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은희성(殷熙聖)이 주관하여 군위(軍威)의 동암정(東巖亭)에서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홍락(金鴻洛)의 서문, 권말에 이수락(李洙洛) · 은기표(殷箕杓)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10여수, 권2에 서(書) 29편, 잡저(雜著) 8편, 권3에 서(序) 7편, 묘갈명 1편, 유사 1편, 제문(祭文) 8편, 권4에 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봉독퇴계선생언행록감부일절(奉讀退溪先生言行錄感賦一絶)」, 「화와강회차남병서장일운삼절(華窩講會次南屛棲丈一韻三絶)」 등 독서와 강학(講學)을 하면서 여가 틈틈이 지은 것이 대부분이며, 만시와 함께 주1, 화답시, 주2가 주를 이룬다. 형식은 7언율시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중 「봉열백계선생유집득사절운추부(奉閱栢溪先生遺集得四絶韻追賦)」는 학자로 이름난 백계(栢溪) 은정화(殷鼎和)의 문집에서 얻은 운자로 읊은 ‘훈징분(訓懲忿)’, ‘계언어(戒言語)’, ‘면충후(勉忠厚)’, ‘면친친(勉親親)’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삶의 중점을 어디에 두고 살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이다. 「화와육경(華窩六景)」은 저자가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마암반조(馬巖返照)’, ‘이암어화(鯉巖漁火)’, ‘사암목적(獅巖牧笛)’, ‘호암노송(虎巖老松)’, ‘인암약천(麟巖藥泉)’, ‘구암관창(龜巖觀漲)’으로 읊은 것이다. 「팔고인(八古人)」은 ‘봉고인(逢故人)’, ‘애고인(愛故人)’, ‘유고인(留故人)’, ‘별고인(別故人)’, ‘사고인(思故人)’, ‘대고인(待故人)’, ‘원고인(怨故人)’, ‘책고인(責故人)’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는 일상 안부나 독서 소감을 적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 「답홍순교재관별지(答洪舜敎在寬別紙)」는 『중용』의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일일이 답한 것으로, 저자의 경학을 살피기에 좋은 자료이다. 만각재 홍범구에게 보낸 「여홍만각재(범구)(與洪晩覺齋(範九))」는 지난번에 가르침을 받은 내용 가운데 「문왕무우이군자유종신지우(文王無憂而君子有終身之憂)」, 「차왈수우필명논어왈하우불이(此曰雖愚必明論語曰下愚不移)」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그밖에 세상이 변하는 것에 대한 개탄과 학문적 견해를 담아 시랑(侍郞) 강진규(姜晉奎), 홍택주(洪宅疇), 장석룡(張錫龍) 등에게 보낸 편지가 다수 있다.
잡저(雜著) 가운데 「시남유교목설(詩南有喬木說)」은 『시경』 ‘한광(漢廣)’의 「남유교목(南有喬木)」을 풀이한 것이다. 잔가지 없이 죽 뻗은 나무를 단정한 여자에 비유해 풀이한 글이다. 그밖에는 대부분 위정자가 정사를 하는 데 있어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을 언급한 것으로, 「서덕유선정설(書德惟善政說)」은 『서경』의 글귀를 빌어 덕으로 선정을 베풀어야 하는 정당성을 설명한 것이다. 「천명자도(天命自度)」는 임금이 천명으로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는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용고외우민암(用顧畏于民巖」은 백성의 고통을 생각해 바른 정사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며,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는 학정의 고통을 역사 전고를 들어가며 설명한 것이다.
서(序)는 「고모담서(孤慕潭序)」, 「독성재서(獨醒齋序)」, 「남은재서(南隱齋序)」 등 대부분 향리에 은거하면서 주변 경관과 지인들의 처소가 주는 의미를 기술한 것이다. 유사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부록에는 이인긍(李寅兢) 외 50인의 만사, 이원재(李元在) 외 11인의 제문, 송준필(宋浚弼)의 행장, 아들 은봉상(殷鳳祥)의 유사, 1922년 김재경(金在敬)이 쓴 유사후소지(遺事後小識), 1931년 이정기(李貞基)가 쓴 행록, 장석신(張錫藎)의 묘갈명, 홍재관(洪在寬)의 묘지명 등이 있다.
또한, 김두현(金斗鉉)이 군위향교를 대표해 저자의 표창을 상신한 「군위향교통도산도회소문(軍威鄕校通陶山道會所文)」, 이창재(李菖在) 등 58인이 군수 장한기(張漢基)에게 표창을 상신한 「일군사림정장군수한기장(一郡士林呈張郡守漢基狀)」, 비슷한 내용인 「일군사림정신관찰태휴장(一郡士林呈申觀察泰休狀)」 · 「일도신보정이관찰근호장(一道紳甫呈李觀察根澔狀)」, 이에 대한 답인 신태휴(申泰休)의 「정장례원단자(呈掌禮院單子)」, 그밖에 「본군향교사림정삼강록속수도약장조보국병식장(本郡鄕校士林呈三綱錄續修都約長趙輔國秉式狀)」 등이 실려 있다.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의 글들을 통해 급변하던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 사이 전통 유학자의 학문적 관심과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