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담수(淡叟), 호는 한천자(漢川子). 증조부는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좌대언(左代言) 신중명(申仲明)이고, 할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신집(申諿)이며, 아버지는 이부상서(吏部尙書) 신익지(申翼之)이다.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鄭氏)로 정홍의(鄭洪義)의 딸이다.
1352년(공민왕 1) 과거에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이후 1357년(공민왕 6) 4월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과 동지공거(同知貢擧) 김희조(金希祖)가 주관한 과거에서 염흥방(廉興邦)· 성석린(成石璘) 등과 함께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었다. 우왕(禑王) 초기에 판사(判事)를 역임하고, 1385년(우왕 11) 우왕이 집에 행차하였을 때 딸을 비(妃)로 바쳤다. 1387년(우왕 13)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딸이 우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기화로 남의 노비(奴婢)와 전토(田土)를 빼앗는 등 비행을 일삼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아들 신효온(申孝溫)과 사위 박보령(朴保寧) 등과 더불어 장형(杖刑)을 받고 각산(角山: 현, 경상남도 사천시)에 유배되었다.
1388년(우왕 14) 우왕이 최영(崔瑩)의 딸을 영비(寧妃)로, 왕흥(王興)의 딸을 선비(善妃)로 책봉하면서 신아의 딸은 정비(正妃)로 봉해졌다. 그해 6월 창왕(昌王)이 즉위하면서 강인유(姜仁裕)·최천검(崔天儉)·조영길(趙英吉)· 왕흥(王興)· 오충좌(吳忠佐) 등과 함께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1388년 8월 창왕의 생일을 맞아 사면으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389년(공양왕 1) 예부상서(禮部尙書)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평산·한천(漢川)에 퇴거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왕 재위 때에 법을 어기고 기강을 문란하게 한 죄로 이성계(李成桂) 일족(一族)인 낭사(郎舍) 허응(許應) 등의 탄핵을 받아 전주(全州)에 유배되었다.
사후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그 뒤 동양서원(東陽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