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건국훈장_애국장"
검색결과 총 149건
권애라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때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회의 한민족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 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에서 지하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애라 (權愛羅)
권애라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때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회의 한민족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 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에서 지하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앙주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 진동, 진북 독립만세운동인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삼진의거에 군중들이 몰려들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수동 등 7명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고앙주 (高昻柱)
고앙주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 진동, 진북 독립만세운동인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삼진의거에 군중들이 몰려들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수동 등 7명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곽영준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백 매를 시장에 집합한 군중에게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뒤로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어 7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곽영준 (郭英俊)
곽영준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백 매를 시장에 집합한 군중에게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뒤로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어 7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구수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휴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되었다. 1920년 5월 1일 나이 20세로 순국하였다.
구수암 (具壽巖)
구수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휴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되었다. 1920년 5월 1일 나이 20세로 순국하였다.
권채근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1월 2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채근 (權采根)
권채근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1월 2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도주는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만세운동 시위대는 주재소 및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 그리고 각종 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임하면 남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도주 (金道周)
김도주는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만세운동 시위대는 주재소 및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 그리고 각종 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임하면 남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김수동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 진동, 진북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인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를 주도하였다. 만세시위 중 김수동을 포함한 시위 군중 8명이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수동 (金守東)
김수동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창원군 진전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 진동, 진북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인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를 주도하였다. 만세시위 중 김수동을 포함한 시위 군중 8명이 일본 경찰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영환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 진북면 독립만세운동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수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일본 경찰이 쏘는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영환 (金永煥)
김영환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 진북면 독립만세운동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수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일본 경찰이 쏘는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재화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의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진주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였다. 3월 18일 진주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3년형의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의 집행이 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출감 직후 순국하였다.
김재화 (金在華)
김재화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의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진주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에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였다. 3월 18일 진주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3년형의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의 집행이 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출감 직후 순국하였다.
김호현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 진북면 독립만세운동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수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일본 경찰이 쏘는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호현 (金浩鉉)
김호현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동면 · 진북면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 진전면, 진동면, 진북면 독립만세운동 이른바 ‘삼진의거(三鎭義擧)‘에 참여하였다. 수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에 가담하였다. 일본 경찰이 쏘는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고대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양양에서 일어난 3 · 1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면사무소에서 어성전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기사문리 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습격하였다. 출동한 보병과 일경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고대선 (高大先)
고대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양양에서 일어난 3 · 1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 현북면 면사무소에서 어성전리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기사문리 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습격하였다. 출동한 보병과 일경들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박유복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수신면 복다회리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격을 받아 다음날인 4월 2일 순국하였다.
박유복 (朴有福)
박유복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수신면 복다회리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격을 받아 다음날인 4월 2일 순국하였다.
이소제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아우내 장터에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고, 남편 유중권이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일본 헌병에게 항의하다가 역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소제 (李少悌)
이소제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아우내 장터에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고, 남편 유중권이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일본 헌병에게 항의하다가 역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정철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아들 김구응의 순국을 일본 헌병들에게 항거하다가 총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최정철 (崔貞徹)
최정철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아들 김구응의 순국을 일본 헌병들에게 항거하다가 총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구응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천안군 진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유관순을 만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 듣고 동지들과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아들의 순국 소식을 듣고 현장에 온 어머니 최정철까지 일본 헌병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김구응 (金球應)
김구응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천안군 진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유관순을 만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 듣고 동지들과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아들의 순국 소식을 듣고 현장에 온 어머니 최정철까지 일본 헌병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김병준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이원군 이원읍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원군 동면에 있는 이원천도교구실 교구장이었으며, 3월 10일 이원군 이원 읍내에서 천도교 신도들과 함께 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이원 참사와 독판부 이원 참사로 활동하였다.
김병준 (金秉濬)
김병준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이원군 이원읍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원군 동면에 있는 이원천도교구실 교구장이었으며, 3월 10일 이원군 이원 읍내에서 천도교 신도들과 함께 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이원 참사와 독판부 이원 참사로 활동하였다.
김상갑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8일부터 독립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하여 3월 10일 천도교 교도와 주민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시위대에 주민들이 합류해 대규모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들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김상갑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상갑 (金尙甲)
김상갑은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 읍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8일부터 독립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하여 3월 10일 천도교 교도와 주민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시위대에 주민들이 합류해 대규모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들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김상갑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상헌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시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서울에서 귀가한 유관순 일가가 중심이 되어 갈전면과 수신면 주민들이 참여해 아우내 장터로 모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상헌은 수신면 복다회리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으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 헌병들의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상헌 (金尙憲)
김상헌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시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서울에서 귀가한 유관순 일가가 중심이 되어 갈전면과 수신면 주민들이 참여해 아우내 장터로 모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상헌은 수신면 복다회리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으나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 헌병들의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순구는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청주군 강내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귀가하여 4월 8일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에서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서화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피신 중에 주민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옥천 헌병분대에 출두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순구 (金舜九)
김순구는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서 일어난 3 · 1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청주군 강내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귀가하여 4월 8일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에서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서화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피신 중에 주민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옥천 헌병분대에 출두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자희는 일제강점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에서 400명의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자 헌병들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였다. 김자희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순국한 8명을 기리는 팔열각이 현장 부근에 세워졌다.
김자희 (金自喜)
김자희는 일제강점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에서 400명의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자 헌병들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였다. 김자희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순국한 8명을 기리는 팔열각이 현장 부근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