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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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진사는 12세기 중엽에 성수사의 암자로 건립되었다. 조선 중기 고승 허응 보우가 대장경각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면서 독립된 사찰로 중창하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重修)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 성불사의 말사(末寺)였다. 극락전을 중심 건물로 하고 주악루, 심검당, 동선당, 서승당, 향로전, 칠성각, 관음대와 칠층탑 등이 있었다.
숭덕산 귀진사 (崇德山 歸眞寺)
귀진사는 12세기 중엽에 성수사의 암자로 건립되었다. 조선 중기 고승 허응 보우가 대장경각을 짓고 불경을 간행하면서 독립된 사찰로 중창하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重修)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 성불사의 말사(末寺)였다. 극락전을 중심 건물로 하고 주악루, 심검당, 동선당, 서승당, 향로전, 칠성각, 관음대와 칠층탑 등이 있었다.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1418년에 1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세운 원당이다. 대자암의 토지가 250결에 이르고 120명의 승려를 비롯해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한 왕실 원찰이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안평대군·수양대군, 문종과 단종 등이 참여한 왕실 원당이었다. 행호와 무학의 수제자인 진산과 기화, 신미가 주지로 재임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사되어 갔다. 그 후 대자암에 인조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로 조성되어 곁에 명적암이라 하였다.
대자산 대자암 (大慈山 大慈庵)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1418년에 1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세운 원당이다. 대자암의 토지가 250결에 이르고 120명의 승려를 비롯해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한 왕실 원찰이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안평대군·수양대군, 문종과 단종 등이 참여한 왕실 원당이었다. 행호와 무학의 수제자인 진산과 기화, 신미가 주지로 재임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사되어 갔다. 그 후 대자암에 인조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로 조성되어 곁에 명적암이라 하였다.
마하연사는 통일신라 시대, 승려 의상이 북한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금강산(金剛山)에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말에 인도승 지공이 묵었으며, 조선 중기 고승의 보우가 15세에 출가하였다. 조선 후기에 승려 청고와 인성과 경화 등이 묵기도 하였다. 1831년(순조 31), 승려 월송 등이 50여 동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 14) 승려 대운이 마하선실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 1923년 승려 형진이 10년 정진하면서 1932년 59칸의 전각을 중창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으며 그 후 중수되어 고승 만공 등이 수행하였다.
금강산 마하연사 (金剛山 摩訶衍寺)
마하연사는 통일신라 시대, 승려 의상이 북한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금강산(金剛山)에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말에 인도승 지공이 묵었으며, 조선 중기 고승의 보우가 15세에 출가하였다. 조선 후기에 승려 청고와 인성과 경화 등이 묵기도 하였다. 1831년(순조 31), 승려 월송 등이 50여 동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 14) 승려 대운이 마하선실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 1923년 승려 형진이 10년 정진하면서 1932년 59칸의 전각을 중창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으며 그 후 중수되어 고승 만공 등이 수행하였다.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1211년(희종 7) 원묘국사 요세가 천태종의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고승들은 백련사 8국사라고도 불리었다. 강진 백련사의 사세는 완도의 법화사, 상주의 동백련사, 제주의 묘련사와 법화사로 전개되었다. 원 간섭기에 개경의 묘련사에 진출하였으며, 개경의 보암사와 법화사의 결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에 행호가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중창하였다. 조선 후기에 백련사 8대사가 배출되었는데 대부분 소요태능계의 전법 제자였다.
백련사 (白蓮社)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1211년(희종 7) 원묘국사 요세가 천태종의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고승들은 백련사 8국사라고도 불리었다. 강진 백련사의 사세는 완도의 법화사, 상주의 동백련사, 제주의 묘련사와 법화사로 전개되었다. 원 간섭기에 개경의 묘련사에 진출하였으며, 개경의 보암사와 법화사의 결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에 행호가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중창하였다. 조선 후기에 백련사 8대사가 배출되었는데 대부분 소요태능계의 전법 제자였다.
