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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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강조 (康兆)
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경목현비는 고려 전기 제9대 왕 덕종의 왕비이다. 그녀는 왕가도의 딸이었는데, 덕종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위세에 힘입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왕가도가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덕종은 아버지 현종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제1왕후로써 위치를 잃게 되었다.
경목현비 (敬穆賢妃)
경목현비는 고려 전기 제9대 왕 덕종의 왕비이다. 그녀는 왕가도의 딸이었는데, 덕종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위세에 힘입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왕가도가 거란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 덕종은 아버지 현종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제1왕후로써 위치를 잃게 되었다.
경종은 고려 전기 제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75~981년이며, 태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즉위 초에 집정 왕선이 전횡을 일삼자 귀양을 보냈고, 980년(경종 5) 왕승의 모반을 제압하였다. 976년(경종 1) 전시과를 제정하고, 과거제도를 다시 시행했으며, 송과의 국교도 돈독히 하였다. 981년(경종 6) 병이 위독해지자 사촌동생인 개령군 왕치(이후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여러 가지 치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여색을 탐하고 바둑을 좋아해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종 (景宗)
경종은 고려 전기 제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75~981년이며, 태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즉위 초에 집정 왕선이 전횡을 일삼자 귀양을 보냈고, 980년(경종 5) 왕승의 모반을 제압하였다. 976년(경종 1) 전시과를 제정하고, 과거제도를 다시 시행했으며, 송과의 국교도 돈독히 하였다. 981년(경종 6) 병이 위독해지자 사촌동생인 개령군 왕치(이후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겼다. 여러 가지 치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여색을 탐하고 바둑을 좋아해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종은 고려 전기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49~975년이며, 동복형인 정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고, 958년(광종 9)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960년(광종 11)에는 백관의 공복도 제정하였다. 왕권강화를 위해 호족세력의 반발을 철저하게 제압하였다. 특히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중국 여러 왕조와의 외교 활동과 다양한 국방 대책도 치적에 속한다.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사·왕사 제도를 완성하였다.
광종 (光宗)
광종은 고려 전기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49~975년이며, 동복형인 정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고, 958년(광종 9)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960년(광종 11)에는 백관의 공복도 제정하였다. 왕권강화를 위해 호족세력의 반발을 철저하게 제압하였다. 특히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중국 여러 왕조와의 외교 활동과 다양한 국방 대책도 치적에 속한다.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사·왕사 제도를 완성하였다.
광주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15 왕비이다.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두 딸을 태조, 혜종에게 드렸는데 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왕비 중 하나이다. 혜종대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왕규가 살해당하면서 광주원부인도 죽었거나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원부인 (廣州院夫人)
광주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15 왕비이다.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두 딸을 태조, 혜종에게 드렸는데 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왕비 중 하나이다. 혜종대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왕규가 살해당하면서 광주원부인도 죽었거나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금관후는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이다. 어머니는 인예태후였다. 그는 유교적인 학식이 있어 부여공 왕수가 적경궁주에게 장가가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왕수의 어머니와 적경궁주의 어머니는 모두 이자연의 딸로 자매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관후 (金官侯)
금관후는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이다. 어머니는 인예태후였다. 그는 유교적인 학식이 있어 부여공 왕수가 적경궁주에게 장가가려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왕수의 어머니와 적경궁주의 어머니는 모두 이자연의 딸로 자매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덕종은 고려 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1년~1034년이다. 국자감시를 처음 실시하였고 고려실록 편찬 사업을 벌였다. 양반 및 군·한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억류한 고려 사신을 돌려 보낼 것을 요청하였고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쌓은 2성을 철거할 것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 파견을 중단하였다. 한편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 압록강 하구에서 동북면 도련포에 이르기까지 고려장성 축조를 시작하였다.
덕종 (德宗)
덕종은 고려 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1년~1034년이다. 국자감시를 처음 실시하였고 고려실록 편찬 사업을 벌였다. 양반 및 군·한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외교를 전개하였다. 억류한 고려 사신을 돌려 보낼 것을 요청하였고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쌓은 2성을 철거할 것도 요청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 파견을 중단하였다. 한편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 압록강 하구에서 동북면 도련포에 이르기까지 고려장성 축조를 시작하였다.
몽량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28 왕비이다. 아버지는 박수경인데, 그는 평주 출신으로 태조 왕건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후백제 견훤과의 조물군 전투에서는 그의 부대만이 승리하였고 발성 전투에서는 위기에 빠진 태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역분전을 제정할 때 그에게 특별히 전 200결을 주었다. 정종의 즉위에도 공로를 세웠고 광종 즉위 후에도 국초에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곡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종의 호족 숙청 과정에서 아들 3명이 투옥되자 화병으로 죽었다.
