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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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로, 대체로 1259년에서 1356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려 영토 안에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되어 일부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고, 국왕의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처지로 전락했다. 원이 수행하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를 상납하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원간섭기 (元干涉期)
원간섭기는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로, 대체로 1259년에서 1356년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려 영토 안에 원의 지방관청이 설치되어 일부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고, 국왕의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처지로 전락했다. 원이 수행하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를 상납하는 등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충주전투는 1253년(고종 40) 몽골의 제5차 침입 때 충주성(忠州城)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몽골군이 고려의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충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반면, 고려 또한 이를 저지해야 할 명운이 걸린 전투였다. 충주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윤후(金允侯)라는 뛰어난 장수의 활약과 일반 민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충주가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충주전투 (忠州戰鬪)
충주전투는 1253년(고종 40) 몽골의 제5차 침입 때 충주성(忠州城)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몽골군이 고려의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충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반면, 고려 또한 이를 저지해야 할 명운이 걸린 전투였다. 충주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윤후(金允侯)라는 뛰어난 장수의 활약과 일반 민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충주가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저고여 피살사건은 1225년(고종 12)에 고려에 왔던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살해당한 사건이다. 1218년(고종 5)에 강동성(江東城)에서 고려와 몽골이 첫 번째로 접촉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였다.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쌓아가는 것이었고, 종국에는 이 사건이 몽골의 침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고려와 몽골의 국교가 단절된 뒤 1231년(고종 18)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저고여 피살사건 (著古與 被殺事件)
저고여 피살사건은 1225년(고종 12)에 고려에 왔던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살해당한 사건이다. 1218년(고종 5)에 강동성(江東城)에서 고려와 몽골이 첫 번째로 접촉한 이후, 몽골은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였다.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쌓아가는 것이었고, 종국에는 이 사건이 몽골의 침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고려와 몽골의 국교가 단절된 뒤 1231년(고종 18)에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대장경』은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 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논(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트리피타카(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 한역 대장경, 티베트어 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대장경 (大藏經)
『대장경』은 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 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논(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트리피타카(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 한역 대장경, 티베트어 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원종 (元宗)
원종은 고려 후기 제24대(1259~1274) 왕이다. 친몽 정책(親蒙政策)을 추진하여 김준, 임연 등 무신 집정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임연을 사주해 김준을 제거하였지만 임연과의 갈등으로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개입으로 복위되기도 하였다.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1270년(원종 11) 전격적으로 개경 환도(開京還都)와 삼별초 해산을 명하였고, 이로 인하여 삼별초의 난이 촉발되었다. 몽골에 대한 복속과 타협으로 원 간섭기(元干涉期)의 출발을 가져왔지만, 오랜 전란을 종식시키고 고려 국체의 유지, 보존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했던 왕이다.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다루가치 (達魯花赤)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충주전투(忠州戰鬪)는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충주 관노들이 대항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제1차 몽골 침입 때 충주까지 남하한 몽골군을 충주읍성에 있던 관노들이 적극적으로 항전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몽골과의 항전에서 지역적으로 가장 치열한 항전 양상을 보였던 충주에서의 여러 전투 중 첫 번째 전투이며, 하층민들이 전투의 주체였음이 주목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충주전투 (忠州戰鬪)
충주전투(忠州戰鬪)는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충주 관노들이 대항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제1차 몽골 침입 때 충주까지 남하한 몽골군을 충주읍성에 있던 관노들이 적극적으로 항전하여 물리친 전투이다. 몽골과의 항전에서 지역적으로 가장 치열한 항전 양상을 보였던 충주에서의 여러 전투 중 첫 번째 전투이며, 하층민들이 전투의 주체였음이 주목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출륙환도는 섬인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고려의 강화천도 이후 지속된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한 사건이다. 고려는 출륙환도와 함께 인접한 섬에 백성들을 보내 놓고 방어하는 해도입보책을 실시하여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 의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몽골은 고려와의 전투나 교섭에서 최우선 사항으로 출륙환도를 요청하였다. 이처럼 출륙환도는 여·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외교쟁점이었으며,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출륙환도하여 몽골에 예속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쟁이 이어졌다.
출륙환도 (出陸還都)
출륙환도는 섬인 강화도에서 나와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고려의 강화천도 이후 지속된 몽골의 요구, 혹은 1270년(원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한 사건이다. 고려는 출륙환도와 함께 인접한 섬에 백성들을 보내 놓고 방어하는 해도입보책을 실시하여 장기전을 유도하여 몽골군의 공격 의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몽골은 고려와의 전투나 교섭에서 최우선 사항으로 출륙환도를 요청하였다. 이처럼 출륙환도는 여·몽전쟁에 있어서 최대의 외교쟁점이었으며, 출륙환도 거부가 대몽항전의 핵심이었다.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출륙환도하여 몽골에 예속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삼별초의 항쟁이 이어졌다.
강화 홍릉(江華 洪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 후기 제23대 고종의 능이다. 홍릉은 강화군 고려산 중턱의 남사면에 있다. 1916년 조사 보고에 의하면 능역 내 호석과 난간 일부가 남아 있는 봉분과 석수 4마리, 석인상 4구, 정자각 터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사자를 비롯한 일부 석물이 사라진 상태이다.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능역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다.
