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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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촌락.
명동촌 (明東村)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촌락.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 서전의숙, 명동서숙, 명동여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간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독립운동가.
김약연 (金躍淵)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 서전의숙, 명동서숙, 명동여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간민회 회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서울특별시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구.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特別市 中區)
서울특별시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구.
명동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곳으로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가 되었다. 6·25전쟁 이후 국립극장과 명동성당 등 근대건축물이 산재하고 문인들이 모이면서 음악·미술·문학·사진·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가 되었다. 1970년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반포·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명동 (明洞)
명동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곳으로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상업지구로 변모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번화가가 되었다. 6·25전쟁 이후 국립극장과 명동성당 등 근대건축물이 산재하고 문인들이 모이면서 음악·미술·문학·사진·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가 되었다. 1970년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반포·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해방 이후 「작품」,명동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혜화동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그린 화가. 유리화가, 서양화가.
이남규 (李南圭)
해방 이후 「작품」,명동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혜화동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그린 화가. 유리화가, 서양화가.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해병」, 「대전장」, 「어머니」 등에 출연한 배우. 영화배우, 악극배우.
장동휘 (張東輝)
해방 이후 「돌아오지 않는 해병」, 「대전장」, 「어머니」 등에 출연한 배우. 영화배우, 악극배우.
대한제국기 북간도에 명동서숙을 건립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항일운동가. 교육자.
박정서 (朴楨瑞)
대한제국기 북간도에 명동서숙을 건립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항일운동가. 교육자.
일제강점기 때 대성학교 · 보광학교 · 명동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민족교육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정재면 (鄭載冕)
일제강점기 때 대성학교 · 보광학교 · 명동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민족교육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서소문동 중앙빌딩, 명동 유네스코회관 등을 신축한 건축가.
배기형 (裵基瀅)
해방 이후 서소문동 중앙빌딩, 명동 유네스코회관 등을 신축한 건축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있었던 교회.
명동교회 (明東敎會)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있었던 교회.
『대동청사』는 1910년 황의돈이 중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이다. 단군 조선부터 영·정조 때까지의 한국사를 서술하였다. 상고사·중고사·근고사와 같이 새로운 역사 체계를 도입하였다. 2권 2책(3편 38장)으로, 필사 연도는 1910년이고 간행지는 확인할 수 없다. 표기는 국한문을 혼용하였다. 제1권은 상고사, 중고사, 근고사 제7장까지이며, 제2권은 근고사 제8장부터 제17장으로 구성되었다. 왕조 중심과 편년체의 기술 방식을 탈피하고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시도한 저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동청사 (大東靑史)
『대동청사』는 1910년 황의돈이 중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이다. 단군 조선부터 영·정조 때까지의 한국사를 서술하였다. 상고사·중고사·근고사와 같이 새로운 역사 체계를 도입하였다. 2권 2책(3편 38장)으로, 필사 연도는 1910년이고 간행지는 확인할 수 없다. 표기는 국한문을 혼용하였다. 제1권은 상고사, 중고사, 근고사 제7장까지이며, 제2권은 근고사 제8장부터 제17장으로 구성되었다. 왕조 중심과 편년체의 기술 방식을 탈피하고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시도한 저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북간도 민족교육기관인 명동중학교의 재무를 관리한 교육자.
문치정 (文治政)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북간도 민족교육기관인 명동중학교의 재무를 관리한 교육자.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북간도 민족교육기관인 명동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교육자.
남위언 (南韋彥)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북간도 민족교육기관인 명동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교육자.
1933년 조병휘가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問)을 넓힌 수운교경전.
동도전서 (東道全書)
1933년 조병휘가 『동경대전』의 논학문(論學問)을 넓힌 수운교경전.
노기남은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로, 1930년에 사제품을 받은 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된 후, 주교로 서품되었다. 1962년에 대주교로 승품되고 서울대교구장이 되어 1967년까지 재직하였다.
노기남 (盧基南)
노기남은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로, 1930년에 사제품을 받은 후 명동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된 후, 주교로 서품되었다. 1962년에 대주교로 승품되고 서울대교구장이 되어 1967년까지 재직하였다.
「명동의 에레지」는 1950년 2월 이봉구가 『백민』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신문 기자인 ‘그’가 과거 명동의 다방에서 커피를 따라 주던 여인 ‘시몬’과 10여 년 만에 재회한 이야기로, 명동의 거리와 찻집을 오가며 청춘의 낭만과 의욕을 느꼈던 시몬이 폐병으로 요양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속편은 「속(續) 명동 에레지」(『자유세계』, 1957.6)로 발표되었다. 이후에도 이봉구는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1966), 『명동 비 내리다』(1978) 등을 출간하며 명동을 낭만과 우정의 장소로 형상화했다.
명동의 에레지 (明洞의 에레지)
「명동의 에레지」는 1950년 2월 이봉구가 『백민』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신문 기자인 ‘그’가 과거 명동의 다방에서 커피를 따라 주던 여인 ‘시몬’과 10여 년 만에 재회한 이야기로, 명동의 거리와 찻집을 오가며 청춘의 낭만과 의욕을 느꼈던 시몬이 폐병으로 요양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속편은 「속(續) 명동 에레지」(『자유세계』, 1957.6)로 발표되었다. 이후에도 이봉구는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1966), 『명동 비 내리다』(1978) 등을 출간하며 명동을 낭만과 우정의 장소로 형상화했다.
명동학교는 1909년 4월 북간도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이다. 1908년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되었던 명동서숙을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면서 명동학교로 설립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내용과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활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1925년에 폐교되었다.
명동학교 (明東學校)
명동학교는 1909년 4월 북간도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이다. 1908년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되었던 명동서숙을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면서 명동학교로 설립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내용과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활동 등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1925년에 폐교되었다.
김학연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명동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한 교육자이다. 함경북도 종성군 출신으로 북간도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졸업하였다.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정신에 기초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 제국주의 일본의 간도 출병 이후 용정 지역 조선인거류민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김학연 (金學淵)
김학연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명동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한 교육자이다. 함경북도 종성군 출신으로 북간도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졸업하였다.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정신에 기초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 제국주의 일본의 간도 출병 이후 용정 지역 조선인거류민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명동여학교는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이다. 1911년 이동휘가 길림성 화룡현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전에 설립되었던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며 설립되었다. 1911년 2월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으로 개화운동, 민중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실행하였다.
명동여학교 (明東女學敎)
명동여학교는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이다. 1911년 이동휘가 길림성 화룡현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전에 설립되었던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며 설립되었다. 1911년 2월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으로 개화운동, 민중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실행하였다.
대한복식연우회(大韓服食硏友會)는 1955년 6월 명동양장점 및 양재학원 연합을 주축으로 설립된 복식 전문가 단체이다. 1961년에 시행된 정부 사회부의 ‘유사 단체통합령’으로 인해 대한복식연우회는 한국디자이너협회와 1961년 8월 27일 (사단법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로 통합되었다.
대한복식연우회 (大韓服食硏友會)
대한복식연우회(大韓服食硏友會)는 1955년 6월 명동양장점 및 양재학원 연합을 주축으로 설립된 복식 전문가 단체이다. 1961년에 시행된 정부 사회부의 ‘유사 단체통합령’으로 인해 대한복식연우회는 한국디자이너협회와 1961년 8월 27일 (사단법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로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