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담수(淡叟), 호는 한천자(漢川子). 증조부는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좌대언(左代言) 신중명(申仲明)이고, 할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신집(申諿)이며, 아버지는 이부상서(吏部尙書) 신익지(申翼之)이다.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鄭氏)로 정홍의(鄭洪義)의 딸이다.
우왕(禑王) 초기에 판사(判事)를 역임하고, 1385년(우왕 11) 우왕이 집에 행차하였을 때 딸을 비(妃)로 주1 1387년(우왕 13)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딸이 우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기화로 남의 노비(奴婢)와 전토(田土)를 빼앗는 등 비행을 일삼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아들 신효온(申孝溫)과 사위 박보령(朴保寧) 등과 더불어 장형(杖刑)을 받고 각산(角山: 현, 경상남도 사천시)에 주2
1388년(우왕 14) 우왕이 최영(崔瑩)의 딸을 영비(寧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책봉하면서 신아의 딸은 정비(正妃)로 봉해졌다. 그해 6월 창왕(昌王)이 즉위하면서 강인유(姜仁裕) · 최천검(崔天儉) · 조영길(趙英吉) · 왕흥(王興) · 오충좌(吳忠佐) 등과 함께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1388년 8월 창왕의 생일을 맞아 사면으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389년(공양왕 1) 예부상서(禮部尙書)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평산 · 한천(漢川)에 퇴거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왕 재위 때에 법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하게 한 죄로 이성계(李成桂) 일족(一族)인 낭사(郎舍) 허응(許應) 등의 탄핵을 받아 전주(全州)에 유배되었다.
사후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그 뒤 동양서원(東陽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