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자가 되고 검열을 역임하였다. 1573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 해 유선록(儒先錄)에 실린 조광조(趙光祖)의 시가 몇 수 안 되는데, 새로 시 5수를 찾아 교서관에 보내 이를 보완하였다.
다음해 홍문관 박사가 되고 부수찬 · 정언을 거쳐, 1576년 헌납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승진했다고 인혐(引嫌: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함.)하였다. 그 뒤 1583년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589년 응교 재직중, 전염병이 만연하자 충청도에 파견되어 치제(致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그리고 좌부승지에 오른 뒤 우승지 · 좌승지로 선조의 측근에서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듬해 9월 환도(還都)에 앞서 “경중인(京中人)의 진휼(賑恤)에 전력을 다하라.”는 특지(特旨)를 받고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다.
환도 후 염철사(鹽鐵使)를 겸임하면서, 경기 · 황해 · 충청 · 전라도 해변의 소금을 전국 각지에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진언하였다. 1594년 진휼사를 겸하면서는 겨울 동안 얼어죽은 자가 나타날 것을 우려, 왜적이 소장했던 피복을 나누어 줄 것을 진언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고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하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 지춘추관사 겸 이조판서 · 예조판서 · 우참찬 ·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00년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빈전도감(嬪殿都監 제조(提調)가 되었다. 이어 좌참찬 · 형조판서 등을 거쳐 1604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09년(광해군 1) 관상감 제조가 되었으나, 북인이 집권하자 사퇴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퇴촌유고』가 있다. 시호는 단민(端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