몽량원부인 (夢良院夫人)
몽량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28 왕비이다. 아버지는 박수경인데, 그는 평주 출신으로 태조 왕건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후백제 견훤과의 조물군 전투에서는 그의 부대만이 승리하였고 발성 전투에서는 위기에 빠진 태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역분전을 제정할 때 그에게 특별히 전 200결을 주었다. 정종의 즉위에도 공로를 세웠고 광종 즉위 후에도 국초에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곡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종의 호족 숙청 과정에서 아들 3명이 투옥되자 화병으로 죽었다.
문종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며, 형인 제10대 왕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 상속의 형태를 취해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 재위기는 고려의 황금기라 할 정도로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된 시기였다.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가 제정되는 등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정치·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형법 정비와 재면법 마련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 몇 차례 동여진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고 여진과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문종 (文宗)
문종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46~1083년이며, 형인 제10대 왕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 상속의 형태를 취해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 재위기는 고려의 황금기라 할 정도로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된 시기였다. 양반전시과가 다시 정비되고 관제가 개편되었으며, 백관의 서열과 녹과가 제정되는 등 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정치·경제제도가 완비되었다. 형법 정비와 재면법 마련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이 있었다. 몇 차례 동여진의 침략도 모두 격퇴하고 여진과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부여공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이다. 어머니는 인경현비 이씨이다. 형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사촌 동생인 적경궁주와 결혼하였다. 숙종 때에 죄를 지어 경산부 약목군에 유배되었는데 예종 때에 또 죄를 지어 본인은 거제현으로 유배되고 그 아들 왕면은 진례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고, 그 이듬해 아들은 방면되어 개경으로 돌아왔다.
부여공 (扶餘公)
부여공은 고려 전기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왕자이다. 어머니는 인경현비 이씨이다. 형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사촌 동생인 적경궁주와 결혼하였다. 숙종 때에 죄를 지어 경산부 약목군에 유배되었는데 예종 때에 또 죄를 지어 본인은 거제현으로 유배되고 그 아들 왕면은 진례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고, 그 이듬해 아들은 방면되어 개경으로 돌아왔다.
사숙태후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의 제2 왕비이다. 이석의 딸로서 선종이 국원공 시절에 혼인하였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선종의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서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헌종 즉위 직후 이자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계림공 왕희가 숙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실각하였다. 예종대에 논란 끝에 제1비 정신현비를 제치고 선종 사당에 합사하였다.
사숙태후 (思肅太后)
사숙태후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의 제2 왕비이다. 이석의 딸로서 선종이 국원공 시절에 혼인하였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선종의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서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헌종 즉위 직후 이자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계림공 왕희가 숙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실각하였다. 예종대에 논란 끝에 제1비 정신현비를 제치고 선종 사당에 합사하였다.
선종은 고려 전기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83~1094년. 문종의 아들로 형인 순종이 즉위 두 달 만에 죽자 즉위하였다.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아우 의천이 송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경과 경서 1천 권을 바치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송·요·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서적 4천여 권을 모두 간행하게 했다. 예부의 건의로 국학에 공자의 제자 72현의 상을 그려 벽에 붙이기도 하였다.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났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 건립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선종 (宣宗)
선종은 고려 전기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83~1094년. 문종의 아들로 형인 순종이 즉위 두 달 만에 죽자 즉위하였다.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아우 의천이 송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불경과 경서 1천 권을 바치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송·요·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서적 4천여 권을 모두 간행하게 했다. 예부의 건의로 국학에 공자의 제자 72현의 상을 그려 벽에 붙이기도 하였다.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났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 건립에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성종은 고려 전기 제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81~997년. 경종의 선양으로 즉위하였다. 즉위년에 5품 이상의 경관에게 시정에 관한 건의문을 바치게 하였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였다. 중앙 관제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였고, 새로운 사회를 이끌기 위한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였다. 고려의 기틀은 이때 마련되었다고 평가된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서희를 보내 외교 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편입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997년(성종 16) 병이 위독해지자 조카 왕송(이후의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성종 (成宗)
