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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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개념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시각장애인을 가리키는 민간용어. 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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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시각장애인을 가리키는 민간용어. 장님.
내용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하는데 지역에 따라 법사(法師)·경객(經客, 정각 또는 정각쟁이)·장님·복사(卜師)·경사(經師)·독경자(讀經者)·신장(神將)·신객(神客)·술객(術客) 등으로 다소 다르게 불린다.

판수라는 말은 사람의 운수를 판단한다는 뜻의 한자어 ‘판수(判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남자무당을 의미하는 알타이어‘박시(Paksi)’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우리말의 ‘박수’는 맹인이 아닌 남자무당을 지칭하고, 눈이 먼 남자무당은 ‘반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판수는 이 반수 중에서 점복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다.

법사는 원래 불법(佛法)에 정통하고 교법(敎法)의 사표가 되는 중을 일컫는 말이나, 충청도 일원에서는 점도 치고 경문을 읽는 남자 무당을 뜻하기도 한다. 흔히 ‘경객’이라고 불렸으나, 이는 천한 칭호라 하여 불교의 법사라는 용어를 차용하게 되었다.

이능화(李能和)는 판수를 고려의 유속(遺俗)이라고 한 바 있고, 손진태(孫晉泰)는 고려의 맹승(盲僧)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맹승이란 맹인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삭발(削髮)을 하고 점복뿐만 아니라 독경(讀經)도 하는 점쟁이를 말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齋叢話≫에 의하면 이들은 조선시대에 선사(禪師)라 불렸고, 서울에서는 명통시(明通寺:소경들의 구호기관)에 거처하면서 주로 독경을 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의 맹승은 점복과 독경을 같이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독경하는 선사와 점복하는 판수가 분화된 것을 알 수 있어 판수의 형성시기는 대체로 1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 筆苑雜記≫에 의하면 판수는 우리 나라에만 있다고 하였으며,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는 판수들의 점복은 중국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는 네 가지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용하다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패림 稗林≫에는 홍계관(洪繼寬)·유은태(劉殷泰)·함순명(咸順命) 등 조선 초기에 민간에서 유명하였던 판수들의 신통한 내용들이 실려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세종·세조가 판수에게 점을 치거나 관심을 보였던 기록들이 있다.

그리하여 재상(宰相)들도 판수에게는 ‘너’라고 반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중인의 대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관상감(觀象監)의 음양과(陰陽科)에 명과학(命課學:음양·길흉 점복에 관한 학문)을 담당하는 명과맹(命課盲:명과학을 담당하는 소경)이라는 직책을 두어 민간에서 활동하는 판수 중에서 선발하여 임용하니, 이들은 나라의 길흉에 대한 점을 쳐 예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명과맹들은 한말에 관상감이 폐지되면서 민간에서 활동하던 판수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판수들은 흔히 피리를 불거나 ‘문수(問數)요.’라고 외치면서 다니면 사람들이 불러 점을 치고 쌀이나 돈을 주었는데, 유명한 판수들은 자기집에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점을 쳐주었다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강신(降神)을 하게되면 가무(歌舞) 위주의 무당이나 박수로 성무(成巫)하는 것이 아니라, 독경을 배워 법사로 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 중에 장님은 거의 없다. 강신 체험 없이 법사가 되는 경우도 별로 없다.

대개는 남자들이 신(神)을 받은 후에 경문(經文) 위주의 앉은굿을 학습한다. 앉은굿의 제반 절차와 그와 관련된 재주는 선배 법사에게서 주로 학습한다. 그러나 독경은 불교사찰에서 배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훌륭한 법사는 “일청(一淸), 이고장(二鼓杖), 삼문서(三文書)”라 하여, 곧 항상 맑은 음성의 청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며, 고장을 정확히 익히며, 여러 경문에 두루 정통해야 한다. 이 외에도 전지(剪紙)와 관련하여 십대왕(十大王)·십이등(十二燈)·대설경·접설경·대철망·팔사리 따위를 제작하는 기술도 습득해야 한다.

법사는 주로 안택굿과 미친굿에 능하다. 1960년대 이전에는 많은 가정에서 봄과 가을에 안택굿을 정기적으로 했고, 집안에 별고가 있어도 안택굿을 수시로 행했다. 병점과 미친굿 등의 주술적 의료행위도 광범위하게 베풀어졌다. 특히 미친굿은 효험이 있다 하여 이 지역 법사는 전국적으로 불려다녔다.

근래에는 기주(祈主)의 종교적 욕구 변화, 집굿의 소멸, 유능한 법사의 감소, 만신의 비중 확대 등으로 전통적인 앉은굿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중에서도 신의(神意)를 가리는 신장대가림을 마을의 대잡이 대신에 선굿의 여성 무당이 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법사의 역할과 앉은굿의 구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법사와 그들이 행하는 앉은굿은 다른 형태의 무당과 굿에 비하여 매우 우세하다. 일반 사람들도 선굿은 꺼려하고 앉은굿을 매우 선호한다. 충청도의 무속에서 법사의 앉은굿은 가장 중심을 이룬다.

참고문헌

經巫考(徐大錫,, 文化人類學 1, 韓國文化人類學會, 1968)
盲覡考(孫晋泰, 孫晋泰先生全集 2, 太學社, 1981)
판수攷(金榮振, 民俗語文論叢, 啓明大學校出版部, 1983)
대전의 무속(이필영, 대전시사 3, 대전시사편찬위원회, 1992)
대전의 미친굿(이필영, 대전문화 제2호, 대전시사편찬위원회, 1993)
Korean Mudang and Pansu(Hulbert, H.B., The Korea Review 3-4, 1903)
집필자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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