보덕굴은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북한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금강산(金剛山) 법기봉(法起峰) 만폭동에 있는 사찰이다. 구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얹고 관음전을 세웠다. 관음전 내의 관음상은 금강산 안에서 가장 영험 있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1115년에는 승려 회정이 중창하여 관음도량으로 삼았다. 1540년(중종 35)과 1675년(숙종 1), 1726년(영조 2)에 중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승려 율봉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강산 보덕굴 (金剛山 普德窟)
보덕굴은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북한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금강산(金剛山) 법기봉(法起峰) 만폭동에 있는 사찰이다. 구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얹고 관음전을 세웠다. 관음전 내의 관음상은 금강산 안에서 가장 영험 있는 불상으로 유명하다. 1115년에는 승려 회정이 중창하여 관음도량으로 삼았다. 1540년(중종 35)과 1675년(숙종 1), 1726년(영조 2)에 중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승려 율봉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436년(세종 18)에 청수암으로 중창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대와 영조 초반에 걸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었다. 1734년에 5백 근의 범종을 주조하고 절 이름을 정수사로 고쳤으며 이듬해에 승려 찬붕과 영삼이 산 이름을 만덕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복흥사로 고쳤다.
만덕산 복흥사 (萬德山 福興寺)
1436년(세종 18)에 청수암으로 중창하였다. 조선 후기 숙종대와 영조 초반에 걸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었다. 1734년에 5백 근의 범종을 주조하고 절 이름을 정수사로 고쳤으며 이듬해에 승려 찬붕과 영삼이 산 이름을 만덕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복흥사로 고쳤다.
봉은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951년에 태조의 원당으로 아버지 태조를 위해 세웠다. 951년 무렵에 태조 진전에 태조 왕건 동상이 조성되어 안치되었다. 경내 효사관(공민왕 이후 경명전)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1234년(고종 21)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는 참정 차척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후 중건하였다. 2월 연등회 때와 태조의 기일을 전후로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국사와 왕사의 책봉이 있었으며 중요 고승이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퇴락하였다.
개성 봉은사 (開城 奉恩寺)
봉은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었던 고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951년에 태조의 원당으로 아버지 태조를 위해 세웠다. 951년 무렵에 태조 진전에 태조 왕건 동상이 조성되어 안치되었다. 경내 효사관(공민왕 이후 경명전)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1234년(고종 21)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는 참정 차척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후 중건하였다. 2월 연등회 때와 태조의 기일을 전후로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국사와 왕사의 책봉이 있었으며 중요 고승이 주석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퇴락하였다.
신라 고승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뱃길로 돌아와 서해안에 절을 짓고 부석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부석사에서 조성한 금동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불두가 현재 일본 쓰시마의 간노지에 소장되어 있다. 서산 부석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의 복장유물에 의하면 1330년에 계진 등 32명 발원자들이 주조하였다. 조선 초에 태조의 왕사인 무학자초가 부석사도 중건하다. 1669년 승려 원응 등이 범종을 조성하였다. 근대에 고승 만공이 부석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도비산 부석사 (島飛山 浮石寺)
신라 고승 의상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뱃길로 돌아와 서해안에 절을 짓고 부석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부석사에서 조성한 금동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불두가 현재 일본 쓰시마의 간노지에 소장되어 있다. 서산 부석사 금동 관음보살 좌상의 복장유물에 의하면 1330년에 계진 등 32명 발원자들이 주조하였다. 조선 초에 태조의 왕사인 무학자초가 부석사도 중건하다. 1669년 승려 원응 등이 범종을 조성하였다. 근대에 고승 만공이 부석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불은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비슬산(琵瑟山)에 있었던 고려 왕들이 자주 행차한 사찰이다. 광종이 중창하여 불은사라고 했으며 약사도량으로 삼았다. 『고려사』에 예종과 고종, 충렬왕, 공민왕 등이 행차한 기록이 전한다. 목종 때 원공국사 지종과 충숙왕 때 삼장법사 자은군 의선과 문도인 희암이 주지로 있었다. 의종 때는 문신 최윤의의 유골을 경내 보리원에 모셨다. 충렬왕은 절에 덕자궁을 짓고 머물렀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다.
