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사상은 중생은 본래부터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불교 교리이다. 여래장사상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여래장경』에서 ‘일체중생실유여래장(一切衆生悉有如來藏)’이라고 천명한 뒤부터 여래장사상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반야의 지혜보다는 자비가 깊이 있게 전개되었으며, 중생 모두에게 성불(成佛)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여래장사상은 『대반열반경』과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원효는 여래장사상이 가장 잘 정리되고 집약되어 있는 『대승기신론』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여래장은 범어 타타아가타 가르바(tathāgata-garbha)의 의역(意譯)이다. 모든 중생의 탐심과 분노심 등의 번뇌 안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여래법신(如來法身), 즉 중생 안에 감추어진 여래의 인(因)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번뇌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자성청정심이다.
이것은 부파불교의 심성론(心性論) 중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을 이어 받은 것으로, 대승불교의 초기사상인 반야공관설(般若空觀說)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공이 즉 자성청정’이라는 학설을 새롭게 전개시킨 것이다.
이론적인 탐구로 떨어지기 쉬운 반야공관의 오류를 보완하고 자비의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기 위하여 대두된 여래장사상은 ① 원시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이어받아, ②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반야공관설이 생겨났고, ③ 그 반야의 공성(空性)을 일체유정(一切有情)에게 체득시키고자 하는 대승적 구경일승(究竟一乘)의 입장에서 성립되었다. 이를 도식화하면 [그림]과 같다.
이와 같이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데서 발단된 여래장사상은 『여래장경』에서 ‘일체중생실유여래장(一切衆生悉有如來藏)’이라고 천명한 뒤부터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는 어려운 반야의 지혜보다는 자비가 보다 깊이 있게 전개되었으며,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도 성불(成佛)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실천으로서 자비의 측면을 새롭게 부각시킨 여래장사상은 중생의 신행(信行)을 새로운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기 여래장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에는 『여래장경』 · 『부증불감경(不增不减經)』 · 『승만경(勝鬘經)』이 있다. 이것을 여래장사상 제1기경전이라고도 한다. 그뒤 4, 5세기경에 『보성론(寶性論)』이 저술되어 그 사상적 체계가 정립됨으로써 대승불교의 한 학파의 성격을 띠고 조직화되었다. 『승만경』 이전의 여래장사상은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보성론』에 이르러서도 무슨 이유로 중생은 번뇌에 물들게 되는가에 관한 해석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아직 본성의 청정함과 마음의 정화에만 중점을 두고 추구하는 체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보성론』을 둘러싼 이 시기의 경론으로는 『대승장엄경론(大乘莊儼經論)』 · 『불성론(佛性論)』 등이 있으며, 이를 여래장사상 제2기경전이라고도 한다. 그 뒤 여래장사상은 아라야식(A-laya識)의 체계에 의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하는 유식설과 교섭하게 됨에 따라 해결이 어려운 인간의 현실적 마음의 문제로 폭을 넓혀갔다.
이에 속하는 경론에는 『능가경(楞伽經)』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 있다. 이것을 여래장사상 제3기경전이라고도 한다. 7세기 중엽 이후는 밀교(密敎)와의 결합으로 여래장사상이 밀교화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여래장계 경론을 그 성립연대 및 사상의 흐름을 통하여 3기로 구분하는 것은 여래장사상 연구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이에 반하여 여래장계 경론에 대한 중국에서의 역경사(譯經史)를 중심으로 여래장사상의 변천을 살펴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여래장계 경전의 성립기인 5세기를 1기로, 유식설과의 교섭과 논전(論典)에 의한 조직화의 시기인 6세기와 7세기 중기를 2기로, 밀교와의 결합으로 여래장사상이 밀교화된 7세기 중기 이후를 3기로 보고 있다.
한국인이 찬술한 여래장계 경전주석서를 도식화하면 〈표 1〉과 같다.
