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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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사건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
이칭
이칭
기축사화(己丑士禍)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589년(선조 22)
종결 시기
1591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이다. 2년 반 정도 지속되면서 1,000명 정도가 사망한 사건이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이, 당파적으로는 동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고, 조선시대 내내 그에 대한 해석이 당파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발생 원인, 사건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상이한 사건이다.

목차
정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
개설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2년 반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 명의 동인계(東人系)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내용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 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 · 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 · 사노비들을 모아 ‘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 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 고변서를 받은 선조선전관의금부 도사(都事)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 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포위하여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자결하였다. 고변서가 조정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고변서 내용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정여립이 도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가 모반을 꾀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황해도 사람 김세겸(金世謙) · 박연령(朴延齡) · 이기(李箕) · 이광수(李光秀) · 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 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고문 끝에 죽음을 맞았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들의 자백으로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었던 이발(李潑) · 이길(李洁) · 김우옹(金宇顒) · 백유양(白惟讓) · 정언신(鄭彦信) · 홍종록(洪宗祿) · 정언지(鄭彦智) · 정창연(鄭昌衍) 등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무고한 많은 인명의 살상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후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이들은 이발의 형제 · 노모 · 자식이었다. 이발은 자신의 집에서 정여립이 그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 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 인의 상소로 나사침(羅士忱) · 나덕명(羅德明) · 나덕준(羅德峻) · 정인홍(鄭仁弘) · 한효순(韓孝純) · 정개청(鄭介淸) · 유종지(柳宗智) · 김우굉(金宇宏) · 윤의중(尹毅中) · 유몽정(柳夢井) · 조대중(曺大中) · 우성전(禹性傳) · 남언경(南彦經) 등 30여 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로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 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의 주모자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 가까이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은 그 뒤 당쟁이 벌어질 때마다 주요한 현안으로 소환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배후 인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 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 ·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으로 있던 정철이 위축된 서인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사건을 악화시켰다는 설. ③ 일부 조작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여립이 전제 군주 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 계승 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④ 최근의 연구 성과로 국왕 선조가 조정의 분열을 이용해서 세력이 강해진 동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확대시킨 사건으로 보는 설도 제기되었다.

기축옥사의 전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점들이 많다. 일차적으로는 빈약하고 부정확한 사료가 원인이다. 그와 함께 이 사건이 여전히 조선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당파적 관점에 따라 해석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건창, 『당의통략(黨議通略)』
송익필, 『구봉집(龜峰集)』
민인백, 『태천집(苔川集)』
이산해, 『아계유고(鵝溪遺稿)』

단행본

논문

김동수, 「16·17세기 호남사림의 존재형태에 대한 일고찰」(『역사학연구』 Ⅶ, 호남사학회, 1977)
김용덕, 「정여립연구」(『한국학보』 4, 중화민국한국연구학회, 1976)
우인수,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상과 기축옥의 성격」(『역사교육논집』 12, 한국역사교육학회, 1988)
이정철, 「기축옥사 초기 전개 양상 再考」(『民族文化』 45, 한국고전번역원, 2015)
오항녕, 「기축옥사의 비극적 사건과 기억들」(『韓國人物史硏究』 23, 韓國人物史硏究會, 2015)
정호훈, 「조선 후기 당쟁과 기록의 정치성 : - ‘기축옥사’ 희생자의 가해자 공방과 관련하여 -」(『韓國史學史學報』 33, 한국사학사학회, 2016)
鄭萬祚, 「朝鮮時代 朋黨論의 展開와 그 性格」(『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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