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비파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쓰인 당악기이다. 일명 사현비파 또는 곡경비파라고 한다. 조선 시대 문헌 『악학궤범』에 악기의 모양과 만드는 법 등이 실려 있다. 총 길이가 약 90㎝ 가량으로 목 부분이 ‘ㄱ’자처럼 굽었으며 넉 줄이 매여 있다. 당비파는 조선 초 세종 때 당악뿐 아니라 향악 연주 때 널리 사용되었다. 성종 때는 종묘의 헌가나 연례악 등을 연주할 때도 쓰였다. 유명했던 당비파의 명수는 송태평의 아들 전수와 도선길이었다. 당비파의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일명 사현비파(四絃琵琶) 또는 곡경비파(曲頸琵琶)라고 부른다. 악기분류법에 의하면 사부악기(絲部樂器) 또는 현명악기(絃鳴樂器)에 속한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이 악기의 몸통 길이는 2척 4촌이 조금 넘으며, 너비는 1척 4촌이고, 목의 길이는 7촌 2푼으로 총 길이가 약 90㎝ 가량이다.
몸통의 모양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의 모양과 비슷하며, 목 부분이 ‘ㄱ’자 처럼 굽었고, 굽은 목에 4개의 주아(周兒)가 좌우로 나누어 꽂혀 있다. 몸통 뒤에는 악기를 멜 수 있도록 달아 놓은 담조아(擔條兒)라는 끈이 있다.
목 부분의 앞에 4개의 주(柱)가 볼록 튀어나와 있고, 몸통 앞에 8개의 주가 붙어 있으며, 모두 12개의 주 위로 자현(子絃) · 중현(中絃) · 대현(大絃) · 무현(武絃)의 넉 줄이 상하로 매여 있다.
『악학궤범』 권7의 악기 만드는 법에 의하면, 당비파의 몸통 뒷면 재목으로는 화리(華梨)가 제일 좋지만, 철양(鐵楊) · 황상(黃桑) · 산유자(山柚子) · 괴목(槐木) · 산행(山杏) · 박달나무 같이 단단하고 빛깔 좋은 나무도 재료로 쓰인다. 몸통 앞면의 재목으로는 두충(杜沖)이 제일 좋지만, 노목(蘆木) · 아목(牙木)처럼 부드럽고 결이 곧은 나무도 사용되었다.
머리 · 목 · 장식에 쓰이는 재료는 화리 · 오매(烏梅) · 탄시(炭枾) · 산유자 같이 단단한 나무들이다. 주는 반죽(斑竹)으로 만들고, 둘러메는 고리는 은이나 두석(豆錫)으로 만들며, 담조아는 홍진사(紅眞絲)를 쓴다. 그리고 무현이 제일 굵고, 대현과 중현이 그 다음으로 굵으며, 자현이 제일 가는데, 모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들었다.
당비파의 역사는 고고학자료 및 문헌에 의해 추적될 수 있는데, 고고학자료에 의하면 그 역사가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문헌을 바탕으로 해도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당비파는 비파로 불린 듯하며, 그 비파란 말은 향비파(鄕琵琶)와의 대칭어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오직 비파가 넉 줄로 되어 있고, 3척 5촌의 크기라고 『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인용하였고, 비파의 명칭에 대한 설명은 『석명(釋名)』에서 인용되었을 뿐, 신라시대 당비파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러나 682년(신문왕 2)에 완성되었다는 감은사(感恩寺) 터에서 발굴된 청동제 사리기(舍利器)의 기단에 놓인 주악천녀(奏樂天女)가 연주하는 비파는 봉황새의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곡경비파, 즉 당비파로, 오른손에 쥐어진 발목(撥木)에 의해 연주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772년(혜공왕 8)에 건립된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에 새겨진 주악신(奏樂神)이 연주하는 비파도 역시 네 개의 주아와 넉 줄로 된 곡경의 당비파임이 분명하다.
