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내각"
검색결과 총 22건
내각(內閣)은 1895년 갑오개혁 때부터 1896년 아관파천 때까지 국가의 주요 정책과 법률을 심의 결정하던 최고 기관이다.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등 법령제정권과 관리임명 제청권, 세입 세출, 국채와 조세 징수 제청, 국제조약 체결 등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각 (內閣)
내각(內閣)은 1895년 갑오개혁 때부터 1896년 아관파천 때까지 국가의 주요 정책과 법률을 심의 결정하던 최고 기관이다. 법률 칙령의 제정과 폐지 등 법령제정권과 관리임명 제청권, 세입 세출, 국채와 조세 징수 제청, 국제조약 체결 등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2월 1일부터 3년 6월 30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이 수행한 업무 등을 기록한 일지. 관청일기.
내각일기 (內閣日記)
1908년 2월 1일부터 3년 6월 30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이 수행한 업무 등을 기록한 일지. 관청일기.
도찰원은 갑오개혁 시기, 관리의 선악과 공과를 규찰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의정부 산하 관서이다. 1894년 6월 갑오개화파 정부에서는 중앙행정기구를 8개 아문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예전 제도인 사헌부를 계승하여 의정부 소속 관청으로 설치한 것이다. 도찰원은 관리의 규찰과 법령과 규례의 심의, 상벌 시행, 회계 심사, 국정에 관한 상소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도찰원 (都察院)
도찰원은 갑오개혁 시기, 관리의 선악과 공과를 규찰하고, 상벌을 공정하게 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의정부 산하 관서이다. 1894년 6월 갑오개화파 정부에서는 중앙행정기구를 8개 아문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예전 제도인 사헌부를 계승하여 의정부 소속 관청으로 설치한 것이다. 도찰원은 관리의 규찰과 법령과 규례의 심의, 상벌 시행, 회계 심사, 국정에 관한 상소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건양은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태양력 사용을 채택하면서 제정한 연호이다. 1896년 1월 1일부터 1897년 8월 14일 ‘광무(光武)’ 연호가 새로 제정되기까지 사용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1895년 9월 9일, 태양력 사용을 채택하고, 음력 1895년(개국 504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896년(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는다는 조칙을 내렸다. 또한 11월 15일에는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올려 재가를 받았다. 태양력 사용을 계기로 종래 사용하던 중국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양 (建陽)
건양은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태양력 사용을 채택하면서 제정한 연호이다. 1896년 1월 1일부터 1897년 8월 14일 ‘광무(光武)’ 연호가 새로 제정되기까지 사용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1895년 9월 9일, 태양력 사용을 채택하고, 음력 1895년(개국 504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896년(개국 505년) 1월 1일로 삼는다는 조칙을 내렸다. 또한 11월 15일에는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올려 재가를 받았다. 태양력 사용을 계기로 종래 사용하던 중국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한 것이다.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
단발령 (斷髮令)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
김현철은 재무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주미대사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1901년 서울 출생으로, 이승만의 요청으로 아메리칸대학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전 후 귀국하여 재무부 장관, IMF 대표위원,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화폐 개혁 등을 주도했으며, 대통령 전권특사로 40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주미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5·16장학회 이사장,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김현철 (金顯哲)
김현철은 재무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주미대사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외교관이다. 1901년 서울 출생으로, 이승만의 요청으로 아메리칸대학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전 후 귀국하여 재무부 장관, IMF 대표위원,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화폐 개혁 등을 주도했으며, 대통령 전권특사로 40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주미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와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5·16장학회 이사장,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청조소성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개항기 때, 총리대신서리, 궁내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문신.
박정양 (朴定陽)
개항기 때, 총리대신서리, 궁내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문신.
김홍집은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이자 정치인이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나 1896년(고종 33)에 사망했다. 1867년 벼슬을 시작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인천 개항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때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항기 개화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항기에 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고, 온건개화파로서 갑오개혁 등 개화정책을 적극 펼쳤다.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수립된 후 친일 대신으로 지목되어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타살되었다.
김홍집 (金弘集)
김홍집은 개항기 당상경리사, 독판교섭통상사무, 좌의정 등을 역임한 관리이자 정치인이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나 1896년(고종 33)에 사망했다. 1867년 벼슬을 시작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인천 개항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때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항기 개화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항기에 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고, 온건개화파로서 갑오개혁 등 개화정책을 적극 펼쳤다. 아관파천으로 친러정권이 수립된 후 친일 대신으로 지목되어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타살되었다.
대신관방(大臣官房)은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부터 1896년 사이에 정부 각부의 총무 행정을 담당하던 관서이다. 갑오개혁 시기인 1894년, 아문(衙門) 체제에서 외부 · 내부 · 탁지부 · 군부 · 법부 · 학부 · 농상공부의 내각 체제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 8아문에 소속되었던 총무국(總務局)을 1895년 4월 1일, 대신관방으로 개칭한 것이다.
