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 ()

홍진 글씨
홍진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좌참찬,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희고(希古)
인재(訒齋), 퇴촌(退村)
시호
단민(端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1년(중종 36)
사망 연도
1616년(광해군 8)
본관
남양(南陽)
주요 관직
좌참찬|형조판서|판의금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중기에, 좌참찬,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訒齋) · 퇴촌(退村). 사성(司成) 홍이평(洪以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이고, 아버지는 명유 홍인우(洪仁祐)이며, 어머니는 청도군수 김희직(金希稷)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자가 되고 검열을 역임하였다. 1573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 해 유선록(儒先錄)에 실린 조광조(趙光祖)의 시가 몇 수 안 되는데, 새로 시 5수를 찾아 교서관에 보내 이를 보완하였다.

다음해 홍문관 박사가 되고 부수찬 · 정언을 거쳐, 1576년 헌납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승진했다고 인혐(引嫌: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함.)하였다. 그 뒤 1583년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589년 응교 재직중, 전염병이 만연하자 충청도에 파견되어 치제(致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그리고 좌부승지에 오른 뒤 우승지 · 좌승지선조의 측근에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듬해 9월 환도(還都)에 앞서 “경중인(京中人)의 진휼(賑恤)에 전력을 다하라.”는 특지(特旨)를 받고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다.

환도 후 염철사(鹽鐵使)를 겸임하면서, 경기 · 황해 · 충청 · 전라도 해변의 소금을 전국 각지에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1594년 진휼사를 겸하면서는 겨울 동안 얼어죽은 자가 나타날 것을 우려, 왜적이 소장했던 피복을 나누어 줄 것을 진언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고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하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 지춘추관사 겸 이조판서 · 예조판서 · 우참찬 ·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00년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빈전도감(嬪殿都監 제조(提調)가 되었다. 이어 좌참찬 · 형조판서 등을 거쳐 1604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09년(광해군 1) 관상감 제조가 되었으나, 북인이 집권하자 사퇴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퇴촌유고』가 있다.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택당집(澤堂集)』
『동계집(桐溪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기재잡기(寄齋雜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