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偶齋) 이관후(李觀厚)의 자는 중립(重立), 본관은 벽진(碧珍), 출신지는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이다.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만구와(晩求窩) 이종기(李種杞)의 문인이다. 두 사람에게서 태극(太極)과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지내며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심재(心齋) 조긍섭(曺兢燮)과 교우하였다. 만년에 상우정(尙友亭)을 짓고 자연을 즐기다 여생을 마치니 향년 81세였다.
1869년(고종 6) 2월 27일에 태어나 1949년 7월 27일까지 생존한 일제강점기 유학자이다. 증조 이학신(李學新), 조부 이계철(李啓轍)이며, 부친은 희각(希覺) 이현기(李絢基)이다. 모친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정민(李正敏)의 딸이고, 생모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수(安洙)의 딸이다. 처부 여양진씨(驪陽陳氏) 진정식(陳廷植),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진규(金鎭奎)이다.
4권 2책, 석인본으로 1962년 손자 이해두(李海斗)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은 시 173수. 권2는 서(書) 42편, 잡저 5편, 서(序) 6편, 기(記) 9편. 권3에 발(跋) 5편, 명(銘) 2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제문(祭文) 20편, 애사(哀詞) 2편, 비명 2편, 묘갈명 4편, 묘표 2편. 권4에 행장(行狀) 2편, 행록 3편, 유사 9편, 전(傳) 1편, 부록으로 행장 · 묘갈명 · 묘지명 각 1편이다.
권1의 시는 173수인데, 그 중 만시가 117수이다. 나머지는 벗들과 교유한 시들과 월영대(月影臺), 관해정(觀海亭) 등을 유람하고서 감흥을 읊은 시들이다. 하지만 「문안수파효제불수휼금구수창녕경찰서(聞安守坡孝濟不受恤金拘囚昌寧警察署)」같은 경우는 안효제가 일본 정부가 주는 돈을 거절하여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불우함을 개탄하고 망국의 한과 민족의 울분을 토로하였다.
권2의 서는 42편이다. 대체로 배움을 청하거나, 안부를 묻거나 학문의 진전에 대해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상사미헌장선생(上四未軒張先生)」은 장복추(張福樞)에게 올린 편지인데, 학문하는 방법을 묻고 계속 지도해 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답남명부(答南明夫)」에서는 남창희(南昌熙)와는 『대학』, 『중용』 「태극도설(太極圖說)」 등에 대해 논의하여 경학가적 면모를 살필 수 있고, 「답이견가별지(答李見可別紙)」, 「여경수당중(與敬收堂中)」에서는 문안공(文安公) 이견간(李堅幹)을 제향(祭享)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잡저 5편 중 「갑오문답(甲午問答)」은 동학란으로 인해 어지러운 시절 부귀의 추구에 대해 제시하였다. 요즘 세상에 부귀를 추구했다가는 도적들에게 잡혀 죽게 된다는 혹자의 물음에 대해, 군자가 선행을 하여 얻은 부귀는 화가 오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만오설(晚悟說)」은 홍성호(洪性浩)가 젊어서 사우들에게서 칭찬을 들었다가 이후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 이를 뉘우치자 지어준 호설(號說)이다. 「녹리관감록(甪里觀感錄)」은 장복추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동안 그의 언행을 추려서 기록한 것이다.
기문은 가문의 재실에 대해 주로 지었으며, 서발문 및 제문은 의령 지역 유학자들에 대해 지어 그들의 학문적 성취와 학맥 등을 살필 수 있다.
서문은 6편인데, 「죽암시고서(竹巖詩稿序)」는 죽암(竹巖) 남극래(南極來)의 시고를 읽고, 그의 시가 평담(平淡)한 뜻과 부려(富麗)한 표현을 구사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음을 한탄하였다. 「낙봉정유계서(洛峯亭儒稧序)」 안식원(安植源)이 강학했던 낙봉정에 가서 그의 유풍을 이어받아 계회를 지내게 되었음을 서술하였고, 「동낙계서(東洛稧序)」 매년 초여름 인근의 6, 7 집안끼리 계를 결성하여 정의를 다지되 핵심 덕목은 양(讓)으로 삼자는 내용이다. 「만취일고서(晚翠逸稿序)」에서는 만취(晚翠) 이자익(李子翼)을 현세의 동중서(董仲舒)이지만 남긴 시문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기문 9편 중 「돈서당창건사실기(惇敘堂創建事實記)」는 집안에서 강학과 화목을 위해 집을 지어 봄가을로 『소학』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뽑아 읽기 위해 공동으로 돈을 출자하여 지은 돈서당(惇敘堂)에 대한 기문이고, 「경수당중수기(敬收堂重修記)」 문안공(文安公) 이견간(李堅幹)의 제단 옆에 지었던 경수당을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삼구정기(三苟亭記)」 당형 기옥(琪玉) 이영후(李永厚)가 지은 재실로 이름은 『논어』의 ‘그런대로 모여졌다.[苟合]’, ‘그런대로 갖추어졌다.[苟完]’, ‘그런대로 아름답다.[苟美]’에서 유래하였다. 「심수헌기(心守軒記)」는 어려서 천연두로 실명한 성문(聖文) 안승필(安承弼)에게 안식원(安植源)의 적장손으로 학문을 이었으니, 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한 글이다. 「상우정기(尙友亭記)」는 노부산(盧阜山)자락 율리(栗里)에 자신이 쉴 정자를 짓고 상우정이라고 이름한 연유에 대해 서술한 기문이다. 상우 옛사람을 벗 삼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옛사람은 율리에 살았던 도원명을 가리킨다. 즉 이관후와 도원명이 살았던 지명이 같은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권3의 발문에는, 기암(棄菴) 안국필(安國弼)의 『기암집(棄菴集)』에 대한 발문인 「기암유고발(棄庵遺稿跋)」, 이관후의 백형(伯兄)인 유일(惟一) 이중후(李中厚)의 『서강문집(西岡文集)』집의 발문인 「백형서강문집발(伯兄西岡文集跋)」, 표석준(表奭峻)이 심양을 다녀온 후 지은 유람기 『심유록(瀋遊錄)』에 대한 발문인 「서표주성심유록후(書表周聖瀋遊錄後)」 등이 있다.
「우재명(偶齋銘)」은 이관후의 자호명(自號銘)이다. 그는 우재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자신은 영리(營利)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 지킬 뿐이니 사람이면서 허수아비와 같다고 하였다.
「제사미헌장선생(祭四未軒張先生)」과 「제만구이선생문(祭晚求李先生文)」은 사미헌 장복추와 만구 이종기의 제문이다. 장복추에 대해서는 정주학을 깊이 공부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의 만변(萬變)에 남일처럼 여기지 않고 정일하였으며 의리(義利)를 터럭만큼도 용납하지 않은 유림의 교악(喬嶽)이라고 하였다. 이종기에 대해서는 장복추, 김흥락과 더불어 유학을 부흥하였으며 요순의 정치를 펼 수 있을 현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산림에 은둔하여 도를 품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그 외에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횡계(橫溪) 장석빈(張錫贇),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 성재(惺齋) 조병삼(曺秉杉), 위당(韋堂) 조용섭(曺龍燮), 하서(廈瑞) 변재현(卞宰鉉), 벽탄(碧灘) 이영후(李永厚), 소산(昭山) 이돈후(李敦厚), 무문헌(無聞軒) 이철후(李澈厚) 등 의령 지역 유림과 형제들의 제문을 지었다.
『우재집』은 의령 지역 유학자 이관후의 교유와 영남 지역 학맥에 대해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