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락유고 ()

유교
문헌
조선 후기, 학자 정동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38년에 간행한 시문집.
문헌/고서
편찬 시기
1938년
간행 시기
1938년
저자
정동환(鄭東煥)
편자
현손 정무원(鄭戊源)과 5세손 정운성(鄭雲成) 등
편저자
현손 정무원(鄭戊源)과 5세손 정운성(鄭雲成) 등
권책수
5권 5책
권수제
백락유고(白洛遺稿)
판본
석인본
표제
백락유고(白洛遺稿)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락유고』는 조선 후기 문인인 정동환의 시문을 편집한 문집이다. 시는 일상을 소재로 하거나 명승지를 유람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서문은 주로 초야에 은거한 선비들의 한적한 정취를 칭송한 내용이다. 책문에서는 당면 정치 과제, 논(論)은 당시 선비들이 부귀를 추구하는 모습과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한 현실 등을 주제로 삼았다. 저자의 사후 현손 등이 편집, 간행하면서 정동환의 아들과 증손의 문집까지 합쳐서 한데 엮었다.

정의
조선 후기, 학자 정동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38년에 간행한 시문집.
저자

백락(白洛) 정동환(鄭東煥)의 자는 여조(汝朝), 호는 백락(白洛), 본관은 영일(迎日)로, 송강 정철(松江鄭澈)의 7세손이다. 조부는 정일하(鄭一河), 부친은 정지(鄭榰). 모친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후손인 송거원(宋巨源)의 여식이다. 그의 아들이 쓴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 말이 둔하였지만 총명함은 남달랐다. 외조부 광산 김익화(金益火, 金益花)에게서 중국과 조선의 사적을 배웠다는 언급 외에는 특별한 사승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9세 백일장에 나가 수령에게 고문을 배운 가문의 맑고 곧은〔古家淸直〕 말이라고 칭찬받았고, 20세에 이순신의 후손인 이중수(李重秀)의 여식과 혼인하였다. 1780년(정조 4) 진천 백락촌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형제 중 조부의 초상과 부모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였으며, 형수의 장지(葬地)에 도벌(盜伐)이 횡행하자 서천 군수였던 여만영(呂萬永)에게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이 일로 정동환은 서울 인사들에게 인재(人才)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큰 형이 정동환을 보고 시경(詩經) 1부를 주고 3년 간 공부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시의 감식안이 높아 종종 사람들이 그에게 시평을 부탁하면 번번이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진천에서 은거하면서 이기설(理氣說)이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륜 등의 실천적 분야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과거를 보지 않았지만,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는 뛰어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1787년(정조 11) 소란이 일어나 관북부터 영해까지 부화뇌동하여 피란하는 사람들을 보고,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이 일어났을 때도 몇 달 내로 탕멸된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독서와 농사를 권면하였다. 이후 1829년(순조 29)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5권 5책으로 석인본이며, 1938년 현손 정무원(鄭戊源)과 5세손 정운성(鄭雲成)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5책 후미에 아들 정재한(鄭在暵)의 『누재유고(陋齋遺稿)』와 증손 정해규(鄭海逵)의 『과회당유고(寡悔堂遺稿)』가 합편되어 있다. 권두에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 송의섭(宋毅燮)의 서문, 권말에 정무원과 족손 정운학(鄭雲鶴)의 발문이 있다.

구성과 내용

권1은 5, 7언 절구(絶句), 5, 7언 율시(律詩)의 구성이며, 권2는 7언 율시, 5언 고시(古詩)(8), 7언 고시(1), 장단시(2), 서(11), 기(6)의 구성이다. 권3은 제문(祭文)(4), 행장(6), 론(4), 설(4), 상량문(上樑文)(1)으로, 권4는 문답(2), 책문(3), 변(辨)(2), 소(疏)(2), 서(2)로 구성되어 있고, 권5는 잡저(雜著)의 구성이다.

권1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가 있는데 일상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가 많다. 이는 「우감시(偶感詩)」, 「한양봉춘(漢陽逢春)」이나 옥천의 「과중봉묘사(過重峰廟祠)」등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특이한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칠월표선박어비인자칭영길리운(七月漂船泊於庇仁自稱英吉利云)」에서 7월에 영국의 선박이 비인(庇仁)의 앞 바다에 표류하여 온 것에 대한 시이다.

