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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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는 고려 후기에 북계분대어사·감찰어사·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몽골과의 화의 교섭 등에 활약한 인물이다. 몽골의 첫 번째 침입 당시 민희는 몽골 원수 살리타이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폈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위해 몽골군의 진영을 오갔다. 또한 두 번째 침입 시기에 왕명으로 구주에 가서 몽골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서경에 파견되어 몽골의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일로 반란을 겪었다. 홍복원과 필현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집권자 최항에 의해 유배를 갔다. 그의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다.
민희 (閔曦)
민희는 고려 후기에 북계분대어사·감찰어사·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몽골과의 화의 교섭 등에 활약한 인물이다. 몽골의 첫 번째 침입 당시 민희는 몽골 원수 살리타이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폈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위해 몽골군의 진영을 오갔다. 또한 두 번째 침입 시기에 왕명으로 구주에 가서 몽골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서경에 파견되어 몽골의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일로 반란을 겪었다. 홍복원과 필현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집권자 최항에 의해 유배를 갔다. 그의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다.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개주전투 (价州戰鬪)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대장경』은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 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논(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트리피타카(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 한역 대장경, 티베트어 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대장경 (大藏經)
『대장경』은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 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논(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트리피타카(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 한역 대장경, 티베트어 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경화공주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사후에 그에 이어 세 번째로 맞이한 몽골공주 출신 왕비다. 충숙왕 사후 충혜왕에게 겁간을 당해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경화공주 (慶華公主)
경화공주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사후에 그에 이어 세 번째로 맞이한 몽골공주 출신 왕비다. 충숙왕 사후 충혜왕에게 겁간을 당해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강화 홍릉(江華 洪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 후기 제23대 고종의 능이다. 홍릉은 강화군 고려산 중턱의 남사면에 있다. 1916년 조사 보고에 의하면 능역 내 호석과 난간 일부가 남아 있는 봉분과 석수 4마리, 석인상 4구, 정자각 터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사자를 비롯한 일부 석물이 사라진 상태이다.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능역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다.
강화 홍릉 (江華 洪陵)
강화 홍릉(江華 洪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 후기 제23대 고종의 능이다. 홍릉은 강화군 고려산 중턱의 남사면에 있다. 1916년 조사 보고에 의하면 능역 내 호석과 난간 일부가 남아 있는 봉분과 석수 4마리, 석인상 4구, 정자각 터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사자를 비롯한 일부 석물이 사라진 상태이다.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능역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다.
기황후는 고려 후기 몽골제국 제14대 카안 순제 토곤테무르의 황후이다. 고려 여성으로, 궁녀로 시작해서 제2황후를 거쳐 정후에 올랐으며, 그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세력을 강화하였다. 기철 등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서 득세하여 공민왕과 갈등하다가 주살되자, 원한을 품고 공민왕 폐위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기황후 (奇皇后)
기황후는 고려 후기 몽골제국 제14대 카안 순제 토곤테무르의 황후이다. 고려 여성으로, 궁녀로 시작해서 제2황후를 거쳐 정후에 올랐으며, 그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세력을 강화하였다. 기철 등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서 득세하여 공민왕과 갈등하다가 주살되자, 원한을 품고 공민왕 폐위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설신 (薛愼)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원종 (元宗)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저고여 피살사건은 1225년(고종 12)에 고려에 왔던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살해당한 사건이다. 1218년(고종 5)에 강동성(江東城)에서 고려와 몽골이 첫 번째로 접촉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였다.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쌓아가는 것이었고, 종국에는 이 사건이 몽골의 침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고려와 몽골의 국교가 단절된 뒤 1231년(고종 18)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저고여 피살사건 (著古與 被殺事件)
저고여 피살사건은 1225년(고종 12)에 고려에 왔던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살해당한 사건이다. 1218년(고종 5)에 강동성(江東城)에서 고려와 몽골이 첫 번째로 접촉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였다.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쌓아가는 것이었고, 종국에는 이 사건이 몽골의 침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고려와 몽골의 국교가 단절된 뒤 1231년(고종 18)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원고려기사』는 1917년에 간행된 고려와 몽골(원)에 관한 역사서이다. 청나라 말의 문정식이 『영락대전』 권4446과 『원사』 고려전 등을 참고하여 1900~1904년 사이에 엮은 책이다. 그가 1904년에 죽은 후 『신원사』를 지은 가소민, 나진옥 등을 거쳐 왕국유가 그 원고 간 산일될 것을 우려하여 1917년에 간행되었다. 1216~1301년 사이 고려-몽골 관계 기록을 서문, 본기, 부록의 셋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으며, 부록에서는 탐라 관계 기사를 다루고 있다.