시대 | 저자 | 문헌명 | 권수 | 현존여부 |
---|---|---|---|---|
신라 | 圓光 | 如來藏經私記 | 3 | 失 |
大方等如來藏經疏 | 1 | 失 | ||
元曉 | 金剛三昧經論 | 3 | 存 | |
勝鬘經疏 | 2 | 失 | ||
涅槃經宗要 | 1 | 存 | ||
涅槃經疏 | 5 | 失 | ||
楞伽經疏 | 7 | 失 | ||
楞伽經宗要 | 1 | 失 | ||
不增不減經疏 | 1 | 失 | ||
寶性論宗要 | 1 | 失 | ||
寶性論料簡 | 1 | 失 | ||
大乘起信論疏 | 2 | 存 | ||
起信論別記 | 1 | 存 | ||
大乘起信論宗要 | 1 | 失 | ||
大乘起信論料簡 | 1 | 失 | ||
大乘起信論私記 | 1 | 失 | ||
起信論一道章 | 1 | 失 | ||
憬興 | 涅槃經疏 | 14 | 失 | |
涅槃經述贊 | 14 | 失 | ||
涅槃經料簡 | 1 | 失 | ||
大乘起信論問答 | 1 | 失 | ||
勝莊 | 佛性論義 | 1 | 失 | |
起信論問答 | 1 | 失 | ||
玄一 | 大涅槃經料簡 | 1 | 失 | |
悟眞 | 涅槃經羅什譯出十四音辨 | 1 | 失 | |
義寂 | 涅槃經綱目 | 1 | 失 | |
涅槃經疏 | 16 | 失 | ||
涅槃經疏涅槃經義記 | 5 | 失 | ||
涅槃經云何偈 | 1 | 失 | ||
遁倫 | 勝鬘經疏 | 2 | 失 | |
太賢 | 涅槃經古迹記 | 8 | 失 | |
起信論內義略探記 | 1 | 存 | ||
緣起 | 大乘起信論珠綱 | 3 | 失 | |
大乘起信論捨繁取妙 | 1 | 失 | ||
大衍 | 大方等如來藏經疏 | 2 | 失 | |
起信論疏 | 1 | 失 | ||
大乘起信論記(疏) | 1 | 失 | ||
見登 | 大乘起信論同玄章 | 2 | 失 | |
大乘起信論同異略集 | 2 | 存 | ||
고려 | 普幻 | 楞嚴經新科 | 2 | 存 |
首楞嚴經環解刪補記 | 2 | 存 | ||
조선 | 有一 | 起信論蛇足 | 1 | 存 |
楞嚴經私記 | 1 | 存 | ||
義沾 | 楞嚴經私記 | 1 | 存 | |
起信論私記 | 1 | 存 | ||
언해본 | 楞嚴經諺解 | 10 | 存 | |
〈표 1〉 여래장계 경전주석서 |
이 46종의 문헌 중 40종이 신라인 찬술 여래장계 경전주석서이며, 고려시대에 2종, 조선시대에 4종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우리나라 여래장사상이 신라 때에 집중적으로 편중 연구되고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과 고려는 특정 문헌에 한하여 여래장사상이라는 사상성을 벗어난 채 연구되었을 뿐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우리나라의 여래장사상은 신라시대에만 뚜렷한 사상성을 띠고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석한 경전과 논서의 제명은 『여래장경』 · 『금강삼매경』 · 『승만경』 · 『대반열반경』 · 『능엄경』 · 『보성론』 · 『대승기신론』 · 『불성론』 등 10종이다. 이를 시대별로 주석서의 수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문헌명\시대 | 신라 | 고려 | 조선 | 계 |
---|---|---|---|---|
여래장경 | 3 | 3 | ||
금강삼매경 | 1 | 1 | ||
승만경 | 2 | 2 | ||
대반열반경 | 12 | 12 | ||
능가경 | 2 | 2 | ||
부증불감경 | 1 | 1 | ||
보성론 | 2 | 2 | ||
대승기신론 | 16 | 2 | 18 | |
불성론 | 1 | 1 | ||
능엄경 | 2 | 2 | 4 | |
〈표 2〉 경전별 주석서 수 |
이를 통해 보면 우리나라의 여래장사상은 『대반열반경』과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여래장계의 주요 경론들이 신라 고승들에 의하여 대부분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이후에만 『능엄경』이 여래장사상 연구의 중심이 된 것은 신라 당시에는 『능엄경』을 신라인들이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신론』과 『능엄경』이 불교 강원(講院)의 사교과(四敎科) 수업 과목이 되어 꾸준히 연구되었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다소나마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여래장사상 연구자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원효이다.