비슬산 불은사 (琵瑟山 佛恩寺)
불은사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비슬산(琵瑟山)에 있었던 고려 왕들이 자주 행차한 사찰이다. 광종이 중창하여 불은사라고 했으며 약사도량으로 삼았다. 『고려사』에 예종과 고종, 충렬왕, 공민왕 등이 행차한 기록이 전한다. 목종 때 원공국사 지종과 충숙왕 때 삼장법사 자은군 의선과 문도인 희암이 주지로 있었다. 의종 때는 문신 최윤의의 유골을 경내 보리원에 모셨다. 충렬왕은 절에 덕자궁을 짓고 머물렀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다.
사경원은 사경(寫經)을 실시한 장소이자 기관이다. 사경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베껴 적는 것을 말한다. 승려나 재가 신도들에 의해 많은 사경이 이루어졌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승려인 사경승(寫經僧)이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경원 또는 사경소(寫經所)가 설치되어 전문 사경승들이 경전을 서사하였다. 무신집권기 중기 이후부터는 국가에서 사경원을 설치하였다. 충렬왕과 충숙왕 및 충선왕 때에 금자원(金字院)과 은자원(銀字院)이라는 사경소가 있었다.
사경원 (寫經院)
사경원은 사경(寫經)을 실시한 장소이자 기관이다. 사경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베껴 적는 것을 말한다. 승려나 재가 신도들에 의해 많은 사경이 이루어졌고,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승려인 사경승(寫經僧)이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사경원 또는 사경소(寫經所)가 설치되어 전문 사경승들이 경전을 서사하였다. 무신집권기 중기 이후부터는 국가에서 사경원을 설치하였다. 충렬왕과 충숙왕 및 충선왕 때에 금자원(金字院)과 은자원(銀字院)이라는 사경소가 있었다.
성불사(成佛寺)는 신라 말기에 북한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산(正方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창건한 사찰이다. 1327년에 나옹이 응진전을 비롯한 산내 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 1453년 관찰사 배환 등이 수륙재를 개설하여 악병을 없앴다고 한다. 1569년 승려 설숭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 정방산에 축성 이후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31본산으로서 36개 말사를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보담이 중수했다.
정방산 성불사 (正方山 成佛寺)
성불사(成佛寺)는 신라 말기에 북한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산(正方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이 창건한 사찰이다. 1327년에 나옹이 응진전을 비롯한 산내 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 1453년 관찰사 배환 등이 수륙재를 개설하여 악병을 없앴다고 한다. 1569년 승려 설숭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 정방산에 축성 이후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31본산으로서 36개 말사를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보담이 중수했다.
신광사는 고려시대에 원나라 제15대 순제가 북한 황해남도 벽성군 북숭산(北嵩山)에 원찰로 중건했던 사찰이다. 923년 윤질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을 신광사에 모시기 전 창건된 듯하다. 현종이 행차하고 문종과 숙종이 나한재를 개설하는 등 오백나한 신앙의 중심지였다. 신광사는 천태종 6개 본산 중의 하나였다. 원의 순제의 원찰로 중건되면서 대찰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인조대 승려 도흠이 중창하였으나 1677년 화재로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숙종대 중창을 거듭하여 경종 대에 이르기 까지 중건되어 큰 사찰이 되었다.
북숭산 신광사 (北嵩山 神光寺)
신광사는 고려시대에 원나라 제15대 순제가 북한 황해남도 벽성군 북숭산(北嵩山)에 원찰로 중건했던 사찰이다. 923년 윤질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을 신광사에 모시기 전 창건된 듯하다. 현종이 행차하고 문종과 숙종이 나한재를 개설하는 등 오백나한 신앙의 중심지였다. 신광사는 천태종 6개 본산 중의 하나였다. 원의 순제의 원찰로 중건되면서 대찰이 되었다. 조선 후기 인조대 승려 도흠이 중창하였으나 1677년 화재로 전각들이 불타버렸다. 숙종대 중창을 거듭하여 경종 대에 이르기 까지 중건되어 큰 사찰이 되었다.
