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익공신(保翼功臣)은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세력을 제거한 사람들에게 내린 칭호이다. 1545년(명종 즉위) 외척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이 거세지면서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小尹) 일파가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한 을사사화가 발생했다. 이후 대윤 일파를 제거한 소윤 일파는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봉되었으며, 며칠 후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개칭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는 중종(中宗)의 외척들이 대립한 끝에 발생하였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비(妃)가 있었다. 우선 정비(正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반대한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그다음으로 계비(繼妃)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는 세자 호(岵: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었고, 경원대군(慶源大君: 뒤의 명종)을 낳았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간의 대립이 나타났다. 이른바 대윤은 장경왕후의 아우이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이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형제이자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 · 윤원형(尹元衡) 일파이다. 또한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 구도에 일반 관료들도 편승하면서 정권은 크게 분열하였다. 그런데 중종의 후계 국왕인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1545년에 12세에 불과한 명종이 즉위하였다.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 정치를 하였고, 정권은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리고 소윤은 대윤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였고, 윤임을 비롯하여 좌의정 유관(柳灌),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등이 역모죄에 몰렸다. 그리고 이러한 을사사화에서 대윤 일파의 제거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보익공신(保翼功臣)에 책봉되었다.
보익공신 책봉은 1545년(명종 즉위) 8월에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대윤이 역모를 꾀한다고 아뢰었다는 정순붕(鄭順朋) · 이기(李芑) · 임백령(林百齡) · 허자(許磁) 이상 4인을 1등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에 책봉하였다. 2등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에는 홍언필(洪彦弼) · 윤인경(尹仁鏡) · 이언적(李彦迪) · 권벌(權橃) · 정옥형(丁玉亨) · 신광한(申光漢) · 윤개(尹漑) · 민제인(閔齊仁) · 김광준(金光準)의 9인, 3등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에는 송기수(宋麒壽) 등 16인을 녹공하였다. 이때 공신에 책봉되지 않았던 윤원형은 며칠 뒤에 추가로 책봉되었다. 9월에 정순붕 등의 1등 공신들의 뜻에 따라 윤원형을 비롯하여 한경록(韓景祿: 명종의 처남) · 임구령(林九齡: 임백령의 아우) · 윤돈인(尹敦仁) · 최언호(崔彦浩) · 보성수(寶城守) · 이만년(李萬年) 등이 3등 공신에 포함되었고, 며칠 뒤에는 명종의 명으로 문정왕후의 일족 윤삼(尹參)이 3등 공신에 추가 책봉되었다.
한편, 며칠 뒤 경기관찰사 김명윤(金明胤)이 ‘인종 사망 당시에 윤임이 계림군(鷄林君: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의 양자) 이유(李瑠)를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하였고, 결국 윤임 등의 대윤 일파는 참형을 당했다.
얼마 후 공신의 칭호는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고쳐졌고, 공신 등급도 재조정되었다. 우선 1등 공신은 기존과 같다. 2등 공신은 홍언필 · 윤인경 · 윤원형 · 민제인 · 최보한 · 김광준 · 임구령 · 한경록 등 8인, 3등 공신은 이언적 · 정옥형 · 신광한 · 윤개 · 송기수 · 최연(崔演) · 송세형(宋世珩) · 이윤경(李潤慶) · 윤돈인 · 이만년 · 최언호 · 정현(鄭礥) · 신수경(申秀涇) · 조박(趙璞) · 박한종(朴漢宗) · 윤삼 등 16인이다. 이상 위사공신은 모두 28명이다. 당시 등급 재조정은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 세력의 책봉에 주력한 조치로 보고 있다. 그리고 공신 책봉 후 3년이 흐른 1548년(명종 3)에는 황헌(黃憲) · 심연원(沈連源) · 김명윤 · 안세우(安世遇) 등 4인이 추록되었다.
보익공신(위사공신)의 책봉은 을사사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소윤 계열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했던 조처였다. 그러나 위사공신에는 무고에 가담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어, 사림의 비난을 받아 오다가 1577년(선조 10)에 모두 삭훈(削勳)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