齋儒案》 · 《사징전구폐절목 査徵錢捄弊節目》 · 《향약장정 鄕約章程》 · 《호남공선정례부편 湖南貢膳定例附編》 · 《모성계안 慕聖契案》 · 《석전계안 釋奠契案》 등은 이 지방 향토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