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상」은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그린 조선 시대 초상화이다. 주자학의 대학자였던 송시열의 서원 제향을 위해 그의 초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 초상은 그정조의 어제 화찬이 있는 「송시열 초상」을 바탕으로 그려진 이모본 중 하나이다. 「송시열상」은 74세 이후 송시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심의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를 한 좌안칠분상이다. 깊게 팬 얼굴 주름, 구부정한 자세, 덥수룩한 수염, 강한 눈썹, 어두운 얼굴색이 표현되었다. 「송시열상」은 이모본 중 인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송시열의 초상은 심의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를 한 좌안칠분상이다. 깊게 팬 얼굴 주름은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을 잘 보여주는 듯하며, 구부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다소 과장된 체구는 조선 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巨儒)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덥수룩하게 늘어진 그의 흰 수염은 그의 강한 눈썹 및 어두운 얼굴색과 대조를 이룬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후 갈색 세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간결하게 선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물의 얼굴에 전체적 초점을 두었다.
이 초상은 송시열의 자경문(自警文)과 1778년 정조의 어제 화찬이 있는 「송시열 초상」(국보, 1987년 지정)을 바탕으로 그려진 이모본(移模本)이다. 초상화 위에 화찬이 없어 정확한 제작시기를 밝히기 어렵지만, 화풍으로 보아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창협과 권상하의 찬문이 있는 김창업 필 「우암선생칠십사세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과 비교할 때, 이 초상화는 74세 이후 송시열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였다. 자는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강력한 지배 이념이 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화친이 이루어지자 낙향하였다. 곧 효종의 대군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효종에게 발탁되어 북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으나 효종의 붕어로 무산되었다.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송시열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었으나, 그 후에도 논란은 지속되었다. 현종도 그를 신임하여 이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임명하였지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에 대한 논란으로 사임하고 화양동에서 은거하였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강학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였다. 이후 우의정으로 복직되었으나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대에 이르러 귀양살이를 하였다가 영중추부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1689년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인한 기사환국으로 제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사사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복권되었고, 1744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어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확고히 공인받게 되었다. 송시열은 화양서원을 비롯하여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 될 만큼 사후에도 조선 후기 정치, 사회,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초상화는 송시열 사후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이들에 의해 전국 각지에 서원 · 영당 등이 건립됨에 따라 그곳에 봉안하기 위해 1778년에 제작된 「송시열 초상」을 원본으로 이모하여 제작한 것이다. 송시열 초상화의 이모본 중 인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