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야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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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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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내용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로 『동문선』 권19에 전한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또는 ‘농산정(籠山亭)’ ·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고도 불린다.

「제가야산」은 자연의 물소리에 의탁하여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를 멀리하고자 하는 은둔의 결의를 노래한 작품이다. 최치원은 연보에 그가 39세이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그 다음해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적어도 가야산에 은거한 40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지원(朴趾源)이 「함양군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에서 “고운(孤雲)이 일찍이 십사(十事)를 올려 임금에게 간하였으나 임금이 쓰지 않았다. 가야가 천령(天嶺)에서 백 리가 못 되는 가까운 곳이니 그 초연히 떠나간 것이 어찌 군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시무십여조’를 올렸을 때에 천령군수를 지냈고 거기서 곧 가야산으로 은거한 것이 된다.

최치원이 「제가야산」을 짓게 된 연기(緣起)가 이인로(李仁老)『파한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파한집』 권 중에, “ 고려태조가 등극할 줄 알고 글을 바쳐 주달(奏達)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가야산에 숨었다가 하루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간 뒤에는 그의 간곳을 알지 못하였는데……진상(眞像)을 그려 독서당(讀書堂)에 두었는데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사진이 독서당에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작품이 가야산 은거시절에 지어진 것은 틀림없다.

「제가야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사람들이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하여/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결구의 盡籠山(진롱산)이 ‘盡聾山(진롱산)’으로 유전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참고문헌

『계원필경(桂苑筆耕)』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파한집(破閑集)』
『동문선(東文選)』
『한국한시한문감상(漢詩漢文鑑賞)』(민병수, 우석,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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