원고려기사 (元高麗紀事)
『원고려기사』는 1917년에 간행된 고려와 몽골(원)에 관한 역사서이다. 청나라 말의 문정식이 『영락대전』 권4446과 『원사』 고려전 등을 참고하여 1900~1904년 사이에 엮은 책이다. 그가 1904년에 죽은 후 『신원사』를 지은 가소민, 나진옥 등을 거쳐 왕국유가 그 원고 간 산일될 것을 우려하여 1917년에 간행되었다. 1216~1301년 사이 고려-몽골 관계 기록을 서문, 본기, 부록의 셋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으며, 부록에서는 탐라 관계 기사를 다루고 있다.
자정원은 고려 후기 충선왕이 설치한 관서이다. 몽골(원)에 존재하던 황후의 재정 관련 기구를 본떠 만든 기구로 생각된다. 하지만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폐지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중에 몽골(원)의 기황후의 재정 기구 역시도 자정원으로 같은 명칭이었다.
자정원 (資政院)
자정원은 고려 후기 충선왕이 설치한 관서이다. 몽골(원)에 존재하던 황후의 재정 관련 기구를 본떠 만든 기구로 생각된다. 하지만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폐지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중에 몽골(원)의 기황후의 재정 기구 역시도 자정원으로 같은 명칭이었다.
고려 후기에, 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최영 (崔永)
고려 후기에, 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춘명은 고려 후기에 자주부사로서 1231년(고종 18) 몽골 침입에 끝까지 저항하며 자주성을 방어한 관리이다. 당시 북계 지역 대부분이 몽골에 점령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몽골과의 협상을 위하여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가 도리어 최우 세력에 의해 처형당할 뻔하였으나 몽골 관리에 의해 구명되었다. 자주성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벼슬이 추밀원부사, 지추밀원사에까지 올랐다.
최춘명 (崔椿命)
최춘명은 고려 후기에 자주부사로서 1231년(고종 18) 몽골 침입에 끝까지 저항하며 자주성을 방어한 관리이다. 당시 북계 지역 대부분이 몽골에 점령된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몽골과의 협상을 위하여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가 도리어 최우 세력에 의해 처형당할 뻔하였으나 몽골 관리에 의해 구명되었다. 자주성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벼슬이 추밀원부사, 지추밀원사에까지 올랐다.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몽골군에 투항한 이후 몽골의 고려 침입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부몽 관리이다.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몽골로부터는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에 임명되어 요양·심양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몽골에서 머물던 영녕공 왕준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고종 45)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 자손들에 의하여 부몽 행위는 계속되었다.
홍복원 (洪福源)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몽골군에 투항한 이후 몽골의 고려 침입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 부몽 관리이다.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몽골로부터는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에 임명되어 요양·심양 등지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몽골에서 머물던 영녕공 왕준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고종 45)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 자손들에 의하여 부몽 행위는 계속되었다.
처인성전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에서 승장(僧將) 김윤후가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전투이다.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가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처인성 안에 피란하였던 처인부곡민과 승려들의 적극적 호응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1232년 12월 16일의 일로 대몽전쟁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처인성전투 (處仁城戰鬪)
처인성전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에서 승장(僧將) 김윤후가 적장 살례탑을 사살한 전투이다.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가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처인성 안에 피란하였던 처인부곡민과 승려들의 적극적 호응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1232년 12월 16일의 일로 대몽전쟁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천호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군직으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남해안 요충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 내에서 만호의 휘하에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천호는 일반적으로 고려 국왕의 천거에 따라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국내의 무장들에게 천호직을 수여하였으며, 우왕 대 이후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천호 (千戶)
천호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군직으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남해안 요충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 내에서 만호의 휘하에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천호는 일반적으로 고려 국왕의 천거에 따라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국내의 무장들에게 천호직을 수여하였으며, 우왕 대 이후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충주전투(忠州戰鬪)는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충주 관노들이 대항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제1차 몽골 침입 때 충주까지 남하한 몽골군을 충주읍성에 있던 관노들이 적극적으로 항전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몽골과의 항전에서 지역적으로 가장 치열한 항전 양상을 보였던 충주에서의 여러 전투 중 첫 번째 전투이며, 하층민들이 전투의 주체였음이 주목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충주전투 (忠州戰鬪)
충주전투(忠州戰鬪)는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충주 관노들이 대항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제1차 몽골 침입 때 충주까지 남하한 몽골군을 충주읍성에 있던 관노들이 적극적으로 항전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몽골과의 항전에서 지역적으로 가장 치열한 항전 양상을 보였던 충주에서의 여러 전투 중 첫 번째 전투이며, 하층민들이 전투의 주체였음이 주목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광주산성전투 (廣州山城戰鬪)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원간섭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로, 대체로 1259년에서 1356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려 영토 안에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되어 일부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고, 국왕의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처지로 전락했다. 원이 수행하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를 상납하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원간섭기 (元干涉期)
원간섭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로, 대체로 1259년에서 1356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려 영토 안에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되어 일부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고, 국왕의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처지로 전락했다. 원이 수행하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를 상납하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