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걸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휴암집』을 저술한 학자이다. 1497년(연산군 3)에 태어나 1579년(선조 12)에 사망했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송인수·유희춘·이이·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가 1547년 양재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대사헌,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조광조의 문묘 배향과 덕흥군 추존 등을 주장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백효삼(白效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參校) 백사수(白思粹)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백익견(白益堅)이다. 어머니는 사직(司直)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 · 유희춘(柳希春) ·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金湜)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때 예문관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던 옛 관습을 복구해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때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 유관(柳灌)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 · 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芑)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 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등용, 이듬해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고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 · 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撤廉)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사림의 의심을 받아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 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고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해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해 있었다. 이에 선조는 대사헌 · 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했으며 이이 · 성혼(成渾)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휴암집(休菴集)』이 전한다. 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