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룡 천자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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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천자문과 간행의 시기, 책의 구성, 체제와 한자, 음석풀이의 글씨 크기 등이 유사한 목판본 1책.
문헌/고서
저자
이해룡
내용 요약

이해룡 천자문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한석봉 천자문과 비교할 때 간행의 시기나 책의 구성, 체제와 한자나 음석풀이의 글씨 크기가 유사한 목판본 1책이다. 책의 간행과 편집, 본문의 글씨를 쓴 사람은 북악(北岳) 이해룡(李海龍)으로 선조 34년(1601)에 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자관으로 경전을 베끼는 여가에 자식을 위하여 쓴 것이라고 책의 권말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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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석봉 천자문과 간행의 시기, 책의 구성, 체제와 한자, 음석풀이의 글씨 크기 등이 유사한 목판본 1책.
내용

이해룡 천자문(李海龍 千字文)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한석봉 천자문과 비교할 때 간행의 시기나 책의 구성, 체제와 한자나 음석 풀이의 글씨 크기가 유사한 목판본 1책이다. 책의 간행과 편집, 본문의 글씨를 쓴 사람은 북악(北岳) 이해룡(李海龍)으로 선조 34년(1601)에 홍문관에 있으면서 사자관으로 경전을 베끼는 여가에 자식을 위하여 쓴 것이라고 책의 권말에 밝히고 있다. 그의 호는 북악(北岳), 자는 해수(海叟)이며 명종 1년(1546)에 태어나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계림부에 은거할 때 황휘지의 필첩을 얻어 따라 쓰기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문에는 한 대의 빠짐도 없이 10대를 이어 사자관과 서예 가문으로 대를 이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해룡은 선조 때 국가에서 사대교린의 문서를 작성할 사람을 구할 때 서사(書寫)의 직을 받았으나 왕이 명을 거둠으로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때 입시하여 올린 시귀(詩句)를 왕이 보고 상을 내려 받기도 하였다.

그는 양주에 거처하면서 선조 21년(1588)에는 황윤길, 김성일과 함께 통신사의 사자관으로 일본에 가서 많은 글을 남기고 돌아왔으며, 그 후 중국으로 보내는 문서 작성에 자주 참여하였다.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임난전 당시의 외교에서 중국과 일본은 물론 조정을 드나들면서 막중한 국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통사(通事), 역관(譯官), 사자관(寫字官) 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들로부터 한석봉(韓石峰)에 필적하는 명필로 격찬을 받았고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다. 또한 이 판본의 천자문 외에도 선조의 명에 의해 『천자문』을 써서 올렸으며, 1614년(광해군 6)에는 왕이 경천군 이해룡에게 하사한 토지를 침범하거나 벌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세운 경천군 사패 송금 물침비(慶川君賜牌松禁勿侵碑)로 국왕의 인정과 보호를 받았다.

특히 1598년에 선조가 되는 백사 이항복, 월사 이정구가 무고를 받은 것을 변호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갔을 때 이정구가 정문(呈文)을 작성하면서 등불이 없어 어두워 작성을 꺼리므로 이해룡이 어두운 가운데 문장을 부르는 대로 글을 써 중국 예부에 올려 사신이 구속되는 상황을 해결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광국, 호성, 선무공신의 녹권을 받았다. 그의 이력은 서사침랑(筮仕寢郞),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 은율현감(殷栗縣監), 경천군(慶川君)을 거쳐 판돈녕(判敦寧)에 증직되었다.

책의 표지에는 ‘북악필적(北岳筆蹟)’이라는 묵서가 있고 판면은 사주쌍변(四周雙邊)에 판심은 아래위 유문어미(有紋魚尾)로 17세기 판본의 특징을 나타낸다. 판심제와 권수제인 『천자문』 뒤에서부터 한 면에 대자로 3행 4자씩의 한자를 배열하고 각 글자 아래에는 한글 음과 풀이를 기록하였으며 한자의 모서리에 성조(聲調)를 작은 원점으로 표시하였다.

한글의 풀이는 석봉의 천자문과 비교할 때 표기법에서 약간의 차이(초성, 종성 모두 ‘ㆁ/ㅇ’의 혼재)는 있으나 대체로 대동소이하고 다만 성조 표시는 이 판본에서 더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밖에 ‘ㅡ와 ㅗ, ㅜ’의 교체나 한자의 경우에도 이 책에서는 ‘降/ᄂᆞ일강, 宵/밤쇼’가 다른 판본에서는 ‘絳/블글강, 霄/하ᄂᆞᆯ쇼’로 교체되어 있는 등 약간의 이체자나 표기가 다른 부분도 있다.

같은 천자문으로 유명한 석봉(石峯) 한호(韓濩)승문원의 사자관으로 이해룡과 같은 역할을 하여 당대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들이 남긴 천자문은 우리나라에서 한자 교육을 위한 초급 교재로 널리 쓰였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간행하여 보급하였던 것은 물론 개인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육용으로 쓰인 교재였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글자마다 한글로 음과 훈을 달았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주석이 있는 판본은 광주판 천자문이다. 대표적인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은 목판본과 목활자판의 2종류가 알려져 있고 그밖에 설명을 추가한 『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 등도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논문

남권희, 「北岳 李海龍의 千字文」(『문헌과 해석』 6, 문헌과 해석사, 1999)
林東錫, 「『천자문』의 원류, 내용 및 한국에서의 발전상황 고찰」(『중국어문학논집』 56, 중국어문학연구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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