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승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행진하다 일제와 충돌하면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소장 등을 처단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기독교 신자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강서군 반석면(班石面) 반육리(班六里)에 있던 장로교 계통의 반석교회 신자였다. 이규승(李奎承)이라고도 한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지역은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인근의 사천(沙川) 지역에서도 장로교 계통의 반석교회, 원장교회, 사천교회, 산수리교회 등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3월 1일, 우연히 평양에 들렀던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평양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반석교회의 최능현(崔能賢) · 백이옥(白履玉), 원장교회 장로 고지형(高志亨) · 윤상열(尹相悅)을 만나 평양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의 계획은 원장교회와 반석교회가 함께 시위를 주도하고, 날짜는 사천시장 장날인 3월 4일로 정하였다.
다음날 조진탁은 사천교회의 목사 송현근(宋賢根)에게 함께 참여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원장교회의 장로 임이걸(林利杰)은 평양으로 가서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준비해왔다. 또한, 이들은 4일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산수리교회에도 참여를 당부하는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사천 헌병주재소 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진해(金鎭海)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고, 송현근은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원래 계획했던 사천시장에서의 만세시위는 취소되고 시위 장소가 원장리에 있는 협성학교로 변경되었다.
3월 4일 오전 10시 협성학교에서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으며, 임이걸은 “우리의 힘으로 자주독립하여야 할 것이며 독립을 해야 살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난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하였고, 참여 군중은 보통학교 학생들을 포함에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송현근과 최능현의 호소에 따라 사천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주재소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사천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기다라고 있던 주재소원들은 군중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고, 윤도관(尹寬道) · 현경묵(玄景黙) · 윤창도(尹昌道) 등 11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흥분한 시위대도 주재소를 불태웠으며, 소장 사토 지쓰고로[佐藤寬五郞]와 헌병보조원 박효섭(朴堯燮), 강병일(姜炳一), 김성규(金聖奎)를 처단하였다. 이후 일제는 시위 관련자 40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49명을 평양 검사국으로 송치하였는데, 이규승(李奎昇)도 이때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소요죄, 방화, 살해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았으며,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1월 4일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2월 6일 역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만기 출옥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