칠언절구(七言絶句)에는 개성을 여행하면서 명승지를 둘러보고 지은 시가 보인다. 「만아부(挽餓殍)」란 시에서는 당시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은 것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오언율시(五言律詩)에서 「몽시율곡선생(夢侍栗谷先生)」은 꿈에 율곡 이이를 보고 깬 뒤에 지은 시로 보이는데 절창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서적토평시(西賊討平詩)」는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다시 흉년이 올까 걱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독탄(獨歎)」에서는 당시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당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칠언율시(七言律詩)의 「문농부(問農夫)」와 「답농부(答農夫)」에서는 홍경래의 난으로 어지러웠던 당시 농민들의 입장을 말하였다.

권2에는 시, 서, 기가 있다. 시는 칠언율시가 대부분이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또 청주 지역의 12경을 소재로 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목령연화(牧嶺煙花), 작탄운수(鵲灘雲樹), 기암관어(機巖觀魚), 두타만흥(頭陀晚興), 석교조시(石橋朝市), 사천석연(斜川夕煙) 등 청주 주위의 경관을 읊었다. 이외에도 오언고시(五言古詩) 8수와 칠언고시(七言古詩) 1수, 장단시(長短詩) 2수가 있다. 오언고시에는 부인을 사별하고 지은 「관회(寬懷)」, 소인들이 득세한 행적만 모아 읊은 「음양곡(陰陽曲)」 등이 있고, 칠언고시는 오성(五性)과 칠정(七情)을 밝혀 수시로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경심가(警心歌)」가 있다.

서(序)는 11편이다. 「율리당서(栗里堂序)」는 이여장(李汝章)이 율리에서 살면서 당호를 율리당이라고 하였으니 그 이름이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율리(栗里)와 이름이 우연히 같아 그의 정취가 도연명과 같은 것임을 찬양하였다. 「안기서(安基序)」는 김한량(金漢良)이 청주 까치내의 북쪽 우산리(件山里) 안터에서 즐겁게 사는 것을 찬양하였다.

기는 6편이다. 「동강정사기(東岡精舍記)」는 진천 문백(文伯)의 정사(精舍)에 기문(記文)을 지어 준 것이고, 「송계유거기凇溪幽居記)」는 김영숙(金永叔)이 고향으로 이사한 데 대한 치사를 한 것이다. 「농와기(農窩記)」는 친구 홍경순(洪景純)이 기산에 살면서 세상의 명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농사에 힘쓴 것을 찬양하였고, 「경당기儆堂記)」는 김자용(金子用)의 당호로 경(敬) 자가 유교의 교양에서 수양의 근본이 됨을 잘 설명하였다. 「단은재기(淡隱齋記)」는 한회중(韓晦仲)의 담박한 생활을 찬양한 기문이고, 「쌍암정기(雙巖亭記)」는 친구 원중(元中)의 형제가 우애가 남달리 독실함을 칭송한 글이다.

권3은 제문, 행장, 론, 설, 상량문이 있다. 제문 4편은 송하상(宋賀相), 한달양(韓達養), 이필용(李必容) 등을 위해 지었고, 이어서 조부모, 부모, 부인, 효자 김집(金鏶)의 행장 6편이 있다.

논(論)은 4편으로, 「사론(士論)」에서는 경학하는 선비는 이기론(理氣論)으로 고상한 체하고 과거 공부하는 선비는 글장난을 하며 부귀를 바라며 양반이라는 선비는 문벌(門閥)을 자랑하니 큰 도적과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풍흉론(豊凶論)」에서 백성들은 풍년이 들어 배불리 먹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자신의 경우 풍년이 들자 찾아오는 친지 벗들이 없었던 상황을 예를 들어, 풍년이 들어도 도의를 가르치는 일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구취부가론(求娶富家論)」에서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 관례를 올리고 나면 부잣집 규수와 혼례를 하는데, 이에 대한 폐해를 논하였다. 「위신난논(爲臣難論)」에서는 신하노릇을 하기가 어려움을 논하였다.