심복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 용봉산(龍鳳山)에 있었던 사찰이다. 651년 창건하였고, 1219년에 승려 천희가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의 왕사 자초가 1396년에 중창하였으며, 10층 다보탑을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1,000여 칸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1644년 승려 인감과 일원이, 1649년 승려 이이 등이 중건하였다.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원당이었다. 1821년 고승 영암이 암자 보광암을 창건하고 지탁이 20여년 주석하였다. 1932년 주지 임태화가 요사채 16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봉산 심복사 (龍鳳山 心腹寺)
심복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 용봉산(龍鳳山)에 있었던 사찰이다. 651년 창건하였고, 1219년에 승려 천희가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의 왕사 자초가 1396년에 중창하였으며, 10층 다보탑을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1,000여 칸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1644년 승려 인감과 일원이, 1649년 승려 이이 등이 중건하였다.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원당이었다. 1821년 고승 영암이 암자 보광암을 창건하고 지탁이 20여년 주석하였다. 1932년 주지 임태화가 요사채 16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복사는 919년 고려 태조가 창건한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사찰이다. 개경의 10대 사찰 중 하나로, 보제사와 연복사로 불리다가 충숙왕대부터 주로 연복사라 불리었다. 광명사(廣明寺), 서보통사(西普通寺)와 함께 3대 선우(禪宇)라고 불리웠었다. 원 간섭기 이후 종과 탑이 중수되었으며 현재 종은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다. 1390년 연복사 탑을 중수하려 하자 신흥 사대부의 억불 상소로 중수는 중단되었다. 1424년 선교양종 36사 제정시 선종에 귀속되었다. 명종대에 폐사되어 오층탑만 남아 있다가 양란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개성 연복사 (開城 演福寺)
연복사는 919년 고려 태조가 창건한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는 사찰이다. 개경의 10대 사찰 중 하나로, 보제사와 연복사로 불리다가 충숙왕대부터 주로 연복사라 불리었다. 광명사(廣明寺), 서보통사(西普通寺)와 함께 3대 선우(禪宇)라고 불리웠었다. 원 간섭기 이후 종과 탑이 중수되었으며 현재 종은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다. 1390년 연복사 탑을 중수하려 하자 신흥 사대부의 억불 상소로 중수는 중단되었다. 1424년 선교양종 36사 제정시 선종에 귀속되었다. 명종대에 폐사되어 오층탑만 남아 있다가 양란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관음사는 고려 전기,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천마산에 승려 법인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후기에는 낙산 관음굴과 함께 가까운 천마산 관음굴이 2대 관음 기도처로 이름이 있었다. 태조의 조부인 익조가 부인과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를 낳았다. 1395년에는 태조가 전왕족인 고려 왕씨들을 위해 견암사, 삼화사와 함께 매년 춘추로 수륙재를 상설하도록 하였다. 1424년 선교양종 36개사로 축소시 관음사는 선종에 소속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등사 말사였다. 관음사 뒤 관음굴에 있던 2구의 관음보살상은 옛 조각상으로 예술적으로 우수하다.
천마산 관음사 (天摩山 觀音寺)
관음사는 고려 전기,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천마산에 승려 법인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후기에는 낙산 관음굴과 함께 가까운 천마산 관음굴이 2대 관음 기도처로 이름이 있었다. 태조의 조부인 익조가 부인과 관음굴에서 기도하여 도조를 낳았다. 1395년에는 태조가 전왕족인 고려 왕씨들을 위해 견암사, 삼화사와 함께 매년 춘추로 수륙재를 상설하도록 하였다. 1424년 선교양종 36개사로 축소시 관음사는 선종에 소속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등사 말사였다. 관음사 뒤 관음굴에 있던 2구의 관음보살상은 옛 조각상으로 예술적으로 우수하다.
조선 후기에, 대흥사 편양파의 법손으로 대흥사 제2대 강사를 역임한 승려.
광열 (廣悅)
조선 후기에, 대흥사 편양파의 법손으로 대흥사 제2대 강사를 역임한 승려.
고려 후기에, 나옹 혜근의 제자로 서기의 직무를 담당한 승려.
각웅 (覺雄)
고려 후기에, 나옹 혜근의 제자로 서기의 직무를 담당한 승려.
고려 후기에, 『해동고승전』을 저술한 승려.
각훈 (覺訓)
고려 후기에, 『해동고승전』을 저술한 승려.
고려 후기에, 삼중대사를 역임한 승려.
경조 (景照)
고려 후기에, 삼중대사를 역임한 승려.
고려 전기에, 대각국사 의천의 화엄종을 계승한 승려.
계응 (戒膺)
고려 전기에, 대각국사 의천의 화엄종을 계승한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