당비파라는 명칭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고려사』 식화지인데, 1076년(문종 30) 당비파업사(唐琵琶業師) 1인이 그 당시 왕립음악기관의 하나였던 관현방(管絃房)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넉 줄로 된 (당)비파가 방향 · 퉁소 · (당)적 · (당)피리 · 아쟁 · 대쟁 · 장구 · 교방고 · 박 등 아홉 가지 악기와 함께 당악기로 분류되었는데, 당비파는 당악의 연주 때만 사용된 듯하고, 향악의 연주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비파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이미 당악뿐 아니라 향악 연주 때도 사용되었으며, 『악학궤범』에서도 그 악기는 당악기로 분류되었지만 당악의 상조(上調)와 하조(下調), 그리고 향악의 평조와 계면조의 조현법(調絃法)이 그림으로 설명된 점으로 보아 당악과 향악 연주에 모두 쓰였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성종 때 종묘의 헌가나 등가 · 전정고취 및 전후부고취, 그리고 연례악 등을 연주할 때도 쓰였다.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 음악편에서 그 당시 음악인들은 음악을 익히려면 먼저 당비파를 배워야 한다고 밝혔으며, 그때 유명했던 당비파의 명수는 전악 송태평(宋太平)의 아들 전수(田守)와 도선길(都善吉)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1572년(선조 5) 안상(安瑺)이 지은 『금합자보(琴合字譜)』에는, 당비파로 연주되었던 향악의 대표적인 악곡인 「만대엽(慢大葉)」의 악보와 그 곡에 쓰인 평조의 산형(散形)이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당비파가 향악의 연주에 많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1828년 자경전(慈慶殿)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 악공 유관득(劉寬得) · 정치룡(鄭致龍) · 허중석(許中石) · 유완철(劉完哲) 등 4인이 비파차비(琵琶差備)로서 정재(呈才)의 반주를 맡았는데, 그때의 비파는 향비파가 아닌 당비파였음이 『진작의궤(進爵儀軌)』의 그림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당비파는 그 뒤 진찬(進饌) · 진연(進宴)과 같은 궁중잔치 때마다 젓대 · 피리 · 거문고 · 가야금 등의 향악기와 함께 연주되었다.
조선 초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당비파의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전승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민족항일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당비파는 거문고 연주자들에 의해 부전공 악기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당비파의 전통은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지 않았고, 다만 악기만이 전시되고 있을 뿐이다.
당비파가 현재 연주되지 않기 때문에, 이 악기의 연주법과 조현법은 조선 초기의 문헌에 근거를 두고 정리될 수밖에 없다. 당비파의 네 가지 조현법이 『악학궤범』에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당악의 상조와 하조, 향악의 평조와 계면조 등 네 가지이다.
상조와 하조의 조현법은 대현과 무현에서만 다르고 자현과 중현은 서로 같다. 그러나 향악의 평조와 계면조의 조현법은 서로 동일하다. 당비파의 네 가지 조현법은 성종 때 당비파로 연주되던 음악이 비교적 다양했음을 시사해 준다.
연주 때 연주자는 오늘날 서양의 기타 연주자가 악기를 잡는 방법처럼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악기의 목 부분을 꼭 잡고 식지 · 장지 · 무명지 · 소지로 정해진 괘(棵)나 주를 짚었다.
당악을 연주할 때는 오른손에 쥔 발목으로 줄을 튕겼으며, 향악을 연주할 때는 오른손의 무지 · 식지 · 장지에 낀 손톱처럼 생긴 가조각(假爪角)으로 줄을 뜯었다.
줄을 안으로 뜯을 때는 식지와 장지만을 사용했지만, 줄을 밖으로 튀길 때는 식지 · 장지 · 무명지를 동시에 사용했다. 주의 사용에서도 당악 연주 때는 오직 목 부분에 달린 네 개의 주가 쓰였을 뿐이지만, 향악 연주 때는 목과 몸통에 붙은 주가 모두 사용되었다.
『악학궤범』의 당비파 산형(散形)에 의하면, 평조로 된 악곡의 연주 때는 자현과 중현의 제3주에서 제11주까지 9개의 주가 쓰였으며, 계면조의 악곡을 연주할 때는 제2주에서 제11주까지 10개의 주가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 당비파의 악보는 줄 · 주 · 손가락 · 연주법의 약자를 모아서 만든 합자보(合字譜)이다. 당비파의 합자보는 거문고의 합자보와 외관상으로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약간 다르다. 당비파의 합자보에 대한 기록은 『악학궤범』에서 약간 전하고 있고, 자세한 설명 및 합자보로 기보된 비파악곡은 『금합자보』에서 전하고 있다.