설(說)은 4편으로, 「졸옹설(拙翁說)」에서 졸옹 김덕빈(金德彬)이 정조(正祖)의 승하 후 3년 동안 삭망에 곡을 한 일화를 적고 있다. 「해광설(海狂說)」은 신제경(申齊景)이 바다[海]를 자기 호로 삼은 이야기이다. 「어염설(魚鹽說)」에서는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있어 어염(魚鹽)의 시세가 저렴하였는데,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으로 국가에서 어염세(魚鹽稅)를 받게 되자, 관리들이 탐학해 자신들의 사리(私利)만 추구하고 백성을 위한 행정을 펴지 않은 까닭이라고 비판하고, 당시 지방관의 실정(失政)을 낱낱이 지적, 그 대책을 제시하였다. 「도적설(盜賊說)」에서는 당시의 부패한 정치를 유감없이 폭로하고 서민들의 고된 생활을 잘 표현하였다.

권4에는 문답, 책문, 변, 상소가 있다. 「주객문답(主客問答)」은 가상의 객과 문답식으로 주고받은 이야기다. 하늘 · 원기(元氣) · 천지도수(天地度數) · 지리(地理) · 택장(擇葬)부터 한신과 제갈량의 우열을 논하면서 한신이 우수한 장수임을 설파하거나, 다음은 이단과 종교에 대하여 논변하거나, 조선의 인물 중 재주와 덕이 겸비한 사람은 율곡 이이(栗谷李珥)라고 평가하거나, 상부(上富)는 운기를 타고 중부(中富)는 근면과 검소로 되는 것이라고 해명한 내용이다. 「소채전(蘇菜傳)」에서 소채는 희귀한 나물로, 친구가 저수지에서 이것을 캐오니 우암이나 동춘당처럼 인물이 나지 않을까 하고 기뻐한 내용이다.

책문은 3편으로 「여삼남어사김이성포적책(與三南御使金履成捕賊策)」은 삼남 지방의 반군을 진압하는 과정을 상책, 중책, 하책으로 나누어 진술하였다. 「무비팔책(武備八策)」은 서울의 방어와 과거 시험장의 경비, 각 읍 · 군병의 점검, 무과의 시험 선발 등 군사 행정에 관한 일을 8조목으로 나누어 그 대책과 시행 방법을 논술하였다. 「당금12책(當今十二策)」은 언론의 보장과 충직한 인재의 등용 등 당면한 정치 과제를 12개 조목으로 나누어 개진하였다.

변(辨)은 2편으로 「한사변(漢史辨)」은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와 촉한의 유비(劉備)를 견주어 우열을 논한 내용이고, 「이충무공변(李忠武公辨)」은 이이명(李颐命)이 충무공의 가승(家乘)의 발문에서 큰 공을 이루고 몸이 위태로울 것을 헤아려 전쟁터에서 시석을 피하지 않고 순국하였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라고 해명한 내용이다.

상소는 2편인데 그 중 「기자묘청봉릉소(箕子墓請封陵疏)」는 기자의 동래설을 확신하고 묘도 있으니 우리나라에 문명을 전한 사람이니 만큼 기자묘를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편지는 2편으로 「답유수재서(答兪秀才書)」는, 장자(莊子)가 말한 제해지(齊諧志)를 읽고 싶다는 유수재의 편지에 대해, 정동환이 제해지는 지금 있는 책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유학(儒學)의 서적인 우공(禹貢), 계사(繋辭), 월령(月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답한 내용이다. 「상보은현감서(上報恩縣監書)」는 저자의 동종(同宗)이 보은의 군적(軍籍)에 등록되었는데 이를 삭제하여 사족(士族)에 편입시켜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다.

「과규연혁(科揆沿革)」은 천지가 개벽한 후부터의 원회운세(元會運世)를 서술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 및 그에 대한 여러 학자 · 관원들의 건의 내용, 역대 인물들의 등과 연혁을 밝힌 것으로, 과거 제도의 연구에 참고 자료가 된다.

권5도 잡저이다. 「고어(古語)」에서는 천지의 운행과 생성(生成)의 원리를 유학자가 관측한 입장에서 말하고 일월성신과 태양의 운행을 설명하였다. 「산송설(山訟說)」에서는 산송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고 이를 개혁하여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평가와 의의

『백락유고』는 18세기 재야 문인이었던 정동환의 학문관과 그가 당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비판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원전

정동환, 『백락유고』

단행본

영동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충청북도 지역의 문집 해제』 (조율,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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