원효는 전체 46종의 저술 중 16종의 여래장사상 계통의 주석서를 저술하였고, 또 여래장계 중심 경론 10종 중 7종에 대해서는 주석서를 남겼다. 『여래장경』과 『불성론』의 주석서는 없지만 그의 현존하는 저술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능엄경』은 그의 시대에 직접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취급할 수가 없었다.
원효의 저술 중에서는 여래장사상계의 문헌이 가장 많다. 여래장계 경론에 대한 원효의 주석서 중 현존본으로는 『열반종요』 · 『대승기신론소』 · 『기신론별기』 · 『금강삼매경론』 등이 있고, 실본으로는 『열반경소』 · 『능가경소』 · 『입능가경소』 · 『능가경종요』 · 『능가종요론』 · 『부증불감경소』 · 『승경』 · 『섭대승론소』 · 『세친석론약기』 · 『보성론요간』 · 『보성론종요』 등이 있다.
그 밖에 여래장계 경론이 아닌 기타의 주석서에서도 원효는 여래장계 경론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특히, 여래장사상의 주요 경전의 하나로서 그가 최초로 『기신론』의 소의경전(所依經典)임을 밝힌 『능가경』은 현존하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58번이라는 가장 많은 횟수로 인용된 경전이다. 그 밖에 『승만경』 · 『대승기신론』 · 『불성론』 · 『보성론』 등의 여래장계 경론들도 그의 여러 저술에 많이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원효의 저술 중 여래장계 경론의 주석서는 아니지만 『법화종요(法華宗要)』 ·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 『율소(律疏)』 ·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와 그의 논서인 『이장의(二障義)』 등에서도 그 핵심적 사상들을 여래장과 관련하여 해석을 가한 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원효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천명한 불경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술에서 여래장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래장사상의 가장 중요한 논서로서 평가받고 있는 『보성론』에 대한 원효의 관심이다. 『보성론』은 원효 이전 중국의 그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원효 이후에도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논서이다.
중국의 법장(法藏)이 『보성론』의 저자 견혜(堅慧)의 저술인 『대승법계무차별론』 등에 대한 주소(註疏)를 쓰고 견혜의 약전(略傳)도 서술하였던 점 등을 미루어볼 때 『보성론』을 중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의 저술에 그다지 인용되고 있지 않다. 이 『보성론』은 티베트에서 크게 전승된 데 반하여 중국에서는 거의 잊혀진 채 있었다.
1935년 이후 세계의 학계가 『보성론』의 여래장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불성론』에 편중하였던 여래장사상 연구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연구의 토대를 『보성론』으로 바꾸어놓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그런데 원효가 1,300년 전에 이미 이 『보성론』을 여래장계 주요 경론으로 지목하여 『보성론요간』 · 『보성론종요』 등을 찬술하였으며, 그의 주요 저술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다.
또한, 원효는 여래장사상이 가장 잘 정리되고 집약되어 있는 『대승기신론』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대승기신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를 가하여 『대승기신론소』 · 『기신론별기』를 저술하였으며, 여기에서 그의 윤리관과 선관(禪觀)의 기초를 찾았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은 해탈의 근거가 여래장에 있음을 밝힌 데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그 수행이 ‘일심본각여래장(一心本覺如來藏)’에로 귀일한다는 내용의 여래장사상을 천명한 논서이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을 근거로 하여 여래장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논서로서, 『금강삼매경』 자체가 원효의 저술이 아닌가 하는 견해까지도 있다. 그리고 원효는 여래장사상 제3기경전으로서 중요한 『능가경』이 『기신론』의 소의경전임을 확신하고, 『기신론』과 『능가경』의 관계를 확고히 밝히고 있다. 그와 같은 확신 아래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 『기신론별기』에서 ‘여경(如經)’이라 하여 『능가경』의 문구들을 인용하고 있다.