강화 홍릉 (江華 洪陵)
강화 홍릉(江華 洪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 후기 제23대 고종의 능이다. 홍릉은 강화군 고려산 중턱의 남사면에 있다. 1916년 조사 보고에 의하면 능역 내 호석과 난간 일부가 남아 있는 봉분과 석수 4마리, 석인상 4구, 정자각 터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사자를 비롯한 일부 석물이 사라진 상태이다. 1970년대 정비 과정에서 능역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광주산성전투 (廣州山城戰鬪)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천호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군직으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남해안 요충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 내에서 만호의 휘하에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천호는 일반적으로 고려 국왕의 천거에 따라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국내의 무장들에게 천호직을 수여하였으며, 우왕 대 이후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천호 (千戶)
천호는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군직으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의 명칭이다. 1281년(충렬왕 7)에 남해안 요충지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둔 이래 각지에 설치된 만호부 내에서 만호의 휘하에서 1,0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배치되었다. 천호는 일반적으로 고려 국왕의 천거에 따라 원나라 황제가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대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력과 상관없이 국내의 무장들에게 천호직을 수여하였으며, 우왕 대 이후에는 각 익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전국에 배치되었다.
고려 후기에, 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최영 (崔永)
고려 후기에, 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개주전투 (价州戰鬪)
1236년(고종 23) 개주에서 경별초(京別抄) 등이 몽골군과 벌인 전투.
1908년 유옥겸이 동양사를 중심으로 하여 편찬한 교과서. 동양사교과서·국한문혼용체·사찬본.
동양사교과서 (東洋史敎科書)
1908년 유옥겸이 동양사를 중심으로 하여 편찬한 교과서. 동양사교과서·국한문혼용체·사찬본.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설신 (薛愼)
설신은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에서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순창군 호장의 증손이며, 외가도 순창군 호장이었다. 그는 시부와 관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과거를 거쳐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과중한 공물 징수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였으며 그해 재침한 몽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처인성 승첩 이후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1242년(고종 29)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1251년(고종 38)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지명이 전하고 있다.
경화공주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사후에 그에 이어 세 번째로 맞이한 몽골공주 출신 왕비다. 충숙왕 사후 충혜왕에게 겁간을 당해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경화공주 (慶華公主)
경화공주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사후에 그에 이어 세 번째로 맞이한 몽골공주 출신 왕비다. 충숙왕 사후 충혜왕에게 겁간을 당해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기황후는 고려 후기 몽골제국 제14대 카안 순제 토곤테무르의 황후이다. 고려 여성으로, 궁녀로 시작해서 제2황후를 거쳐 정후에 올랐으며, 그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세력을 강화하였다. 기철 등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서 득세하여 공민왕과 갈등하다가 주살되자, 원한을 품고 공민왕 폐위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기황후 (奇皇后)
기황후는 고려 후기 몽골제국 제14대 카안 순제 토곤테무르의 황후이다. 고려 여성으로, 궁녀로 시작해서 제2황후를 거쳐 정후에 올랐으며, 그 아들이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세력을 강화하였다. 기철 등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서 득세하여 공민왕과 갈등하다가 주살되자, 원한을 품고 공민왕 폐위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말은 말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말은 야생말과 가축화된 말로 구분되며, 가축화는 서기전 40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제주마는 몽골말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으며 유전자 연구 결과 독립된 제주마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에 이용하였으며 군마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제주마는 현재 관광, 경주, 재활 치료에 활용되며, 다양한 모색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순수 혈통 보존을 위해 국가유산청과 제주축산생명연구원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말
말은 말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말은 야생말과 가축화된 말로 구분되며, 가축화는 서기전 40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제주마는 몽골말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으며 유전자 연구 결과 독립된 제주마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에 이용하였으며 군마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제주마는 현재 관광, 경주, 재활 치료에 활용되며, 다양한 모색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순수 혈통 보존을 위해 국가유산청과 제주축산생명연구원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민희는 고려 후기에 북계분대어사·감찰어사·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몽골과의 화의 교섭 등에 활약한 인물이다. 몽골의 첫 번째 침입 당시 민희는 몽골 원수 살리타이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폈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위해 몽골군의 진영을 오갔다. 또한 두 번째 침입 시기에 왕명으로 구주에 가서 몽골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서경에 파견되어 몽골의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일로 반란을 겪었다. 홍복원과 필현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집권자 최항에 의해 유배를 갔다. 그의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다.
민희 (閔曦)
민희는 고려 후기에 북계분대어사·감찰어사·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몽골과의 화의 교섭 등에 활약한 인물이다. 몽골의 첫 번째 침입 당시 민희는 몽골 원수 살리타이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폈다. 이후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위해 몽골군의 진영을 오갔다. 또한 두 번째 침입 시기에 왕명으로 구주에 가서 몽골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다. 서경에 파견되어 몽골의 다루가치를 죽이려는 일로 반란을 겪었다. 홍복원과 필현보 등의 반란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집권자 최항에 의해 유배를 갔다. 그의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