대신관방 (大臣官房)
대신관방(大臣官房)은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부터 1896년 사이에 정부 각부의 총무 행정을 담당하던 관서이다. 갑오개혁 시기인 1894년, 아문(衙門) 체제에서 외부 · 내부 · 탁지부 · 군부 · 법부 · 학부 · 농상공부의 내각 체제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 8아문에 소속되었던 총무국(總務局)을 1895년 4월 1일, 대신관방으로 개칭한 것이다.
개항기 협판내무부사, 공조판서, 춘천부유수 등을 역임한 무신.
이규석 (李奎奭)
개항기 협판내무부사, 공조판서, 춘천부유수 등을 역임한 무신.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윤보선 (尹潽善)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조선시대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우찬성 (右贊成)
조선시대 의정부의 종1품 관직.
1948년부터 1972년까지 북한의 행정부인 내각 산하 군사분야를 관장하던 부처.
민족보위성 (民族保衛省)
1948년부터 1972년까지 북한의 행정부인 내각 산하 군사분야를 관장하던 부처.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도화서에서 임시로 차출되는 화원이다. 1783년(정조 7)에 규장각 잡직으로 제도화되었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을 상대로 한 공개 시험으로 선발했다. 시험은 인물, 산수, 누각, 초충 등 총 8과목이다. 1881년까지 약 100년간의 운영 상황 기록이 규장각 일지 『내각일력』에 남아 있다. 신한평·김홍도·김득신 등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차비대령화원을 역임했다.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화단의 변화를 제도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차비대령화원 (差備待令畵員)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왕실과 관련된 서사 및 도화 활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도화서에서 임시로 차출되는 화원이다. 1783년(정조 7)에 규장각 잡직으로 제도화되었다. 차비대령화원은 도화서 화원을 상대로 한 공개 시험으로 선발했다. 시험은 인물, 산수, 누각, 초충 등 총 8과목이다. 1881년까지 약 100년간의 운영 상황 기록이 규장각 일지 『내각일력』에 남아 있다. 신한평·김홍도·김득신 등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차비대령화원을 역임했다. 차비대령화원은 조선 후기 화단의 변화를 제도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정무원은 북한 최고주권기관의 행정적 집행기관이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규정되었던 국가주권의 최고집행기관인 내각이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정 이후 정무원으로 개칭되었다. 정무원은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운영되며, 총리, 부총리, 부장들과 그 밖에 필요한 성원들로 구성되었다. 정무원은 국가주석의 지도를 받는 행정기관으로서 내각에 비해 권한과 역할은 약한 편이었다.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개정을 통해 내각이 부활됨으로써 정무원은 폐지되었다.
정무원 (政務院)
정무원은 북한 최고주권기관의 행정적 집행기관이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규정되었던 국가주권의 최고집행기관인 내각이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정 이후 정무원으로 개칭되었다. 정무원은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운영되며, 총리, 부총리, 부장들과 그 밖에 필요한 성원들로 구성되었다. 정무원은 국가주석의 지도를 받는 행정기관으로서 내각에 비해 권한과 역할은 약한 편이었다.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개정을 통해 내각이 부활됨으로써 정무원은 폐지되었다.
해방 이후 육군헌병사령관, 육군본부 일반참모부 비서실장, 육군소장 등을 역임한 군인. 공무원.
김병삼 (金炳三)
해방 이후 육군헌병사령관, 육군본부 일반참모부 비서실장, 육군소장 등을 역임한 군인. 공무원.
경상남도 양산시의 대성암에 소장된 두보의 시에 대한 범덕기의 평론서. 시문학비평서.
양산 대성암 소장 두공부시범덕기비선 (梁山 大聖庵 所藏 杜工部詩范德機批選)
경상남도 양산시의 대성암에 소장된 두보의 시에 대한 범덕기의 평론서. 시문학비평서.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개헌안 부결 반대운동 (改憲案 否決 反對運動)
개헌안부결반대운동(改憲案否決反對運動)은 1952년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가 국회를 압박하여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전개한 대중집회와 시위이다.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번복하기 위해 관제 조직들을 동원하여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 등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서적을 교정하고 책판을 보관하던 관청.
고문관 (考文館)
조선시대 서적을 교정하고 책판을 보관하던 관청.
광주변호사회 회장 · 국회의원 · 헌법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910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으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 선거구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0년 3·15정부통령 부정선거 무효소송단과 ‘4·19학생사건’ 민주당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62년 8월에는 장면 전 국무총리의 ‘국가보안법 위반 및 측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 혐의 군사재판에서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1962년 9월 5일 서울 성모병원 입원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양병일 (梁炳日)
광주변호사회 회장 · 국회의원 · 헌법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법조인 · 정치인이다. 1910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으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 선거구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0년 3·15정부통령 부정선거 무효소송단과 ‘4·19학생사건’ 민주당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62년 8월에는 장면 전 국무총리의 ‘국가보안법 위반 및 측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 혐의 군사재판에서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 1962년 9월 5일 서울 성모병원 입원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