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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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7년에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중심으로 6·25전쟁 당시 전투 현장에 남겨진 호국 용사의 유해를 조사 · 발굴 및 신원 확인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한다. 2008년도에 「6·25전사자 유해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되었다. 미처 수습되지 못한 12만 3천여 위 호국 용사들의 유해가 주요 대상이다.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六二五戰爭 戰死者 遺骸發掘事業)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7년에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중심으로 6·25전쟁 당시 전투 현장에 남겨진 호국 용사의 유해를 조사 · 발굴 및 신원 확인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한다. 2008년도에 「6·25전사자 유해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되었다. 미처 수습되지 못한 12만 3천여 위 호국 용사들의 유해가 주요 대상이다.
유럽 북서부에 있는 입헌군주국.
벨기에 (België)
유럽 북서부에 있는 입헌군주국.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김홍일 (金弘壹)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문화부 총무과장, 광복군 총사령부 군법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구연 (李龜淵)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문화부 총무과장, 광복군 총사령부 군법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안두희는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이다. 1917년 평북 용천 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해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의 저택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6·25전쟁 당시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에게 1996년 10월 피살되었다. 김구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고, 이승만은 직접 개입의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안두희 (安斗熙)
안두희는 해방 이후 현역 육군 소위로 김구를 암살한 군인이다. 1917년 평북 용천 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해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의 저택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살해하였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6·25전쟁 당시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에게 1996년 10월 피살되었다. 김구 암살의 일차적 배후는 군부였고, 이승만은 직접 개입의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송요찬은 해방 이후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8년 10월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6·25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4·19혁명 당시 계업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해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요직을 역임하였다.
송요찬 (宋堯讚)
송요찬은 해방 이후 수도사단장,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918년 충남 청양 출생으로 1946년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948년 10월부터 제주 4·3사건 진압에 관여하였고 6·25 전쟁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4·19혁명 당시 계업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유혈사태를 방지해 4·19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즉각 지지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군사정부의 요청에 따라 요직을 역임하였다.
한반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국민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월남민 (越南民)
한반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국민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용어.
1984년 『문예중앙』, 1985년 『세계의 문학』 등에 연재되고 1986년 단행본으로 간행된 김주영의 장편소설.
천둥소리
1984년 『문예중앙』, 1985년 『세계의 문학』 등에 연재되고 1986년 단행본으로 간행된 김주영의 장편소설.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역임한 군인.
유성철 (柳成哲)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을 역임한 군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 지역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사회용어. 납북인.
납북자 (拉北者)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 지역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사회용어. 납북인.
전국학련구국대는 1950년, 전국학생총연맹 간부 출신들이 조직한 학도의용군이다. 6 · 25전쟁 초기에 부족한 병력 충원과 군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었다. 활동 목적은 학도지원병 모집과 후방 선무공작, 후방 치안 등이었고, 내무부 협조를 얻어 활약하였다. 9 · 28서울수복 이후 해체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국가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전국학련구국대 (全國學聯救國隊)
전국학련구국대는 1950년, 전국학생총연맹 간부 출신들이 조직한 학도의용군이다. 6 · 25전쟁 초기에 부족한 병력 충원과 군 사기 진작에 도움을 주었다. 활동 목적은 학도지원병 모집과 후방 선무공작, 후방 치안 등이었고, 내무부 협조를 얻어 활약하였다. 9 · 28서울수복 이후 해체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국가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였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기독교 민간 구호단체.
월드비전 (World Vision)
기독교 민간 구호단체.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은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회담이다. 1988년 12월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 간 미군 유해 송환 회담 및 협상 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었다. 3년 정도 공백기가 지난 2010년 북한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하여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 위성) 발사 계획으로 인해 사업 중단이 선언되면서 재개되지 못했다.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 (北·美 美軍遺骸 送還會談)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은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회담이다. 1988년 12월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 간 미군 유해 송환 회담 및 협상 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었다. 3년 정도 공백기가 지난 2010년 북한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하여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 위성) 발사 계획으로 인해 사업 중단이 선언되면서 재개되지 못했다.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재일의용병 (在日義勇兵)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대한기독교구국회는 6.25전쟁 시기 대전에서 결성된 개신교 구국 단체이다. 1950년 7월 3일 한경직 등 개신교 교역자들에 의해 대전 제일장로교회에서 결성되었다. 이후 선무·구호·방송·의용대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개신교 각 교파 사이의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개신교반공주의 강화의 요인이 되었다.
대한기독교구국회 (大韓基督敎救國會)
대한기독교구국회는 6.25전쟁 시기 대전에서 결성된 개신교 구국 단체이다. 1950년 7월 3일 한경직 등 개신교 교역자들에 의해 대전 제일장로교회에서 결성되었다. 이후 선무·구호·방송·의용대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개신교 각 교파 사이의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개신교반공주의 강화의 요인이 되었다.
김영옥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군인이다. 1919년 1월 29일에 출생하여,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영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참전 영웅이자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그가 미국 및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김영옥 (金英玉)
김영옥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군인이다. 1919년 1월 29일에 출생하여,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영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참전 영웅이자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그가 미국 및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에버레디계획은 1953년 5월 한국전쟁 정전회담 과정에서 불거진 한미 갈등에 대처하고자 미국이 수립한 한국 정부 장악을 골자로 한 상비계획이다. 1953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해 ‘단독 북진’ 의사를 표시하자, 이를 우려한 미국은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는 등의 단독 행동을 할 경우 필요한 군사 조치를 취하고, 궁극적으로 유엔군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단계까지 상정하였다. 한미 갈등이 외교적 조정을 넘는 경우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상비계획으로서 1950년대에 항시 잠재하고 있었다.
에버레디계획 (Everready計劃|Plan Everready)
에버레디계획은 1953년 5월 한국전쟁 정전회담 과정에서 불거진 한미 갈등에 대처하고자 미국이 수립한 한국 정부 장악을 골자로 한 상비계획이다. 1953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해 ‘단독 북진’ 의사를 표시하자, 이를 우려한 미국은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는 등의 단독 행동을 할 경우 필요한 군사 조치를 취하고, 궁극적으로 유엔군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단계까지 상정하였다. 한미 갈등이 외교적 조정을 넘는 경우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상비계획으로서 1950년대에 항시 잠재하고 있었다.
애국복권은 1951년 대한민국 정부가 「애국복권발행법」을 제정하고 발행했고, 1956년 2월 산업 부흥 자금과 사회복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한 복권이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재민 구호를 목적으로, 1956년 서울 환도 후 전쟁복구 자금을 위해 발행되었다. 1951년 1회차 복권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56년 2회차 복권의 성과는 저조했다. 게다가 조흥은행 직원들의 복권 횡령 사건과 공무원 급료 강제 공제로 인해 논란이 일었고, 결국 2차 애국복권은 10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애국복권 (愛國福券)
애국복권은 1951년 대한민국 정부가 「애국복권발행법」을 제정하고 발행했고, 1956년 2월 산업 부흥 자금과 사회복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한 복권이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재민 구호를 목적으로, 1956년 서울 환도 후 전쟁복구 자금을 위해 발행되었다. 1951년 1회차 복권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56년 2회차 복권의 성과는 저조했다. 게다가 조흥은행 직원들의 복권 횡령 사건과 공무원 급료 강제 공제로 인해 논란이 일었고, 결국 2차 애국복권은 10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