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감리교"
검색결과 총 23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길(냉천동)에 있는 사립 신학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監理敎神學大學校)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길(냉천동)에 있는 사립 신학대학교.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북로 88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
목원대학교 (牧園大學校)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북로 88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
해방 이후 하와이 총영사, 서울 중앙교회 목사 등을 역임한 목사.
김영섭 (金永燮)
해방 이후 하와이 총영사, 서울 중앙교회 목사 등을 역임한 목사.
해방 이후 『고린도전서』, 『신약개론』,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을 저술한 신학자. 목사.
김용옥 (金龍玉)
해방 이후 『고린도전서』, 『신약개론』,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을 저술한 신학자. 목사.
김응태는 일제강점기, 감리교 목사이다. 동대문교회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에 이어서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감리교 호헌파 총회 감독을 지냈다.
김응태 (金應泰)
김응태는 일제강점기, 감리교 목사이다. 동대문교회와 인천 내리교회 등에서 목회했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기남교구장(1941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전도국장(1943년)에 이어서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 부통리자로 임명되어 일제의 종교 정책에 협력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감리교 호헌파 총회 감독을 지냈다.
김종우는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사로 기독교조선감리회 3대 감독을 역임한 목사이다. 1901년 9월 세례를 받고 1907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접했다. 은혜의 체험으로 훗날 유명한 부흥사와 목회자로 성공하였다.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목회 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체 조선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며, 부흥회를 계속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
김종우 (金鍾宇)
김종우는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사로 기독교조선감리회 3대 감독을 역임한 목사이다. 1901년 9월 세례를 받고 1907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접했다. 은혜의 체험으로 훗날 유명한 부흥사와 목회자로 성공하였다.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목회 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체 조선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며, 부흥회를 계속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
기독교 감리교회 여선교회의 지방의회.
계삭회 (季朔會)
기독교 감리교회 여선교회의 지방의회.
『신학세계』는 1916년에 창간된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교) 기관지이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1916년 2월 계간지로 창간했다가 1918년 1월부터 격월간으로 발행하였다. 1940년 8월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면서 『신학세계』도 폐간되었다. 해방 후 1952년 10월 속간되었지만 1955년 11월 제30권 1호를 낸 후 더 이상 발간하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1975년 『신학과 세계』란 제호로 다시 발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학세계 (神學世界 The Theological World)
『신학세계』는 1916년에 창간된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교) 기관지이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1916년 2월 계간지로 창간했다가 1918년 1월부터 격월간으로 발행하였다. 1940년 8월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면서 『신학세계』도 폐간되었다. 해방 후 1952년 10월 속간되었지만 1955년 11월 제30권 1호를 낸 후 더 이상 발간하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1975년 『신학과 세계』란 제호로 다시 발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하영 (吳夏英)
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성범은 해방 후 세계종교사학회 실행위원,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한국종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해방 후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적 신학’을 제창하며 1960~1970년대 장로교 신학자들과 ‘토착화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윤성범 (尹聖範)
윤성범은 해방 후 세계종교사학회 실행위원,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한국종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해방 후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적 신학’을 제창하며 1960~1970년대 장로교 신학자들과 ‘토착화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부흥강사로 활동하고 예수교회를 창설한 감리교 목사이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후 예수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했던 신비주의 부흥운동가였다. 주변에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으며 소속했던 감리교회로부터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별세 직전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선도감이 되었다.
이용도 (李龍道)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부흥강사로 활동하고 예수교회를 창설한 감리교 목사이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후 예수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했던 신비주의 부흥운동가였다. 주변에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으며 소속했던 감리교회로부터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별세 직전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선도감이 되었다.
정경옥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제적당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항일 비밀결사 보향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서울 협성신학교와 미국 게릿신학교,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진보적 신학을 강의하였다.
정경옥 (鄭景玉)
정경옥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제적당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항일 비밀결사 보향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서울 협성신학교와 미국 게릿신학교,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진보적 신학을 강의하였다.
1900년, 조원시가 선교사나 초기 한국인 지도자들의 활동 등을 알리기 위하여 발행한 신학 잡지.
신학월보 (神學月報)
1900년, 조원시가 선교사나 초기 한국인 지도자들의 활동 등을 알리기 위하여 발행한 신학 잡지.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개신교의 입장에서 천주교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역술한 개신교서.
예수천주양교변론 (←Jesus天主兩敎辯論)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감리교 목사 최병헌이 개신교의 입장에서 천주교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역술한 개신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에서 교회 구성원들 상호간의 정보 교류를 위하여 1933년에 창간한 신문. 개신교신문.
조선감리회보 (朝鮮監理會報)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에서 교회 구성원들 상호간의 정보 교류를 위하여 1933년에 창간한 신문. 개신교신문.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상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협성대학교 (協成大學校)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상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1913년 설립된 원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原州Severance基督病院)
1913년 설립된 원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강화중앙교회는 1900년 강화도에 설립된 감리교회이다. 홍의교회에 다니던 주선일과 그의 인척들이 1900년 9월 1일에 강화읍 신문리 144번지에 6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 예배처로 사용해 첫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교회 부설 잠두의숙이 신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08년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로 개칭되었다. 1909년에는 부설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 명칭은 강화읍잠두교회에서 강화읍교회로 바뀌었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명칭인 강화중앙교회로 개칭되었다.
강화중앙교회 (江華中央敎會)
강화중앙교회는 1900년 강화도에 설립된 감리교회이다. 홍의교회에 다니던 주선일과 그의 인척들이 1900년 9월 1일에 강화읍 신문리 144번지에 6칸 반짜리 초가집을 사 예배처로 사용해 첫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교회 부설 잠두의숙이 신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1908년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로 개칭되었다. 1909년에는 부설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 명칭은 강화읍잠두교회에서 강화읍교회로 바뀌었으며, 1976년에 현재의 명칭인 강화중앙교회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인생안내』, 『세속 속의 크리스천』 등을 저술한 신학자.
홍현설 (洪顯卨)
해방 이후 『인생안내』, 『세속 속의 크리스천』 등을 저술한 신학자.
조선기독청년동맹은 1945년 8월 19일 창립된 장로교·감리교 기독청년들의 연합조직이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를 지지하며 신탁통치와 단정수립에 반대했다. 귀환동포를 위한 모금 및 숙식 제공, 해방 기념 예배, 미군 환영 행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7년 세계기독청년대회,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국제 연대도 모색했다. 1948년 교파환원 결정으로 해산되었지만, 해방 후 최초의 기독청년 연합단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기독청년동맹 (朝鮮基督靑年同盟)
조선기독청년동맹은 1945년 8월 19일 창립된 장로교·감리교 기독청년들의 연합조직이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를 지지하며 신탁통치와 단정수립에 반대했다. 귀환동포를 위한 모금 및 숙식 제공, 해방 기념 예배, 미군 환영 행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7년 세계기독청년대회,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국제 연대도 모색했다. 1948년 교파환원 결정으로 해산되었지만, 해방 후 최초의 기독청년 연합단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