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옹은 조선 시대 병조참판, 예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숙부, 호는 동강, 직봉포의이다. 1540년(중종 35)에 출생하여 1603년(선조 36년)에 사망했다. 정치적으로 유성룡, 김성일 등과 가까워 동인에 속하였다. 김우옹은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무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 「성학육잠」,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등을 올렸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이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 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573년(선조 6)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 · 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문(吏文)을 익히지 못해 고과에 낮은 점수를 받았기에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서 이조좌랑 · 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여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고, 이어서 대사성 · 대사간을 거쳤으며,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 ·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한성부좌윤 ·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 · 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에는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 · 강학(講學) · 경신(敬身) · 극기(克己) · 친군자(親君子) · 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과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 · 독법(讀法) · 치경행재(置經行齋) · 택사유(擇師儒) · 선생도(選生徒) · 공사(貢士) · 취사(取士)의 「학제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 동안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 · 택상(擇相) · 택장(擇將) · 임관(任官) · 연병(鍊兵) · 적량(積糧) · 신상(信賞) · 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그래서 서인인 정철(鄭澈) · 이경률(李景慄) · 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이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태도를 취하였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 ·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 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