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윤(李廷允)은 1897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에서 태어나 서울 오성(五星)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명은 이정두(李廷斗) · 이현수(李賢樹) · 이윤수(李允樹)이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예비과를 거쳐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11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총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문서를 배포하다 검거되었다. 1922년 1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 9개월 형을 선고받고 11월 만기 출옥하였다. 사회주의자인 다카츠 마사미치〔高津正道〕와 밀접한 관계로, 그가 주도한 사상운동 단체 효민회(曉民會)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변희용(卞熙鎔)이 주재한 사회주의 잡지 『전진(前進)』을 박형병(朴衡秉)과 함께 발행하였다. 또한, 변희용 · 박형병과 함께 사상운동 단체인 시월회(十月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적우회(赤友會)와 통합을 통해 1923년 1월 사상운동 단체인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3월 서울에서 서울파가 주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8월 북풍파와 서울파 사이에 발생한 장안여관사건에서 서울파와 함께하였다. 1924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의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12월에는 사회주의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0월에는 사상운동 단체인 전진회(前進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1월 진행된 제2차 협상에 이영(李英) · 박형병과 함께 고려공산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공산당과 통합 문제를 논의하였다. 같은 해 3월 양명(梁明) · 한빈(韓斌) · 이인수(李仁秀) 등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표방한 비밀단체인 레닌주의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4월에는 조선사상동맹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그해 말에는 조선공산당에서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뒤 1928년 1월 코민테른의 '조선문제결정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당 대회를 준비하였다. 그해 2월 당 대회에서 중앙간부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아 1931년 1월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전라남도 곡성에서 옥과(玉果)노동회를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개조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34년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여 1941년 말 정희영(鄭禧泳)과 함께 활동하였고, 1944년 11월에는 서중석(徐重錫)과 함께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정윤은 영등포와 전라남북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적기파(赤旗派)로 불린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1945년 3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8 · 15광복 후 석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장안파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장안파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재건파)의 통일 논의에 참여하였고, 통합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구성하기 위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9월 조선공산당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같은 달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보건부장 대리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 간담회에 서울 대표로 참석하여 13인 당원 연명으로 '조선공산당대회 소집준비위원회 구성 건의서'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하며 박헌영(朴憲永) 중앙을 비판하였다.
1946년 4월 제2회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3당 합당 문제와 관련하여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 고함'을 발표하고, 박헌영 중앙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에 참가하지 않고 사회노동당에 참여하여 임시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에 출두하여 3당 합당 문제에 관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1948년 후반 북한으로 월북하였다가 1949년에 서울에 왔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 · 25전쟁 중 다시 월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