『열반종요』는 부처의 교설 중 가장 심오하고도 핵심적인 부분이 집약된 경전으로 인정되고 있는 『대반열반경』의 골자를 이론적으로 다듬어서 정리한 문헌이다. 불성과 열반에 관한 원효의 다각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그의 열반관과 화쟁론(和諍論) 및 여래장사상 등을 고찰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저술이다. 특히, 『기신론』의 논리에 입각한 불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래장이 무엇인가를 불성의 이름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 등의 불교학계에서는 중국 및 한국, 일본에 여래장사상을 꽃피운 인물로서 중국의 법장을 꼽고 있으며, 이 법장의 여래장설이 화엄 및 선사상과 결합함으로써 중국 및 한국, 일본의 대승불교의 맥락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8세기 이후의 중국불교교학 중에는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를 통한 해석이 기신론사상으로 일반화되었고, 그 경향은 화엄 이외의 학파에도 널리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에서의 여래장 해석의 영향 아래 본각(本覺) · 시각(始覺)의 교리 발전이 중국 및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기신론별기』를 통하여 『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이해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교판에 있어서도 원효의 교판을 기초하고 있다.
원효는 부처의 일대교(一代敎)를 ① 삼승별교(三乘別敎:四諦敎 · 緣起經 등), ② 삼승통교(三乘通敎:般若敎 · 深密經 등), ③ 일승분교(一乘分敎:瓔珞 · 梵網經 등), ④ 일승만교(一乘滿敎:華嚴經 · 普賢敎)로 구분하였다. 원효는 이 교판에서 일승만교의 우주적인 차원에서 제법문의 무애(無礙)의 관계를 밝혔으며, 그 우주관 · 세계관 위에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여래장사상을 고취하여 인간의 현세적 실천윤리를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법장은 이러한 원효의 교판을 기초로 화엄종의 관점에서 그 명칭을 달리하여 교판을 가하였다. 원효는 법장보다 앞서서 중국 및 한국, 일본의 여래장사상 전개에 선구적 구실을 담당하였고, 이 지역의 대승불교의 새로운 맥락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던 최초의 학자이기도 하다.
‘여래장’이라는 말이 여래장사상의 전개와 밀접하게 관련해 온 법성(法性) · 진여 · 법신 등과 비교될 때는 언제나 중생의 번뇌염구(煩惱染垢)와의 관계에서 말하여진다는 점을 파악한 원효는 그의 저술 속에서 중생에게 여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여래장’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불교의 중심용어인 일승 · 일심 · 실상반야 · 대열반 등을 여래장이라는 단어로 풀이하였다.
“일승 그것은 여래장이다. 일심 그것은 여래장이다. 실상반야 그것은 여래장이다. 대열반 그것은 여래장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원효가 귀일심원(歸一心源) · 요익유정(饒益有情)의 실천도로서 여래장사상을 매우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원효는 그의 모든 철학적 귀결점을 여래장사상에로 돌리고 중생의 입장에서 인간의 올바른 실천윤리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여래장의 여러 가지 측면에 대한 이해와 회통에 있어서도 원효는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그는 여래장사상의 선언으로 윤회의 중생들이 스스로 여래장임을 자각하고 깨달은 중생의 길, 일심의 길을 택할 때 그들 모두가 본각의 세계로 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주고자 하였다. 그의 여래장사상의 근저에는 『기신론』의 각(覺)의 논리가 뒷받침되어 있다.
일체중생이 가지고 있는 맑고 깨끗한 여래장은 비록 현실의 무명에 가려져서 생멸을 짓고 있지만, 우리 마음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신해성(神解性)을 잃지 않음으로써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본래의 자성청정한 마음의 본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원효는 이러한 여래장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자각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