성종은 고려 전기 제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81~997년. 경종의 선양으로 즉위하였다. 즉위년에 5품 이상의 경관에게 시정에 관한 건의문을 바치게 하였고,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였다. 중앙 관제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였고, 새로운 사회를 이끌기 위한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였다. 고려의 기틀은 이때 마련되었다고 평가된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서희를 보내 외교 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 6주를 편입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997년(성종 16) 병이 위독해지자 조카 왕송(이후의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소광주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16 왕비이다.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두 딸을 태조에게, 한 딸을 혜종에게 드렸는데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왕비 중 하나이다. 혜종 대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왕규가 살해당하면서 소광주원부인도 죽었거나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소광주원부인 (小廣州院夫人)
소광주원부인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의 제16 왕비이다.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두 딸을 태조에게, 한 딸을 혜종에게 드렸는데 소광주원부인은 태조의 왕비 중 하나이다. 혜종 대의 왕위 다툼 과정에서 왕규가 살해당하면서 소광주원부인도 죽었거나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원덕대왕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 왕건의 선조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의하면 “『태조실록』에는 즉위 2년에 왕의 삼대조고를 추존해서 시조에게는 존호를 올려 원덕대왕이라 하고 비는 정화왕후라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설이 있지만 이제건의 동생이며 진의의 아버지인 보육을 원덕대왕이라 보고 있다. 그는 조카인 덕주와 혼인하여 진의를 낳고 진의가 당 황실과 결혼하여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원덕대왕 (元德大王)
원덕대왕은 고려 전기 제1대 왕 태조 왕건의 선조이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의하면 “『태조실록』에는 즉위 2년에 왕의 삼대조고를 추존해서 시조에게는 존호를 올려 원덕대왕이라 하고 비는 정화왕후라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설이 있지만 이제건의 동생이며 진의의 아버지인 보육을 원덕대왕이라 보고 있다. 그는 조카인 덕주와 혼인하여 진의를 낳고 진의가 당 황실과 결혼하여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원성태후는 고려 전기 제8대 왕 현종의 제3 왕비이다. 김은부의 딸이며 이허겸의 손녀이다. 1010년(현종 1) 거란병이 침입하여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가게 되었을 때 공주에 들르자 김은부가 옷과 특산물을 바쳤다. 거란병이 물러가고 돌아올 때도 다시 공주에 머물렀는데 김은부가 딸을 시켜 현종에게 옷을 지어 바쳤다. 그런 인연으로 현종의 후비가 되었다. 그녀의 자매 둘도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1028년(정종 19) 죽으니 시호를 원성왕후라 하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원성태후 (元成太后)
원성태후는 고려 전기 제8대 왕 현종의 제3 왕비이다. 김은부의 딸이며 이허겸의 손녀이다. 1010년(현종 1) 거란병이 침입하여 현종이 나주로 피난 가게 되었을 때 공주에 들르자 김은부가 옷과 특산물을 바쳤다. 거란병이 물러가고 돌아올 때도 다시 공주에 머물렀는데 김은부가 딸을 시켜 현종에게 옷을 지어 바쳤다. 그런 인연으로 현종의 후비가 되었다. 그녀의 자매 둘도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1028년(정종 19) 죽으니 시호를 원성왕후라 하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태조는 고려 전기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18∼943년이다. 이름은 왕건으로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시중이 되었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열고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문란해진 토지제도 정비와 조세 경감으로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호족들과는 정략결혼으로 연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펴는 한편 후백제에는 화전 양면 전술로 대응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불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장려하였고 왕실의 헌장으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태조 (太祖)
태조는 고려 전기 제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18∼943년이다. 이름은 왕건으로 궁예의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시중이 되었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열고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문란해진 토지제도 정비와 조세 경감으로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호족들과는 정략결혼으로 연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펴는 한편 후백제에는 화전 양면 전술로 대응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불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아 장려하였고 왕실의 헌장으로 자손들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다.
현종은 고려 전기 제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09~1031년이며, 승려로 숭교사와 신혈사에 있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여,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거란의 2차, 3차 침입을 물리치고 강력한 북진정책을 실천하여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큰 문화적 업적이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현종 (顯宗)
현종은 고려 전기 제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09~1031년이며, 승려로 숭교사와 신혈사에 있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여,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였다. 거란의 2차, 3차 침입을 물리치고 강력한 북진정책을 실천하여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큰 문화적 업적이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호경은 고려 전기 태조 왕건의 6대조라는 설화상의 주인공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부소산 골짜기에 정착해 살았다. 사냥을 업으로 삼아 평나산에 갔다가 같이 간 9명이 죽어 이름을 구룡산이라 고쳤다 한다. 여산신과 혼인하였으나 옛 처와의 사이에서 강충이란 인물을 낳았다 한다. 그가 백두산으로부터 온 것에 입각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호경 (虎景)
호경은 고려 전기 태조 왕건의 6대조라는 설화상의 주인공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부소산 골짜기에 정착해 살았다. 사냥을 업으로 삼아 평나산에 갔다가 같이 간 9명이 죽어 이름을 구룡산이라 고쳤다 한다. 여산신과 혼인하였으나 옛 처와의 사이에서 강충이란 인물을 낳았다 한다. 그가 백두산으로부터 온 것에 입각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상국은 고려시대 종2품 이상의 관원을 가리키던 재상의 또다른 칭호이다.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 및 제평장사, 그리고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등 다섯 개의 관직에 있는 8인과 중추원의 판원사 · 원사 · 지원사 · 동지원사 및 부사 · 첨서원사 · 직학사 등 일곱 개의 관직에 있는 9인을 가리킨다.
상국 (相國)
상국은 고려시대 종2품 이상의 관원을 가리키던 재상의 또다른 칭호이다.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 및 제평장사, 그리고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등 다섯 개의 관직에 있는 8인과 중추원의 판원사 · 원사 · 지원사 · 동지원사 및 부사 · 첨서원사 · 직학사 등 일곱 개의 관직에 있는 9인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