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고려공산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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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는 일제강점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으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다.
김정하 (金鼎夏)
김정하는 일제강점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으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에서 조선민족부 교관을 지냈다.
김철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파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한 서울신파이다. 고려공산청년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합청(合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김철 (金哲)
김철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파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한 서울신파이다. 고려공산청년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합청(合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한 (金翰)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박윤세는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분열된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중국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박윤세 (朴允世)
박윤세는 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분열된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중국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김호반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말경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경남도책을 맡았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을 맡았다. 1931년 2월 함흥질소비료회사의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호반 (金鎬盤)
김호반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5년 말경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경남도책을 맡았으며,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을 맡았다. 1931년 2월 함흥질소비료회사의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박형병은 8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고, 1923년 북성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4년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ML파에 반대하여 1927년 12월 서상파 조선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등을 번역하였다.
박형병 (朴衡秉)
박형병은 8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 중 유학생 운동에 참가하고, 1923년 북성회를 조직했다. 귀국 후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4년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고,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ML파에 반대하여 1927년 12월 서상파 조선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등을 번역하였다.
남공선은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원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의 기관지 『한족공보』의 주필과 하바롭스크에서 발행하던 한글 신문인 『선봉(先鋒)』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집행위원을 지낸 바 있다.
남공선 (南公善)
남공선은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원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의 기관지 『한족공보』의 주필과 하바롭스크에서 발행하던 한글 신문인 『선봉(先鋒)』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집행위원을 지낸 바 있다.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고광수 (高光洙)
고광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이며, 1921년 3·1운동 기념 반일 선전물을 배포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대한혁명의용군에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9년 지린에서 재조직된 ML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9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0년에 사망하였다.
신철은 북풍파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코르뷰로의 국내 공작원으로 입국하여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김약수 등과 까엔당이라는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였다. 북풍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철 (辛鐵)
신철은 북풍파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코르뷰로의 국내 공작원으로 입국하여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김약수 등과 까엔당이라는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였다. 북풍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오설 (權五卨)
권오설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권오직은 북한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 북한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3년 청년운동에 투신한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두 번의 수형 생활(1930년 6년형, 1939년 8년형)을 치른 후 광복을 맞아 출감하였다. 광복 직후 재건조선공산당 및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약하다가 북한으로 피신해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을,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박헌영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후 평안북도 삭주의 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권오직 (權五稷)
권오직은 북한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 북한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3년 청년운동에 투신한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두 번의 수형 생활(1930년 6년형, 1939년 8년형)을 치른 후 광복을 맞아 출감하였다. 광복 직후 재건조선공산당 및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약하다가 북한으로 피신해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을,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박헌영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후 평안북도 삭주의 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이문홍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남만청년총동맹의 교육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함경도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활동가들과 공동 투쟁을 전개하였다. 8·15광복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고, 사회노동당과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였다.
이문홍 (李文弘)
이문홍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남만청년총동맹의 교육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함경도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태평양노동조합 계열의 활동가들과 공동 투쟁을 전개하였다. 8·15광복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고, 사회노동당과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였다.
이정윤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로, 『전진』을 발행하였고, 북성회에서 활동하였다.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에 참가하였다. 8·15광복 전후 영등포를 거점으로 하는 적기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운영에 반대하였다.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사회노동당에 참여하였다.
이정윤 (李廷允)
이정윤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로, 『전진』을 발행하였고, 북성회에서 활동하였다.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사회주의운동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에 참가하였다. 8·15광복 전후 영등포를 거점으로 하는 적기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운영에 반대하였다.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사회노동당에 참여하였다.
이우적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대중신문』과 『이론투쟁』의 기자이자, 『대중신문』과 『현계단』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장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우적 (李友狄)
이우적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대중신문』과 『이론투쟁』의 기자이자, 『대중신문』과 『현계단』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장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공산당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공산당함경남도 책임비서, 평안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관료.
정달헌 (鄭達憲)
일제강점기 때, 조선공산당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선공산당함경남도 책임비서, 평안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관료.
한사빈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회 만주총국 남만지방 선전부 책임자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 간부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흥남공산주의자그룹과 흥남적색화학노동조합 책임자로, 이른바 신지도이론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사빈 (韓士斌)
한사빈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회 만주총국 남만지방 선전부 책임자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 간부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흥남공산주의자그룹과 흥남적색화학노동조합 책임자로, 이른바 신지도이론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황태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20년대 김천과 상주 등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년을,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황태성 (黃太成)
황태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20년대 김천과 상주 등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년을,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재일한인 공산주의단체인 일월회에서 이론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6년에 창간한 신문. 기관지.
대중신문 (大衆新聞)
재일한인 공산주의단체인 일월회에서 이론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6년에 창간한 신문. 기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